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일주일 후.
오스카의 소명 회담이 열리는 날.
나는 마음이 불안했다.
“아빠, 스승님 괜찮겠지?”
아빠는 나갈 채비 하는 자기 뒤를 초조하게 졸졸 따라다니는 나를 보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공주 스승님이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설마 아빠가 가만 보고만 있겠어?”
“그치? 혹시 스승님 벌 받는 일 없게 해 줘야 해?”
“당연하지. 아빠만 믿어.”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순간 아빠 눈에 스치는 걱정을 발견했다!
“뭐, 뭐 마음에 걸리는 일 있는 건 아니지?”
“아, 으응….”
“뭐 있구나!”
“아니, 진짜 괜찮을 거야. 그런데 단장 아저씨들이, 공주 스승님을 별로 안 좋아한다?”
“뭐? 왜?”
“글쎄. 마탑주 말투가 너무 쎄서 그런가 봐. 마법식을 안 알려 줘서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냥…. 요놈, 마침 잘 걸렸다, 생각하는 것 같아.”
“스승님 말투?”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그의 태도와 위아래라곤 없는 건방진 말본새.
하지만, 아빠와 나는 그런 오스카에게 이미 익숙해지기도 했고….
“근데 스승님 말투는 좀 그래도 솔직히 맞는 말만 하는데.”
“맞아. 맞는 말만 하는데.”
아빠와 나는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공주야. 너무 걱정하지 마. 공주 스승님도 바보는 아니니까, 회담장에서는 성질 죽이고 있겠지.”
“스, 스승님이? 과연?”
상상이 안 되는데….
“에이, 공주 스승님 똑똑하잖아. 눈치는 있겠지. 아빠가 적당히 가운데서 중재하면 돼. 단장 아저씨들이랑 아빠는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까.”
“으응, 알았어. 걱정 안 할게. 난 아빠 믿어!”
“고럼, 고럼. 아빠 갔다 올게. 뽀뽀~!”
“뽀뽀~!”
* * *
마법사단장, 질리언 발렌치아노는 마탑주, 오스카 마뉘엘을 아주아주 싫어했다.
왜냐면, 싸가지가 없어서.
새파랗게 어린 놈이 지금 제국에 자신을 대체할 인력이 없다는 걸 잘 아는지 황제 앞에서도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오스카 말고도 마탑에 연구원은 있지만, 솔직히 쓸 만한 마법식의 99%는 그의 머리에서 나온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황제도 오스카의 태도를 쉬쉬하며 봐주니, 그 아래의 권력자들도 설설 기어야 했다.
하지만.
‘괘씸한 놈!’
이번에는 황제도 오스카를 문책하기로 했다. 질리언은 회담에서 무조건 꼬투리를 잡아 볼 생각이었다.
‘내가 이번에 너를 아주 크게 한 방 먹여 주마!’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두 궁사단장은 이미 포섭해 놨다.
회담이 끝난 후, 10명의 군단장 중 과반수만 오스카를 처벌하는 데 동의하면 된다.
물론, 대체 인력이 없어 파직은 말도 안 되고 황제도 눈 가리고 아웅 하며 끽해 봐야 벌금형이나 내리겠지만….
‘벌금이라도 아주 쎄게 맞았으면 좋겠다! 혼자만 마법식을 알고 있던 게 다 알려져서 제대로 욕먹고 창피당했으면 좋겠다!’
질리언의 마음은 그랬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나? 시간이 몇 신데 아직 회담장에 얼굴도 안 비쳐?”
질리언이 은근히 바람을 잡자.
“아직 10분밖에 안 지났습니다, 질리언 경. 그리고 바쁜 사람이니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에녹이 재빨리 받아쳤다.
당연히 에녹은, 질리언과 정반대의 입장.
딸을 위해 귀찮은 일에 휘말려 준 오스카가 징계를 피할 수 있도록 실드 칠 준비가 만만했다.
“왔군.”
누군가 깐깐한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회담장 출입문으로 향했다.
제 죄를 소명하는 자리임을 인지하고는 있는 걸까?
오스카는 오늘도 한결같이 거만한 표정과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상석까지 걸어와 털썩 앉았다.
