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리리스는 마법처럼 나타났다.
“체시어!”
체시어는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상황을 설명해야 했지만, 사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 오빠?”
놀란 리리스는 심각한 부상을 당한 채 정신을 잃은 테오를 곧바로 발견했고, 달려왔다.
초조한 표정으로 곁에 앉아, 급히 오른쪽 손목을 들어 살핀다.
항상 차고 다니는 팔찌.
체시어는 리리스가 능력을 쓸 때면 항상 저 팔찌를 확인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
이내 마수의 발톱에 헤집혔던, 피로 범벅된 테오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지만, 눈에 띄게 평온해진 안색.
“…….”
체시어는 안도했다.
그리고 곧, 리리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능력을 쓰는 순간 보았기 때문이다.
아주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달라진 얼굴.
그리고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길어진 머리카락.
‘자랐어….’
체시어의 손이 떨렸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먹먹하고 복잡한 심경.
그는, 큰 생명력을 태우는 프리메라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느낀 것이 처음이었다.
자책감이 괴로우리만치 목을 조여왔다.
* * *
테오는 치명상이었다.
나는 어차피 쓸 능력을 항상 치유 쪽에 투자해 왔었기에, 내상 병자들의 경중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현대 의술이 있다면 고칠 수 있는 수준의 내상 병자는 몇 초면 충분.
1year
하지만, 죽음을 앞둔 이들은 거의 1년을 태워야 했다.
‘다행이야. 이거 나 없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부상이었어.’
평온해진 테오의 안색에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체시어?”
그때,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멍하니 내게 손을 뻗은 체시어가 보였다.
그는 왜인지 내 머리를 건드리려 하다, 이내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지? 아.’
길어버린 앞머리 때문에 시야가 살짝 답답했다.
1년을 태웠으면 6개월을 한 번에 자란 셈이니, 찰나의 변화가 체시어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을 거다.
나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기, 고마워.”
“…미안해.”
그러나, 동시에 체시어의 입에서 말이 나와 목소리가 섞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미안해?”
“뭐가 고마워?”
우린 또 동시에 말했다.
체시어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나는, 나 불러 줘서 고맙지…. 솔직히 좀 걱정했거든. 네가 정말 나 안 부를까 봐.”
자기 목숨이 아니라 테오나 다른 이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체시어가 날 안 부르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있었다.
왜냐면, 원작에서도 체시어는 자기 진심과 달리 냉정해질 수 있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응?”
체시어는 고개를 돌린 채, 괴로운 듯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잘못 판단했거든. 내 실수 때문에 형이 이렇게 됐어.”
“…….”
“널 위험에 안 빠트리겠다고 말해 놓고, 부를 일 없을 거라고 화까지 내 놓고…. 형이 죽을 것 같으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났어. 너밖에.”
“체시어….”
“네가 여기 오면 위험할 거 아는데, 이렇게 네 생명 태워 가면서 능력 써야 하는 것도 아는데, 다 아는데도….”
“…….”
“미안해. 내가 멍청하고 못나서야. 내가 바보 같아서.”
“체시어, 나 봐 봐.”
나는 내 시선을 피하는 체시어의 뺨을 붙잡아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에 순간 스치는 감정들.
놀람, 절망, 안도, 자책….
그가 다친 테오를 보고, 또 이곳까지 데려오며 얼마나 두렵고 초조했을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실수할 수도 있어. 테오 오빠가 왜 이렇게 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쟁터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잖아.”
“…….”
“그게 네 잘못은 아니야. 같이 싸우는 사람들 다 안 다치게 하고, 살릴 수 있으면? 네가 신이게?”
“…….”
“그게 됐으면…. 우리 아빠도 죽은 친구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을걸.”
나는 갑자기 울컥해졌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칼을 잡아야 하는 그가, 앞으로 아빠처럼 겪어야 할 수많은 이별 때문에.
그로 인해 자책하고 괴로워할 게 뻔히 보여서.
“그때마다 네 탓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 거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리고 어쨌든, 테오 오빠는 무사하잖아?”
“…응.”
울음을 참는지 악문 체시어의 턱이 흔들렸다.
나는 그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나는 네가 이런 일로 자책하지 않으면 좋겠어….”
“…….”
떨리는 체시어의 팔이 올라와 나를 마주 안았고, 우리는 그렇게 잠시 서로를 위로했다.
“아, 잠깐! 이럴 때가 아니다!”
내 정신 좀 봐.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에!
“체시어, 체시어! 테오 오빠 이만큼이나 다쳤던 거, 사람들 다 알아?”
“…응, 다 알아.”
체시어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치유 마법 걸어줄 성법사가 먼저 형이 다친 걸 발견했어. 그 사람이 가망이 없다고 알려 줘서….”
“으으, 그랬구나.”
최악 중의 최악인 상황이다.
테오의 부상을, 그것도 현존하는 치유 마법으로 고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까지 다 안다니.
