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50)화 (151/261)

“헤헤, 삼촌 최고! 삼촌 말이 다 맞음!” 

리리스는 돌아보며 악시온의 목을 끌어안고 위로했다.

“삼촌이 왜 체시어 걱정했는데~! 잘 싸운다고 다 지휘관 하나!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어어, 맞아.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까?”

편들어주는 리리스에, 악시온은 괜히 울컥해졌다.

“전쟁터에서는 말이야. 경험 없는 애들은 당황하면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해. 예상 못 한 상황이 생기면,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안 나거든.”

“맞아, 맞아. 그럴 것 같아요.”

“지휘관은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뭐가 맞는지를 모르겠어. 내 명령에 수십 수백 목숨이 달렸는데, 선택을 잘못하면 어쩌지? 그런데 시간 끌면 안 돼. 5분 안에 최선의 판단을 해서 명령해야 한다니까?”

“근데 삼촌, 경험담이에요?”

어째 길어지는 말을 듣다가, 리리스가 예리하게 물었다.

악시온이 흠칫했다.

“…사실, 맞아. 경험담이야.”

“어쩐지~”

“어린 지휘관은 그래서, 걱정이 좀 많아. 전선을 이탈할 때도 있고.”

악시온은 테이블 위에 놓인 전우들과의 초상화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잠깐만! 에녹, 이 새끼. 웃긴다, 진짜?”

“네? 아빠가 왜요?”

“이때!”

악시온이 초상화를 가리켰다.

“네 아버지 지휘관 맡은 주제에 전선 이탈한 거 알아?”

“헉?!”

그랬었지.

악시온은 새삼스레 떠오른 기억에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 *

악시온 슈나이더, 열여섯 살.

슈나이더 후작가의 삼남이자 도스 계급의 성기사.

그 또한 소년병 시절부터 전례 없는 능력치를 자랑했었다.

아마 에녹 루빈슈타인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이 없었다면, 단장직은 그의 것이었을 터.

하지만, 서임을 받자마자 단장을 꿰찬 전우에게 불만은 없었다.

에녹은 모두가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길 능력자니까.

“지, 지휘관님…. 며, 명령을….”

정예군으로서 첫 출정이었다.

대규모 토벌이었고, 사령관은 당시 마검사단장.

처음부터 지휘관이라는 중책을 맡은 악시온의 머릿속은 새하얬다.

“그래…. 며, 명령….”

처음임을 감안해, 가장 토벌이 쉬운 구역의 지휘를 맡았다.

무리 없이 토벌을 마쳤을 거다.

이런 돌발 상황만 아니었다면.

“다, 다 잡아야….”

“지휘관님! 빨리요!”

눈앞에서 수백 개의 알이 쩌적, 쩌적 갈라지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이 구역에 마수의 산란장이 있을 줄은.

비행형 마수는 부화하자마자 성체.

어린 마수라고 약한 것도 아니었으니, 악시온은 지금 백 명도 안 되는 군대로 수백 마리의 마수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우들의 얼굴은 새파랬다. 이미 죽음을 예감한 표정.

“…퇴각해.”

“예?”

“다 부화하기 전에! 빨리 퇴각해! 최대한 빨리! 죽을힘으로 도망쳐서, 사령관님께 알려!”

“지, 지휘관님은….”

“여긴 내가 맡을게. 빨리!”

지휘관은 도망쳐선 안 된다.

다 같이 죽거나, 또는 혼자 죽거나.

승리하지 못했다면, 그 전장에는 꼭 지휘관의 시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많은 이의 목숨을 손에 쥐고 지휘하는 자의 숙명이니까.

“부,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전우들은 퇴각했다.

악시온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았지만….

명령이었으니까.

“하아.”

홀로 남은 악시온은 흐릿해지는 시야를 붙잡으려 눈을 부릅떴다.

당연히 살아남을 수 없다.

벌써 몇몇은 알을 깨고 나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많은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악시온. 우리 앞으로도 쭉, 같이 살아남자.”

에녹뿐 아닐까.

열네 살에 엘레바도(Elevado)라는 검술을 만들며, 소드마스터라 불리기 시작한 제 전우 말이다.

하지만 에녹은, 지금 다른 구역의 지휘관이었다.

“미안한데. 약속, 못 지키겠다….”

