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49)화 (150/261)

* * * 

평온한 낮 시간.

물론 내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아빠, 아빠!”

나는 아빠 뒤를 졸졸 따라붙으며 말했다.

“삼촌한테 사과 안 할 거야?”

“공주야?”

아빠가 빙글, 돌더니 웃었다.

“아빠가 잘못한 거였어?”

웃는 얼굴이 무서워서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아, 아니. 잘못 말했다. 사과… 까지는 아니라도 화해는 해야지. 당장 내일모레 출정인데 그 전에는 풀어야 하잖아.”

“그럼 아빠가 아니라 삼촌이 와서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공주는 아빠가 뭘 잘못한 것 같아?”

“아빠가 잘못한 건 아니구, 삼촌이 왜 그러는지 알잖아….”

“공주야, 그놈 괜한 걱정이야. 지금 체시어만큼 실력 좋은 군인은 없어. 그리고 4년 동안 경험도 쌓을 만큼 쌓았고. 아빠가 아무 생각 없이 체시어를 지휘관으로 둔 거 아니야.”

“응, 나도 알아. 아는데. 그런데 또 부모님 마음이 그게 아니지….”

“그래도 냉정해져야지. 전쟁터에서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간 다 죽어.”

“우, 우와.”

나는 냉정한 아빠의 말에 입을 떡 벌리고 중얼거렸다.

“그거는 진짜… 나 때문에 탈영한 아빠가 할 말은 아니지….”

“…….”

아빠가 멈칫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모순되는 말인가 보다.

“돌겠네.”

피곤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는 아빠.

눈빛이 깊어진 걸 보니, 이제 화를 좀 가라앉히고 악시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 다 좋아. 알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해. 너까지 들먹이면서 아빠한테 떽떽거리는 거 못 봤어? 아빠가 너는 아끼는데 체시어는 안 아껴서 그런 거야? 아니잖아.”

“응, 그치….”

체시어의 출정은 아빠보다 더 위의 황명이다.

아빠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힘이 닿는 만큼 체시어를 배려했다.

나도 다 안다.

“그거뿐이면 말도 안 해, 공주야. 군대에서는 말이야,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해. 삼촌의 태도는 아주 글러 먹었어.”

물론 군대의 룰도 알지.

하지만, 아빠가 어디 친구에게까지 위계를 들먹이며 고압적으로 굴 사람인가?

이건 그냥 자존심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아빠아. 아빠는 삼촌이랑 상관, 부하 전에 친구잖아…. 친구로서 삼촌 마음을 조금 이해해 주면 안 돼?”

“…….”

아빠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살짝 흔들리는 듯해서, 냉큼 아빠 팔을 잡고 설득하려는데.

“아빠아아.”

“여어, 왔어?”

아빠가 계단 밑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오스카가 와 있었다.

‘맞다, 오늘 수업이지.’

나 지금 깨어진 사나이들 우정을 다시 붙여 놔야 해서 바쁜데….

“공주는 가서 공부해. 삼촌이랑은 아빠가 알아서 할게.”

“잠깐, 아빠! 으아앙!”

결국, 나는 도망치듯 가 버리는 서른한 살 금쪽이를 뒤로하고 공부방에 왔다.

“하아아아.”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으니 오스카가 물었다.

“뭔데?”

“아빠랑 악시온 삼촌이 싸웠어요.”

“아, 그래?”

“…….”

…끝?

오스카는 아무 감흥 없는 얼굴로 건들건들 다리를 떨며 책을 펼쳤다.

“뭘 봐? 책 펴.”

“뭐 안 물어보세요? 왜 싸웠는지, 그런 거.”

오스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궁금하지도 않고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와!”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는 인간 둘이 싸운 이유를 내가 왜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 그쵸. 이래야 스승님이지.”

“뭐래. 그보다, 이거.”

씩 웃은 오스카가 품 안에서 뭔가 꺼내 건넸다.

‘뭐지? 조개?’

…진짜는 아니고.

성인 손가락 크기의, 분홍색 조개껍질 모양 장식품이었다.

“이게 뭐예요?”

“마도구야. 그건 네 거고.”

오스카는 똑같이 생긴 조개껍질을 또 품에서 꺼내 보였다.

“이건 내 거.”

“앗! 커플 아이템이다!”

“너 그거 부숴 봐.”

“네?”

“빨리. 부숴 봐.”

뭐지. 나는 시킨 대로 조개껍질을 양쪽 손에 쥐고 힘을 줬다.

뽀각, 뽀개지는 순간.

“우와!”

오스카의 손에 들린 조개껍질도 같은 모양으로 두 동강 났다.

“신기하지?”

“네!”

“한 쌍이 감응되는 마도구야. 위험할 때 부수면 상대방이 바로 알 수 있지. 나는, 네 위치 좌표까지.”

나는 흥분했다.

“스, 스승님! 이거 또 있어요?”

“그럼. 많이 만들어 놨지.”