그런 테오가 멀쩡히 나았으니, 전부 의문을 표할 터.
‘이를 어쩌지.’
나는 고민하다가,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일단 테오 오빠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어.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니까, 테오 오빤 내가 데리고 같이 돌아갈게.”
“네가?”
“응. 죽어야 했을 사람이 멀쩡히 나아서 전쟁터에 돌아갈 순 없잖아.”
체시어는 걱정했지만, 이내 내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테오에게 다가갔다.
“이런저런 상황은 아빠한테만 다 말해 줘. 아빠가 어떻게든 수습해 줄 테니까.”
“응.”
정신을 잃은 테오의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하는데, 번뜩이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그리구, 체시어.”
테오의 상태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그를 여기서 제도까지 어떻게 보낼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미리 입을 맞춰 놔야 했다.
‘이동 마법식은 숨기자. 이 유용한 마법을 혼자 알고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스승님 욕 엄청 먹을 테니까.’
나는 체시어에게 부탁했다.
“있지, 돌아오기 전에 아빠한테 이쪽 신전 좀 매수해 달라고 해 주라.”
“신전?”
“응. 신전에 워프 게이트 있잖아. 네가 오빠를 뿅 제도로 보냈다고 할 순 없으니까. 마탑에도 워프 게이트가 있으니까 그쪽에 열었다고 하면 될 것 같아.”
“알겠어.”
“나는 그럼 얼른 가 볼게.”
테오의 머리를 무릎에 누인 채, 나는 오스카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팔찌를 봤다.
10hours
‘……? 동반 순간이동 가성비 무슨 일이야?’
혼자 이동할 땐 2시간이더니.
인간적으로 한 명 추가니까 4시간으로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크흡.”
나는 억울함을 삼키고 체시어를 보았다.
“체시어.”
그는 어느새 일어나 허리에 검을 바로 꽂고, 전장으로 돌아갈 채비 중이었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해.”
내 인사에, 체시어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그럴게.”
* * *
“아….”
테오를 데리고 오스카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달라진 풍경에 놀랐다.
깔끔했던 거실 한가운데 펼쳐진 큰 종이.
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빨간 펜으로 어지럽게 표시해 둔 제국 지도까지….
‘설마 날 따라오려고 했던 거야?’
남부라는 사실만 알 뿐, 정확한 좌표를 모르는 오스카가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었다.
‘안 돼! 벌써 간 건 아니겠지? 어디 있지?’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마탑주가 전쟁터 한복판에 뿅, 하고 나타나는 건 테오가 멀쩡히 나은 것만큼이나 황당할 일이다.
남 일엔 관심도 없이 마탑에 틀어박혀 사는 오스카의 행보라기에도 너무 의심스럽고….
진짜 안 돼.
나야 체시어와 미리 입을 맞춰 둬서 몰래 갔다 올 수 있었지만, 오스카는 정말 안 된다.
“스, 스승니임!”
벌써 가 버렸나.
애타게 오스카를 불러 보는데, 그가 급한 걸음으로 방에서 겉옷을 걸치며 나오다 우뚝 멈춰 섰다.
“와, 다행….”
나는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서는, 나를 빤히 응시하는 오스카.
그는 이내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가슴에 올린 채, 왜인지 막혀 있던 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
꼭 고통이 가시는 듯, 굳어있던 얼굴이 점차 풀려 갔다.
“…….”
곧 천천히 다가온 오스카가 내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
“스, 스승님?”
그리고는 나를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쿵, 쿵, 쿵, 쿵.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심장이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올 듯 거세게 뛰고 있었다.
“너, 이….”
“…….”
“진짜, 혼날래…?”
목소리도, 나를 안은 팔도.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걱정시켰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너무 미안해져서 오스카의 품을 파고들었다.
“죄송해요….”
“…….”
걱정시킨 것도 모자라 사고까지 치고 왔는데.
“정말 죄송해요, 스승님.”
매는 빨리 맞는 게 나으니까.
나는 냉큼 말했다.
“그런데 저 엄청난 일까지 벌이구 왔어요….”
나를 품에서 떼어낸 그가, 데려온 테오를 물끄러미 살폈다.
“하.”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난데없이 테오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충분히 당황스러울 일이었다.
“……?”
오스카는 대뜸 내 뺨을 꽉 꼬집어 잡아당겼다.
“으앙아악!”
“못 살아, 내가! 못 살아!”
“아하여! 아하! 으앙아!”
다행히 금방 놔줬다.
아릿한 뺨을 쓱쓱 쓰다듬는데, 곧 긴장이 풀린 오스카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됐어.”
“네?”
“무사하면 됐다고.”
“…….”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는 말투에서 묻어나는 걱정, 그리고 애정.
나는 울컥해져서, 오스카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또 냉큼 안겼다.
“못생긴 게, 진짜….”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나를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