같이 살아남기로 했는데.

‘드디어 정예군이 됐다고 좋아하자마자 죽네. 내 운명 한 번, 참.’

악시온은 힘겹게 검을 들었다.

“으아아아!”

찔끔 나온 눈물을 훔치며, 마수 무리를 향해 달려가던 그때.

사아아악―!

한 줄기 바람과 함께, 푸른색의 검기가 시야를 갈랐다.

갓 태어난 마수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부화하지 못한 알들이 전부 터져 나갔고, 막 날아오른 마수들까지 픽픽 추락했다.

엘레바도.

악시온이 아는 한, 단 한 명만 쓸 줄 아는 검술.

“아….”

악시온은 멍하니 멈춰 서서, 순식간에 죽어가는 마수들을 바라봤다.

“악시온!”

이내 경사진 협곡 벽을 급하게 타고 내려온 에녹이 달려왔다.

“하아, 하아.”

“…….”

그는 몸을 숙인 채, 턱에 고인 땀을 훔치며 한참 숨을 고르다가 번쩍 고개를 들고 물었다.

“괜찮냐?”

“너, 너… 뭐냐? 지금 네 군대를, 버리고 온 거야?”

지휘관의 전선 이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제 전우는 저질러 버렸지만.

“내 쪽은 다 정리했어. 마수 산란장이 있더라고. 혹시나 너 있는 쪽도 같을까 봐.”

“아니, 그렇다고 거기서 여기까지 달려와? 너 이제 돌아가면 빼도 박도 못하고 문책이야!”

“그게 뭐 무섭냐?”

에녹은 웃으며 악시온의 어깨에 척, 팔을 두르고 말했다.

“친구 죽는 게 더 무섭지.”

* * *

“그때 네 아버지 아니었으면 나 여기 없었지.”

“와, 진짜 멋있다. 아니, 아빠는 왜 이런 재밌는 얘기 안 해 주지?”

“이게 재밌어? 살벌한 전쟁터 얘기 해 봤자 무섭기나 하고 재미없으니까 안 해 줬겠지.”

“아닌데? 완전 재밌어요!”

악시온이 큭큭 웃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리리스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때, 똑똑.

머뭇거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이번에는 누군가 했는데.

“엇, 체시어!”

아들이다.

체시어는 악시온의 무릎에 앉은 리리스를 보고 놀랐다가, 이내 다가왔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어어.”

지금 얼굴 보기 좀 민망한데.

아들 능력도 못 믿는지, 유난 떠는 양아버지에게 한마디 하러 온 걸까?

악시온은 괜히 긴장했다.

“나 나가 있을까?”

“…아니. 괜찮아.”

눈치 보던 리리스의 말에 고개를 젓고, 체시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뭐?”

생각도 못 했던 말에 악시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뭐가?”

“아까 아버지 편 안 들고, 사령관님 계획에 동의했던 거요.”

악시온이 입을 떡 벌렸다.

“그건 뭔 소리냐. 사령관 명령에 복종하는 게 기사단 철칙이야. 나야 에녹이랑 친구라고 뻗대본 거지, 너는 그러면 안 돼.”

“그래도,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아니까요.”

“…….”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못 미더워서 그러신 게 아닌 것도 알아요. 저는 아직… 사령관님이나 아버지에 비하면 경험이 많이 부족하니까요.”

말하던 체시어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춰 왔다.

“하지만, 아버지. 정말 잘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시는 일 없게, 해낼 테니까 한 번만 믿어 주세요.”

붉은 눈이 강인하게 번뜩였다.

악시온은 의지 만만한 그 눈빛을 한참 보다, 슬쩍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그래, 알았다. 믿는다. 벌써 다 컸구만.”

듣고 있던 리리스가 와하하 웃었다.

“삼촌, 방금 아들 다 키운 중년 아저씨 말투 같았어요!”

“하아, 아저씨 맞지, 뭐.”

리리스의 머리를 헝클며 한탄하는 악시온에, 체시어도 설핏 웃음을 터뜨렸다.

* * *

두근두근.

내 심장이 다 뛴다.

“왜 왔냐.”

“할 말 있어서.”

대차게 싸운 바로 다음 날.

마주 보고 있는 두 남자, 아빠와 악시온.

아빠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해.”

“네가 먼저 말해.”