오스카는 새 조개껍질을 내게 주며 말했다.

이번에는 하늘색.

“친구가 위험하면 바로 도와줄 수 있겠다!”

“그렇지.”

오스카는 뿌듯한 표정으로 내 뺨을 툭 건드렸다.

“그러니까 무슨 일 생기면 부숴. 이 스승님이 바~로 가줄 테니까.”

“스승님!”

나는 오스카 몫의 하늘색 조개껍질을 덥석 잡았다.

“저 이거 한 쌍 다 주시면 안 돼요?”

“뭐?”

눈을 껌뻑거리던 오스카가 이내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싫어!”

“왜, 왜요? 많이 있다면서요….”

“너 위험할 때 내가 쓰려고 만든 거라니까? 근데 이거 한 쌍 다 네가 가져서 뭐에 쓸 건데?”

“…….”

“뻔하지! 내일모레 토벌인가 뭔가 하러 간다고 동네방네 소문났던데! 그 자식 위험할까 봐 주려는 거 아냐! 어?!”

그 자식은 아마도 체시어….

정답에 거의 근접한 대답에 나는 슬그머니 오스카의 시선을 피했다.

“음, 누구 줄 건 맞는데….”

“거봐, 이씨! 미쳤냐? 그 새끼가 그거 부수면 전쟁터로 날아가게?”

“체시어가 걱정돼서 그런 건 아니구요.”

나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테오 오빠 때문에.”

“뭐?”

오스카는 “테오가 누구….” 하다가 곧 “아, 쌍둥이.” 하고 말했다.

“그, 실은. 원래 테오 오라버니가 이맘때쯤 죽었거든요.”

“…….”

“병은 옛날에 다 고쳐서 걱정할 게 없긴 한데, 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여서요….”

“…….”

“혹시 또 아프기라도 하면 테오 오빠 고쳐줄 수 있는 거 저밖에 없으니까….”

오스카는 우물거리는 나를 한참 말없이 쳐다봤다.

그러다가, 툭.

절대 안 주려고 꽉 쥐고 있던 자기 조개껍질을 내 앞에 던져놓았다.

“우와!”

“짜증 나, 진짜….”

“감사합니다, 스승님! 스승님 최고! 스승님 짱!”

나는 오스카의 목에 매달려서 마구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 애교 부리지 마! 하나도 예뻐! 아니, 아니. 안 예뻐! 책 펴!”

“으항항! 네에에!”

* * *

“아빠는 삼촌이랑 상관, 부하 전에 친구잖아….”

에녹은 턱을 괸 채, 리리스의 말을 떠올리며 새삼스러운 회상에 잠겨 있었다.

* * *

에녹 루빈슈타인, 일곱 살.

여느 능력자들이 그렇듯, 그 또한 능력자 양성소에서 처음으로 작은 사회를 만났다.

이 나라와 아주 꼭 닮은.

“맛있게 먹어!”

“으아아아!”

정말 저게 아홉 살짜리 어린애가 맞을까.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영악한 웃음과 함께, 아이는 친구의 식판 위에 죽은 쥐를 던져놓았다.

아마 리리스는 모르겠지만….

에녹 때의 양성소는 지금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이게 맞나?’

양성소에서는 이 환경에 의문을 품지 말라 가르쳤다.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지만 그럼에도 에녹은 어렴풋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더 큰 사건이 터진다면 아마 못 참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으, 흐아아악!”

식당 한쪽이 소란스러웠다.

쳐다보니, 무심한 얼굴의 남자애 한 명이 친구의 머리 위에 식판을 그대로 들이붓고 있었다.

뜨거운 수프를 맞은 아이는 놀라 푸드덕거렸다.

‘뭐야, 저 녀석은?’

드디어 못 참겠다.

벌떡 일어난 에녹이 식판을 엎은 남자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새카만 머리에, 특이하리만치 짙은 보랏빛 눈동자.

[악시온 슈나이더]

역시, 명찰은 금색이었다.

뭔 짓을 해도 괜찮은, 이 이상한 사회의 최상위 포식자.

“너 뭐야?”

에녹이 다짜고짜 악시온의 멱살을 잡았다.

악시온도 슬쩍, 에녹의 명찰 색을 확인하고는 비웃었다.

“너도 이 쓰레기 친구야?”

“뭐?”

에녹이 뜨거운 수프를 맞고 벌벌 떨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 아이의 명찰도 금색이었다.

괴롭힘당하는 걸 보고 당연히 흰색 명찰, 평민일 줄 알았는데….

‘뭐지?’

의아해하는데, 에녹의 손을 떨친 악시온이―

“또 밥맛 떨어지게 애들 시켜서 저런 짓 하면, 다음에는 네 입에 직접 죽은 쥐새끼 넣을 줄 알아.”

―그렇게 말하고는, 쨍!

들고 있던 식판을 바닥에 위협적으로 내던지며 경고하고 가 버렸다.

그때.

