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빠의 출정 당일.
나는 이른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빠, 대체 뭐 해….”
갑옷 풀 착장을 완료한 아빠가, 얼른 출발할 생각은 않고 내 가방을 싸느라 분주했기 때문이다.
인형, 도화지, 색연필, 칫솔….
‘칫솔?’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보니, 저쪽에 큰 짐가방까지 싸 뒀다. 아마 내 옷일 거다.
“고모 집 가?”
아빠는 날 혼자 두는 걸 병적으로 불안해했다.
그래서 이틀 이상 집을 비울 때면 나를 꼭 다른 곳에 맡기는데….
고모부가 제도에 있을 땐 고모네에 제일 많이 가는 편이고, 악시온 집에도 자주 가 봤다.
“고모부는 엊그제 딴 데로 출정했다지 않았어?”
항상 아빠가 믿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들에게 맡겨졌는데, 이번엔 마땅한 곳이 없어서 그냥 집에 있기로 했었다.
“응, 고모네 아니고.”
“그럼 어디? 나 그냥 할아버지랑 있을게. 집에 사병 아저씨들도 많이 있는데…. 걱정 좀 그만해.”
“그러려고 했는데.”
아빠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제 꿈자리가 너무 사납더라고.”
“뭔 꿈 꿨는데?”
“그냥, 좀 별로였어.”
아빠는 다 싼 가방을 내 옆구리에 메 준 다음, 방바닥에 깔린 러그를 휙 들쳤다.
“……?”
이건 언제 그린 거지? 바닥에는 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빠, 이거 스승님한테 배웠어?”
“응, 옛날에. 공주야, 할아버지한테는 말해 놨으니까 걱정 말고. 아빠 이번에는 적어도 일주일은 더 걸리니까….”
“일주일? 그, 그럼 나 일주일이나 어디 가 있으라는 건데?”
나는 마법진에 좌표 넣는 부분을 재빨리 살펴봤다.
봐도 모르겠다. 어디지?
“아빠가 너무 갑자기 이렇게 해서 미안해.”
“아니, 그니까 어디 가냐구!”
내가 가기 싫다고 할까 봐 아빠는 목적지를 말도 안 해 줬다.
“아빠아아! 싫어어어!”
도망치려는 나를 확 낚아챈 아빠가 마법진에 올라가 마나를 들이부었다.
시퍼런 빛이 따가워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어디야!’
발 디딜 틈도 없이 책과 종이들로 그득한 바닥.
빛 한 점 못 들어오게 커튼을 꼭꼭 쳐놓은 어두운 방.
“……?”
주홍색의 탁상 불빛 하나만 아른거리는 쪽을 보니.
“…뭐, 뭐야.”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오스카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와, 이거 실화야?
아빠는 버둥거리는 나를 고쳐 안고, 소심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마탑주, 갑자기 미안한데…. 정말 염치없는 부탁인 거 알지만, 혹시 애 좀, 봐줄 수 있을까…?”
“뭐요?”
“아, 아빠! 이건 아니야!”
오스카의 손에 들려있던 펜이 툭, 떨어져서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미, 미친 인간….”
* * *
마탑의 최상층.
들어오자마자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 내가 보모야? 어? 보모냐고!”
멀리 주방에서, 오스카가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목 늘어난 셔츠와 반바지 차림.
암만 봐도 이 럭셔리한 복층 펜트하우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집을 둘러보았다.
‘여기, 대체 뭐야?’
제도에서 제일 높은 건물, 마탑.
그 마탑에서도 최고층인 오스카의 집은, 통유리가 달려있어 제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뿐인가?
눈부신 대리석 바닥의 복층 구조!
‘와, 한 200평은 되나? 넓긴 또 뭐 이렇게 넓어?’
세련된 디자인의 나선형 계단….
거실 중앙의 최고급 소파….
한쪽 벽면을 채운 높은 책장….
모든 가구는 세련된 블랙 앤 화이트로 깔 맞춤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시대를 한참은 앞서간 현대식 펜트하우스!
21세기 지구별의 느낌이 나서, 꼭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주방 쪽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 앞을 서성거리며 오스카가 계속 투덜거렸다.
“다짜고짜 애를 봐 달라니, 미친 거 아냐? 아니, 적어도 하루 전에 말을 하든가!”
“죄송합니다, 스승님….”
“네가 왜 죄송해! 네 아빠가 죄송해야지!”
오스카는 계속 구시렁거렸다.
“아오, 씨. 집에 먹을 것도 없고 애 놀 것도 없고 뭐 아무것도 없는데! 으아아악!”
나는 쭈뼛쭈뼛 거실로 가서, 소파 앞에 깔린 흰색 러그 위에 앉았다.
거실에서 다른 시야로 보니 집은 두 배로 웅장했다.
“스승님 집 있는 줄 몰랐어요….”
“뭐? 집이 없으면 어디서 살아?”
“아니, 저는 아까 본 거기요. 그 침대 있고 책상 있고 막…. 거기가 스승님 방인 줄 알았어요.”
자각몽을 꿨을 때도, 나는 거기서 오스카와 머물렀었다.
“거의 거기서 지내긴 해. 씻고, 먹고, 자고 다 할 수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하기 귀찮거든.”
“그렇구나. 스승님,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뭐.”
오스카는 자꾸 주방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며 대답했다.
“스승님 연봉 얼마예요…?”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던 오스카는 곧,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깨닫고 큭큭 웃었다.
“듣고 싶냐? 알면 니네 아빠 엄청 가난해 보일 텐데~?”
“네에. 그냥 안 들을래요.”