그 뒤는 보좌관 로벨이 따랐다.
“허, 사람 참…. 건방진 건 알았지만, 어찌 인사 한마디 없나? 여기 다 마탑주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일세. 게다가 없는 시간 내서 온 거야!”
그 모습이 또 괘씸해서 질리언이 쏘아붙이자.
“경, 진정하십시오.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괜히 서로 얼굴 붉히지 맙시다.”
에녹이 또 재빨리 받아쳤다.
“…….”
오스카는 주고받는 둘을 무심한 눈으로 한 번씩 훑었을 뿐이었다.
그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대체 바쁜 사람 불러다 뭘 소명하란 건지 모르겠는데….”
“몰라? 허, 자네가 희귀한 치유 마법식을 독식하고 있던 것도 해명해야 하지만, 우선 테오 앙트라세 경을 도운 이유부터 말하게!”
“맞네. 모두가 중요한 인력이건만, 사감으로 테오 경만 돕다니. 이는 그간 전장에서 죽어간 이들이 억울할 일 아닌가?”
질리언이 운을 띄우자, 기다렸다는 듯 마궁사단장이 받아쳤다.
“참, 나. 내가 무슨 성인도 아니고 내 능력으로 내가 살리고 싶은 놈 살렸다는데 왜 이딴 것까지 해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거만하게 팔짱을 낀 오스카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늙은이들이 핏대 세우며 씩씩거리는 거 가상하니까, 젊고 잘나가는 내가 장단 맞춰 드려야지.”
“뭐, 뭐야아?”
질리언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에녹은 예상보다 심각한 오스카의 태도에 당황했다.
‘아니,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오늘만은 칼자루를 쥔 단장들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 줘야 한다.
오스카도 분명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
한데….
“워워, 흥분하지 마요. 안 그래도 곧 무덤 들어갈 나인데 혈압 올라서 훅 가버리면 어쩌시려고. 시체는 누가 치우라고 그렇게 핏대 세워요?”
“이이이…!”
오스카를 삿대질하며 분노에 벌벌 떠는 질리언.
둘의 대거리를 보고 있던 에녹의 입은 서서히 벌어졌다.
‘아니, 와…. 잠깐만. 이거 뭐야.’
그 순간.
매형, 알렉세이의 말이 떠올랐다.
“다들 마탑주를 별로… 썩 좋아하지는 않아.”
“들어보니까, 다들 한 번씩 당했더라고.”
“마탑주의, 그… 독설?”
에녹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과 리리스를 대할 때 오스카는 가히 천사였다는 것을.
그는 옆에 앉은 알렉세이를 돌아보며 눈으로 물었다.
‘독설이… 이런 거였습니까?’
알렉세이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도 눈으로만 답했다.
‘나도 실제로는 처음 봐….’
와중에도 계속 주고받는 질리언과 오스카의 목소리가 들려, 에녹은 벌떡 일어났다.
“자, 잠시만! 다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해!
“흥분을 좀 가라앉히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싸우자고 모인 게 아니잖습니까.”
“에녹 경! 마탑주 말하는 것 좀 보세요! 이게 맞는지! 내가 올해 쉰여덟입니다! 손자뻘 되는 마탑주에게 이런 소릴 들어야 합니까? 예?”
“…….”
부들부들 떠는 질리언.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표정으로 귀만 후비적거리는 오스카.
그 사이에서, 에녹은 도무지 할 말이 없어 입술만 벙긋거렸다.
“됐고, 빨리빨리 하고 집에 갑시다. 늙은이들 바락바락 소리치는 거 일일이 다 들어줄 시간 없으니까.”
“그놈의 늙은이 소리는…!”
“뭐가 궁금하다고 하셨지? 내가 테오 앙트라세를 도운 이유요?”
대수롭지 않게 말한 오스카가, 서 있는 에녹을 턱짓했다.
“내가 저 집 따님 마탑으로 영입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건 여기 모르는 인간 없으니까 더 설명할 필요 없죠?”
오스카가 일어나며 계속 말했다.