그러자 악시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받아쳤다.

“내가 무슨 말을 해. 네가 할 말 있어서 왔다며.”

“그러는 너도 우리 집 왔었잖아. 왜 왔었는데?”

“…….”

아빠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랬다.

화해하러 가려는지 눈 밑이 퀭한 얼굴로 꼭두새벽부터―

“공주야, 같이 가 줄래?”

―하고 나를 깨웠던 아빠와 함께, 악시온의 집에 갔었는데.

“엥. 주인님은 도련님이랑 같이 10분쯤 전에 나가셨는데요. 공작님 보러 간다고 하셨는데 길이 엇갈렸나 봐요?”

악시온네 집사, 카론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더라.

결국은, 각자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힘들게야 만들어진 자리였다.

‘빠, 빨리 아무나 말해!’

화해하려고 아침부터 서로 집에 찾아간 게 분명한데.

둘은 서로 노려보며 침묵만 할 뿐이었다.

“저기, 리리스.”

그때, 옆에 있던 체시어가 내 귀에 속삭였다.

“…우린 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누가 듣고 있으면, 말하기 힘드니까.”

“앗, 그런가?”

눈치가 없었나.

나는 허둥거리며 일어났다.

“아빠, 나 체시어랑 나가 있을까?”

그러자.

“아냐, 공주야. 여기 있어. 괜찮아.”

“어어, 나가 있어라!”

아빠와 악시온이 동시에 말하고는 서로를 쳐다봤다.

“뭐, 길게 얘기할 거 아닌데. 금방 말할게.”

“…그럼 그러든가.”

내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자, 오랜 침묵을 깨고 드디어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용병 스물, 더 고용했다. 체시어 쪽에 보낼게. 그리고 내 밑의 정예군 열 명 데리고 네가 북쪽 맡아. 내가 동쪽 밀고 난 뒤에 최대한 빨리 애 쪽으로 합류할 테니까.”

악시온의 걱정을 아는지, 아빠는 계획을 다시 짠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해한 것 같아서 말한다. 체시어가 남의 집 아들이라 별 고민 없이 전장에 밀어 넣고, 지휘관으로 세우고 그런 거 아냐.”

“…….”

“4년 동안 가르치면서 체시어도 내 아들 같아졌다. 네가 걱정하는 만큼 나도 애 걱정하고 있고, 아끼고 있어.”

아빠는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걱정 안 했으면 애초에 너한테 부탁하지도 않았을 거야. 너는 내가 제일 믿는 놈이니까…. 그래서 체시어를 맡겼던 거고.”

“…….”

“솔직히 말도 안 되는 부탁 들어주고, 진심으로 애를 보살펴 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너나 나나 피차 이런 거 일일이 표현 안 하니 말은 안 했지만….”

아빠는 말을 끝마치고 덧붙였다.

“고마워. 고맙고 미, 미….”

미안하다는 말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서툴러 보이는 아빠 모습이 신기해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미안하다.”

악시온의 표정을 보니, 앙금은 이미 다 풀린 듯했다.

“그래, 나도….”

그는 아빠보다는 조금 더 부끄러워했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을 시작했다.

“네가 사령관으로서 최선을 말한 거 아는데, 괜히 내 감정에 치우쳐서 분위기 망쳤어.”

“…….”

“애 능력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싸고돈다고…. 못 믿는다는 생각 들게 해서, 애한테도 못 할 짓 한 것 같고.”

“…….”

“또. 그래도 네가 상관인데, 기강 없어 보이게 자꾸 삐딱하게 군 것도 후회 중이다.”

말을 마친 악시온이 눈을 들었다.

“어쨌든 먼저 말해 줘서 고맙고, 나도 미….”

마지막, 미안해를 남겨두고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다음으로는 체시어에게.

옆에 우리가 듣고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일까?

악시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삼촌 귀여워….’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두 손을 들어 파이팅! 포즈를 해 보였다.

마지막 한 마디를 끝내고, 둘이 사나이들의 뜨거운 포옹까지 하면 완벽!

“미, 미….”

나는, 나를 보고 있는 악시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삼촌.

“미, 미….”

미안해!

“미, 미친놈아! 니가 먼저 잘못했잖아!!!”

“뭐?!”

으아아악! 안 돼!

못 살아,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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