계속 킬킬거리던 오스카가 작은 트레이를 들고 와서, 내 앞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놨다.
초콜릿이 콕콕 박힌 쿠키와 따뜻하게 데운 우유.
“앗. 저 아침 먹구 왔는데….”
“먹고 나면 간식 아냐?”
“…맞아요. 감사합니다.”
육아 만렙이군.
오늘은 간식 걸러야 하나 했는데.
잽싸게 쿠키 하나를 집어 먹는 내 옆에, 오스카가 털썩 앉았다.
소파에 등을 기댄 그가 피곤한 듯 고개를 젖히고는 또 “미친 인간….” 하고 중얼거렸다.
아빠 귀 간지럽겠다.
“근데 스승님 출근 안 해요?”
“뭔 소리야. 너 봐 달라고 했는데 출근을 어떻게 해.”
“저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스승님 가도 돼요.”
“뭐래. 됐어.”
“…안 가시게요? 그럼 무단결근 아니에요? 설마 저 봐 주시는 일주일 동안 계속 안 나가시려구요?”
“내가 마탑준데 출근하든 말든 누가 뭐라 해!”
그건 맞지. 그래도 조금 양심에 찔렸다.
결근까지 하며 날 봐 주다니….
“하, 씨. 뭘 해야 하지? 책 읽냐?”
난데없이 일주일 보모가 되어버린 오스카는 걱정이 많아 보였다.
“설마 저기 스승님 책장에 있는 책이요?”
나는 딱 봐도 어려워 보이는 책만 가득 꽂힌 그의 책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재미없어 보여요. 저는 그냥 그림 그리구 놀면 돼요.”
나는 가방에서 도화지랑 색연필을 꺼냈다. 뒤적거리다 보니 오스카가 준 조개껍질 마도구도 보였다.
‘맞다! 이거 계속 보고 있어야지. 깜빡할 뻔.’
테이블 위에 조개껍질을 올려놓자, 그걸 본 오스카가 인상을 썼다.
“야.”
“네.”
“너 그거, 그 자식 줬지?”
이번에도 그 자식은 체시어….
“네에.”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니, 아니! 들어보세요! 체시어 위험할 때 쓰라고 준 거 아니에요! 테오 오빠 때문이라니까요? 이번에 둘이 같이 토벌 나갔으니까!”
“그거 깨지면? 전쟁터 한복판으로 가시게?”
“에이, 안 깨질걸요. 제가 엄청, 엄청, 엄청 위험한 상황에만 쓰라고 했고 체시어는 제가 간다고 하니까 절대, 절대, 절대 깰 일 없을 거라고 했거든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꼭 필요한 일이 생길 때가 오면, 체시어는 마도구를 깰 거다.
테오 말고 체시어에게 준 건, 그가 프리메라인 내 정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허공에서 뿅 나타나서 능력 써도 괜찮을 환경에서 깨 주겠지?’
체시어는 똑똑하니까.
‘안 깨지는 게 제일 좋겠지만.’
만약 이게 깨진다면 정말 최악의 상황일 거다.
프리메라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위기 말이다.
“하, 진짜 맘에 안 들어.”
오스카는 구시렁거렸지만, 자기도 체시어가 이걸 깰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지 더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책을 한 권 가져와서 읽기 시작했고, 나는 그림을 그렸다.
오스카는 간간이 이것저것 물었다.
언제 씻으면 돼?
몇 시에 자?
칫솔 가져왔어?
등등….
그렇게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렀다.
“하아, 점심은 또 뭘 먹냐. 집에 아무것도 없는데. 나가서 먹을래?”
“와, 좋아요! 고기!”
“그놈의 고기는.”
오스카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나 옷 갈아입고 나올….”
그때.
뽀각,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있던 조개껍질 마도구가 두 동강 났다.
“아.”
오스카가 놀라 돌아봤고,
순간 내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야.”
“스, 스승님.”
오스카는 사색이 되어 달려들더니 내 팔부터 꽉 붙잡았다.
“자, 잠깐만. 아무것도 하지 마. 지금, 지금 그 자식 전쟁터 한복판이잖아.”
뭐라 하는 오스카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귓가에는 삐―하는 이명과 함께 수만 가지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그 체시어가, 마도구를 깼다.
최악의 상황.
내가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 줘야 할 만큼….
급박하다는 뜻.
“스승님….”
“아니, 기다려. 정신 차려. 나 좀 봐 봐.”
오스카는 깨진 마도구에 정신 팔린 내 뺨을 붙잡고 억지로 눈을 맞췄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네가 지금 거기 갔다간….”
“가, 가야 해요.”
틀림없이 1분, 아니, 1초 만에도 누군가의 생사가 갈릴 상황일 거다.
“야!!!”
오스카가 핏발 선 눈으로 벌벌 떨며 소리쳤지만, 나에게는 고민할 틈이 없었고.
‘체시어한테.’
2hours
오른손의 팔찌가 빛났다.
* * *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아이.
작은 몸을 놓쳐버린 팔이 허공을 더듬었다.
“…….”
시간이 멈춘 듯.
오스카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
리리스가 수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체시어가 아이를 불러야 했을 만큼 위험한 상황.
프리메라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그런 상황.
“아, 아….”
평생 펜만 쥔 머릿속에는 본 적도 없는 전쟁터의 아비규환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흉측한 마수들….
잔인하게 찢긴 인간들의 시체….
그리고.
그 사이의, 리리스.
상상은 언제나 그렇듯, 현실보다 훨씬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하아, 하. 으아….”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이 엄습했다.
그는 거칠게 목깃을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