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튿날.
장을 보러 나왔다.
‘이 조합 뭐지?’
오스카, 나, 그리고 테오까지.
분주하게 장을 보러 다니는 귀족 집 하인들이 곳곳에 보였다.
“원래 스승님이 직접 음식 재료 사러 다녀요?”
나는 장바구니를 든 모습이 무척 익숙해 보이는 오스카에게 물었다.
“어. 내가 먹을 건데, 나 아니면 누가 사?”
“아무나 시킬 줄 알았어요….”
상상도 못 했던 마탑주의 친근한 펜트하우스 자취 라이프!
“이상하다. 그럼 꽤 자주 나오는 건데 왜 스승님은 마탑에만 박혀 있는 이미지지?”
의아해하는데, 내 옆에서 걷고 있던 테오가 물끄러미 오스카를 보며 말했다.
“아무도 못 알아볼 것 같지 않아, 리리스?”
“아!”
그랬다.
목 늘어난 셔츠에 반바지 차림.
장바구니를 덜렁덜렁 든 시종 같은 차림새의 남자가 무려 마탑주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 하겠지.
“너는 점심 먹고 집에 가라. 입 하나 늘어나는 거 끔찍하니까.”
오스카는 과일 가게에서 사과를 한 묶음 사며 테오에게 말했다.
‘앗! 마법 만드는 거 성공할 각이 보였나 보네?’
혹시 몰라 예후를 핑계로 테오의 발을 묶어 뒀던 오스카다.
자기도 손을 대 본 적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이라, 어제 곧바로 성공을 장담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예, 알겠습니다!”
바짝 군기가 들어 대답하는 테오.
“실례가 많았습니다!”
“오냐.”
테오는 죽을 정도의 부상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하는지….
어제오늘 오스카에게 감사 인사를 500번은 더 했다.
“그럼 제가 갈 때, 리리스도 같이 데려갈게요.”
“뭐?”
오스카가 테오를 노려봤다.
“너 혼자 가!”
“네?”
테오는 눈을 껌뻑거리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됐다.
“그, 그건 좀….”
그리고는 경계하는 분위기로 나와 오스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와, 씨. 내가 얘 잡아먹냐? 대가리로 뭔 생각 하고 있는지 얼굴에 다 보이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보니까 하인도 따로 안 두고 혼자 지내시던데 리리스 돌보기 힘드실까 봐요.”
“포장하는 거 봐라? 나 이상하게 본 거 다 느꼈거든? 이 배은망덕한 놈이 생명의 은인한테?!”
테오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내심 걱정하는 듯했다.
당연했다.
그는 오스카의 얼굴을 본 적도 몇 번 없을 뿐더러….
‘아빠랑 오스카가 지난 4년 동안 얼마나 친해졌는지도 잘 모르니까.’
고개를 끄덕이는데, 오스카가 발끈했는지 계속 쏘아붙였다.
“네가 데려가면, 뭐! 도스씩이나 되는 놈이 마수 한 마리 못 잡아서 다 뒤져서 기어와 놓고, 안전하게 애 지킬 수 있어?”
“아….”
테오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검기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큰 걱정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항상 주변에 민폐 끼친다는 자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진짜, 스승님 바보!’
나는 오스카의 허리를 쿡 찔러서 눈치 줬다.
자기도 좀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시무룩해진 테오의 표정을 보고 크흠, 헛기침한 오스카가 툴툴거렸다.
“걱정하지 말라고. 얘 아버지가 출정 전에 직접 나한테 맡긴 거니까.”
“네? 정말요? 삼촌이?”
테오가 놀라서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 그랬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야, 이거 받아.”
테오가 사과하는데 오스카가 품 안에서 뭔가 꺼내 불쑥 건넸다.
‘뭐지?’
얼핏 봐도 내 팔찌랑 똑같았다.
보라색 하트 모양 수정이 달린, 어린이들에게나 어울릴 그런 팔찌….
‘엥. 근데 저거 마수의 핵 아냐?’
자세히 보니 수정이 아니고 하트 모양으로 세공된 마수의 핵이었다.
“코어랑 감응하는 마도구야. 그거 차고 있을 땐 마기밖에 안 나가니까, 조절하는 데 도움 되겠지.”