“나라가 망조가 들었는지 인간들 지능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마탑이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도 다들 알 테고. 내가 그래서 루빈슈타인 공녀 영입에 사활을 걸었거든요.”
오스카의 말이 계속될수록, 에녹의 눈앞은 새하얘졌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별것 아닌 말도 단어 선택 하나하나를 재수 없게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
“이봐, 마탑주! 딴소리라 미안하지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질리언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인력난이 심하면 연구원 영입 기준을 좀 낮추는 게 어떤가? 대체 뭐 얼마나 머리가 좋아야 마탑에 들어갈 수 있는 거야?”
“풉.”
오스카가 웃음을 터뜨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설마 내가 그 댁 셋째 아드님 안 받아 줘서 아직도 유감 있어요?”
“뭐, 뭐?”
그래!
사실… 그랬다!
질리언이 오스카를 이렇게나 싫어하는 이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셋째 아들, 몸 편히 마탑 연구원 좀 시켜 볼까 싶어서 입단 테스트를 신청했었다.
제 지위를 이용해 마탑주에게 직접 테스트를 봐 달라 요구하며, 아들 편에 선물도 바리바리 들려 보냈더니.
[아드님은 멍청이입니다. 차마 애한테 너 멍청이라고 할 수 없어서, 아버지 전해드리라 하고 서신으로 갈음합니다.
늦둥이 딸도 하나 있다 들었는데.
혹시 딸은? 이런 되지도 않는 생각 하면서 또 마탑에 보내 내 귀한 시간 잡아먹을까 봐 덧붙입니다.
지능의 대물림은 핏줄의 영향이 크고 자식의 머리는 부모의 머리를 따라갑니다.
발렌치아노 가문은 가망 없으니 다시는 애들 보내지 마세요.]
예의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딴 망할 서신과 함께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던가.
질리언은 그날 이후 오스카에게 칼을 갈았다!
“아니, 댁 아들 멍청한 걸 내가 어쩔까? 설마 깜냥도 안 되는데 연구원으로 받으라고요? 그거야말로 취업 비리라 내 모가지 잘릴 중대한 사안 아닌가?”
오스카가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자, 말문이 막힌 질리언이 멍하니 입만 벙긋거렸다.
“사감으로 사람 대하는 게 대체 누군지 모르겠네.”
뚜벅, 뚜벅.
회담장 테이블을 돌아온 오스카가 일어나 있는 질리언의 어깨를 눌러 친히 앉혀 주었다.
“여기서 자식 전쟁터 보내고 싶은 부모가 누가 있겠어요. 당신 자식만 자식이에요?”
그리고 사색이 된 그의 귀에, 모인 이에게 다 들리도록 큼직하게 속삭였다.
“자식 지능이 안타까운 걸 나더러 어쩌라고요, 응? 멍청하면 별수가 있나? 나가서 칼 잡아야지. 안 돌아가는 머리 물려줘서 전쟁터 보내야 하는 걸 미안하게 생각하진 못할망정, 대놓고 나한테 부정 청탁이라….”
“아, 아니. 이보게. 부, 부정 청탁이라니 말을 왜 그렇게 하나?”
“아들 대가리 수준 뻔히 알면서 나한테 돈이며 금이며 바리바리 싸 보낸 게 청탁이 아니면 뭐예요?”
충격적인 폭로.
회담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여기 자식 있는 인간 중에.”
오스카가 에녹과 알렉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한테 청탁질 안 한 거 저 둘뿐이에요.”
그는 다시, 질리언의 귀에 흡사 악마처럼 속삭였다.
“이거야말로 황제 폐하가 노발대발하실 일 아닌가? 응? 귀찮다고 그냥 내버려 두니까 무슨, 무덤까지 비밀 지켜줄 줄 알았나 봐요?”
“…….”
질리언의 낯빛이 파래졌다.
물론, 오스카의 폭로에 찔린 다른 몇몇의 표정도 볼만했다.
“자, 다들 이해하셨죠? 늙어 굳어버린 머리로도 생각들은 하실 수 있을 테니….”
이윽고 환하게 웃은 오스카가 팔을 펼치며 말했다.
“오늘 여기서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자알 고민해 보시고. 회담, 재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