저 멀리 친구의 식판에 죽은 쥐를 넣던 아이는, 이 광경을 보고 사색이 되어 있었다.

에녹은 그제야 깨달았다.

악시온에게 수프를 맞고 덜덜 떨고 있는 이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시켜 벌써 며칠 동안 식당에 쥐 소동을 일으켰던 주모자였다는 걸.

“…….”

뒤늦게 멈칫한 에녹이, 악시온이 사라진 식당 문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게 바로, 둘의 첫 만남이었다.

* * *

‘내가 왜 그랬지.’

책을 펼쳐 뒀지만,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악시온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진짜 유난이다, 유난.’

에녹의 전략은 완벽했다.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그걸 알면서도 명령에 불복하고 상관과 대거리한 행동은 결코 군인답지 못했다.

다시 찾아가서 욱했다는 걸 인정하고 풀어야―

‘아니! 그래도 내가 딴 놈이랑 같아? 친구 부탁 한 번 들어주는 게 그리 어렵나? 열다섯 살에 지휘관이 뭐야? 지도 열여섯에 처음으로 지휘해 봤으면서!’

―겠지만, 서운한 마음과 알량한 자존심이 발목을 잡았다.

“후우.”

똑똑.

그때, 작은 노크 소리.

“들어와.”

집사쯤 되겠거니, 했던 악시온은 문고리를 잡고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며 놀랐다.

“삼촌!”

“너… 여긴 왜 왔어?”

리리스였다.

도도도 달려온 리리스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삼촌이랑 놀려구요!”

“뭐?”

곧 메고 온 곰돌이 가방을 앞으로 돌려 열더니 테이블에 과자며 초콜릿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낡은 양피지 하나를 꺼내 쫙 펼쳤다.

“히히. 이거 전에 할아버지 방에서 그림 구경하다가 찾았어요. 여기, 여기. 삼촌 맞죠?”

“…….”

갑옷 차림을 한, 일곱 명의 소년들이 그려진 초상화.

생채기가 난 얼굴로도 환하게 모여 웃고 있는 소년들의 가운데에는 어린 에녹과 악시온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이거 언제예요?”

“이거… 열여섯 살 때. 정예군으로 처음 토벌 나갔을 때야.”

“그렇구나. 헤헤. 아빠랑 삼촌이랑 하나도 안 변했다.”

멍하니 초상화를 들여다보던 악시온은, 물끄러미 리리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가 갑자기 찾아와 이런 걸 꺼내 놓는 의도는 빤했다.

‘어린애보다 못났네.’

나이 먹고 투닥거리는 아저씨들 화해시켜주려는 리리스의 속내가 보여, 못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리리스.”

“네!”

“너한테는 미안하다.”

“네? 저요?”

“어. 아까는 화가 나서. 너랑 체시어를 비교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

친아들은 아니지만, 그래서 유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체시어가 걱정된다고.

네가 딸 걱정하는 마음이랑 비슷하니까 좀 알아주면 안 될까?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네 딸이었어도 똑같았을까?”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생각해도 못났고….

우연히 그걸 들어버린 리리스가 계속 신경 쓰였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하지만, 리리스는 동그래진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삼촌이 방금 말해서 떠올랐어요.”

“아무튼, 미안. 오해하지 마라. 나도 너… 칼 안 잡아도 되는 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헤헤, 알아요.”

리리스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삼촌 무릎에 앉아도 돼요?”

픽 웃은 악시온이 슬쩍 의자를 뒤로 빼자, 리리스가 잽싸게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괜히 쬐끄만 걸 고생시키네. 너는 걱정하지 마. 출정 전까지는 풀 생각이니까.”

“…….”

“나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근데 그냥 지금 당장은… 속이 좀 시끄러워서.”

“삼촌, 삼촌. 사실 저는요.”

리리스가 악시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빠가 잘못했다구 생각함.”

“뭐?”

“으히히. 그, 삼촌 보러 온 거는, 아빠랑 얼른 화해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아이는 부끄러운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덧붙였다.

“삼촌 속상할까 봐 풀어 주려구요. 삼촌이 왜 그러는지 저는 아니까.”

“…….”

“삼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체시어 받아 주신 것도, 진짜 아들처럼 키워 주시는 것도, 진짜 아들보다 더 사랑하고 걱정해 주시는 것도.”

“…….”

“근데 아빠는 서운하게만 말하고, 체시어도 삼촌 마음 이해 못 하고 그러니까…. 삼촌 속상하겠다, 생각했어요.”

고개를 돌린 리리스가 눈을 맞추며 수줍게 말했다.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저는 삼촌 마음 너무너무 잘 아니까, 삼촌 잘못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삼촌 속상한 거 나았으면 좋겠어요.”

“…….”

멍하니 리리스를 보던 악시온이 이내 후, 긴 한숨과 함께 머뭇거리며 아이를 안아보았다.

“미치겠네, 진짜.”

눈이 살짝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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