“아?”
“……?”
나와 테오는 동시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스승님? 근데 이런 게 있었으면….”
…지금까지 테오의 개고생은?
물으려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오스카가 불만스럽게 나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뭐, 뭐!”
“아아니, 저는 그냥. 조금 안타까워서 그렇죠….”
“야, 남의 집 아들 사정을 내가 일일이 신경 쓰고 있겠냐? 그냥 이번 일로, 필요성을 느껴서 만든 거야.”
테오가 죽을 뻔했고 그래서 내가 무모하게 전쟁터까지 갔다 왔으니까.
그 말은 못 하고 노려보기만 하는 오스카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아니, 이거. 아….”
테오는 팔찌를 받고 적잖이 감동한 눈치였다.
그는 이내 시장 거리 한복판에서 오스카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큰 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잘 쓰겠습니다!”
“……?”
“야, 이 미, 미친놈아! 너 미쳤어? 시끄러!”
웅성웅성.
뭐야, 방금 들었어?
웅성웅성.
마탑주라는데?
몇몇이 귀를 의심하며 조잘거렸다.
“헉!”
아차 싶었는지 테오가 놀랐고, 나는 경악하며 뺨을 쥐어뜯었다.
두리번거리던 오스카는 장바구니로 얼굴을 가린 채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같이 가요, 스승님!”
“저, 저도 같이 가시죠! 바구니, 그거 제가 들겠습니다!”
우리는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는 오스카의 뒤에 잽싸게 따라붙었다.
* * *
늦은 저녁.
테오는 점심을 먹고 집에 갔고, 나는 오스카와 함께 아빠가 싸 준 짐 가방에서 잠옷을 찾는 중이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옷을 못 갈아입고 잤지만….
“이거예요, 잠옷!”
전에 아빠와 커플로 산, 구름이 그려진 하늘색 잠옷.
첫 개시였다.
“엥? 왜 아빠 것도 있지?”
가방 안에는 아빠 잠옷도 있었다.
이상해서 빼 보니, 잠옷 사이에서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마탑주, 이건 내 선물.
공주 잘 부탁해.]
“풉.”
새 옷이라 오스카에게 선물하려는 모양이었다.
일주일 보모 값을 고작 잠옷 한 벌로 퉁치려 하다니….
제임스 브라운 씨의 양심이란.
“하, 어이가 없네.”
나랑 같은 생각인지, 쪽지를 본 오스카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쁘니까 스승님도 입어요.”
“아, 싫어! 하나도 안 이뻐! 완전 유치해!”
“쳇.”
“얼른 이 닦고 자!”
“네에.”
나는 방에 가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칫솔을 들고 욕실에 갔다.
과연 최고급 펜트하우스.
욕실도 휘황찬란했다.
다만 거울이 좀 높아서, 욕실용 의자를 받쳐 놓고 올라가 양치질을 하는데.
“……?”
열려 있던 문을 밀고, 오스카도 자기 칫솔을 갖고 들어왔다.
하늘색 구름 잠옷을 입고 말이다!
“스슨니, 유티하다더니!(스승님, 유치하다더니!)”
나는 칫솔을 입에 문 채 웃었다.
뭉개지는 발음을 용케 알아들은 오스카가 내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서며 말했다.
“응, 유치한 거 맞아. 그냥 아주 우연히, 보니까 내 잠옷 다 빨아서 입을 게 없길래 입은 거야.”
“으항항!”
이내 오스카도 양치를 시작했다.
거울에 똑같은 잠옷을 입고 칫솔질하는 우리 둘이 보였다.
“으항….”
“멀 우서! 읏찌 마!”
어쩐지 기분이 좋아서, 나는 거울 너머 오스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쿡쿡 웃었다.
* * *
그 뒤로 나흘이 흘렀다.
오스카는 마법을 만드는 게 생각보다 까다로운지 잠도 못 자고 일만 했다.
무수히 많은 책에 둘러싸여 하루 종일 펜만 끼적이면서 가끔 “아악! 아니야!” 소리쳤고, 만들어 놓은 수십 개의 마법식을 폐기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내 세 끼 식사, 간식, 이 닦기, 샤워 시간은 챙겨 줬다.
‘에휴우, 얼른 커서 스승님한테도 효도해야지.’
나흘이나 그런 일상이 이어지자 내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오, 씨. 생크림 너무 많이 넣었나? 느끼할 것 같은데….”
오스카는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레시피를 힐끔거리며 은색 볼에 우유와 생크림을 섞고 있었다.
시간 맞춰 귀신같이 방에서 나오더니 내 점심을 만드는 중이다….
“스승님.”
“왜.”
나는 거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주방으로 쪼르르 가서 말했다.
“저 그냥 아침에 먹구 남은 샌드위치 먹으면 되는데….”
“아, 됐어.”
“근데 뭐 만들어요?”
“스파게티.”
“오오.”
아마도 크림 스파게티인가 보다.
“…고기 들어가요?”
오스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들어간다, 들어가.”
“무슨 고기?”
“베이컨.”
“와, 최고!”
그간 함께 지내며 놀란 점은, 그가 정말 못하는 게 없다는 거였다.
머리도 좋지, 잠도 안 자는데 안 지치는 걸 보면 체력도 좋지, 심지어 요리까지 만점!
오스카는 매일매일 다른 메뉴를 만들어 줬는데 다 맛있었다.
“집에 가기 싫다.”
“뭐?”
“스승님이랑 있는 거 좋아요. 밥도 맛있고 집도 근사하니까. 저 또 놀러 와도 돼요?”
“와, 이 미친 보모 짓거리를 또 하라고?”
“으항항! 장난이에요.”
오스카는 피식 웃더니 거품기로 볼 안을 마구 저으며 말했다.
“니네 아빠 어디 가면, 이제 딴 데 가지 말고 여기로 와.”
“앗! 정말요? 그래도 돼요?”
“응.”
사실 나 장난 아니고, 진심이었는데….
그때.
쾅쾅쾅―!
“깜짝아!”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놀라 오스카를 봤는데.
딱!
그는 태연하게 거품기를 저으면서 허공에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문이 열렸는지, 누군지 모를 방문객이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나는 힐끔 현관을 내다봤다.
“와, 아빠다!”
토벌, 일주일은 걸린다더니!
딱 5일 만에 마친 모양이었다.
환복도 안 하고, 갑옷 차림으로 서둘러 달려온 듯한 아빠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멈칫했다.
울컥한 듯, 인상을 찌푸린 얼굴.
곧 빠르게 들어오려다.
“흙 묻은 군화 벗고 들어와요! 안에 실내화 있어!”
누군지 내다보지도 않고 소리치는 오스카의 목소리에 또 멈칫.
집주인의 정당한 요구에 아빠는 얌전히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다음 들어왔다.
“아빠아아!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나는 너무 반가워서 아빠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런데 곧바로 나를 안고 움쪽쪽 할 줄 알았던 아빠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볼 뿐.
“아, 아빠? 왜 그래? 화났어?”
“어. 아빠 화 많이 났어.”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재빨리 떠올려보다가 깨달았다.
‘아, 맞네.’
나흘이나 지나서 깜빡했다.
아빠는, 체시어에게 다 들었겠지.
내가 아빠한테는 말도 없이 체시어에게 마도구를 준 것과 전쟁터에 갔던 것과 뒷일은 전혀 생각 안 하고 테오에게 능력을 쓴 것까지….
‘그치만 결과적으로는 다 잘됐는데.’
솔직히 혼나는 건 싫다.
싫은데….
“아빠는 지금 공주 혼낼 거야. 똑바로 서.”
“으음.”
나는 목소리를 까는 아빠가 무서워서 힐끔, 도와달라는 뜻으로 오스카를 봤다.
“큭큭. 뭘 봐?”
그러나 오스카는 얄밉게 거품기를 굴리며 웃을 뿐이었다.
“솔직히 이번에는 혼나야지. 아빠가 똑바로 서라잖아. 서, 얼른.”
…지금은 내 편이 아니구나.
결국, 나는 입을 댓 발 내밀고 아빠 앞에 몸을 바로 세웠다.
“공주, 입이 그게 뭐야. 이쁜 입.”
물론, 아빠의 지적에 바로 집어넣었다….
비굴한 나를 보며 오스카가 깔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