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59)화 (160/261)

한순간에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든 오스카.

에녹은 놀라, 오스카의 폭로에 다들 사색이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탁이라니….’

오늘 새삼 기함한 오스카의 태도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자식 가진 부모 마음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라, 에녹은 차마 말을 얹을 양심이 없었다.

딸을 전쟁터 보내기 싫어 황제의 뜻대로 정복 전쟁까지 결심했던 그가 아닌가.

‘하아.’

에녹은 그저 한숨만 삼켰다.

‘진짜 혼자 다 하네…. 나 필요도 없네….’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오스카는 정말로 에녹의 도움 따위 필요 없이 알아서 다 했다.

회담 시작부터 단장들의 약점을 틀어쥐고 우위를 선점하기까지….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아, 그래. 루빈슈타인 공녀. 지능도 달리는데 부모 권력빨로 마탑 들어오려던 자칭 영재들이랑 달리 걔는 진짜, 천재라서.”

오스카가 웃으며 덧붙였다.

“꼭 좀 데려오고 싶거든요. 내가 당신들한테 마법식 제공하느라 밤낮없이 일만 하다 보니 단명할 게 좀 걱정돼서…. 내 뒤를 이어줄 인재는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묵묵히 듣던 에녹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단명이라니. 꼭 저렇게 재수 없는 소리를 해요.

“아무튼, 그런고로. 루빈슈타인 공녀랑 테오 앙트라세가 무슨 관계인지도 다들 알 거고. 사촌 오라버니 정예군 첫 출정이라고 걱정 많길래,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문제 있어요?”

일동 침묵.

이전의 기세와 달리 약점이 잡힌 단장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알겠네. 테오 경을 왜 도왔는지는 이해했어. 우리도 자네 고생하는 거 잘 아니까 되도록 징계는 피하게 돕고 싶은데….”

…뭐래, 저 늙은이가. 돕긴 뭘 도와? 아주, 날 찍어낼 생각만 만만했으면서.

오스카는 한껏 누그러진 기세로 말하는 질리언을 지그시 쳐다봤다.

“모탈 상태의 부상병을 살릴 수 있는 마법이 있었으면 당연히 공유했어야지, 숨긴 이유는 뭔가? 이는 이미 황제 폐하도 아시는 사실이니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우리도 못 도와!”

“로벨.”

“예, 마탑주님.”

오스카가 제 보좌관을 불렀다.

그러자 로벨이 회담장 중앙 테이블로 노란 카나리아 한 마리가 든 케이지와 흰 장갑을 가져왔다.

장갑을 낀 오스카가 케이지에서 새를 잡아 꺼내 마나를 주입했다.

동시에―

“으억!”

“아, 아니! 마탑주! 여기 비위 안 좋은 사람도 있는데 예고를 좀 하고…!”

―으스러지듯 몸통이 터져 버린 가련한 카나리아.

숨만 붙어 파들거리는 새를 보며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눈 돌리지 말고 잘 봐요.”

오스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피 묻은 장갑 위에서 숨이 멎어 가는 생명에게 다시 마나를 주입했다.

이윽고, 모두가 숨을 삼켰다.

언제 숨이 간당간당했냐는 듯, 노란 털의 새는 한순간에 처음 모습 그대로 돌아와 힘차게 날갯짓했다.

회담장 허공을 포르르 날아다니는 카나리아.

“골자는 회귀입니다. 장기가 아예 소실된 경우가 아니라면 치명상을 입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소생시키는 거예요.”

모두 입이 떡 벌어진 채 놀랐다.

회귀라….

이건, 치유의 개념도 아니다.

그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볼 수도 있는 획기적인 마법.

“대단합니다, 마탑주!”

그때 성법사단장, 율리안이 벅찬 얼굴로 말했다.

“단순한 치유 마법이 아니었군요. 이건, 운명을 거스를 수도 있는 신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모두 동의하는 가운데, 오스카만 멈칫했다.

운명….

안 그래도 요 며칠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스승님…. 혹시, 있잖아요. 만약 사람 운명이 정해져 있는 거면 어떡해요? 제가 아무리 뭔가 해 보려고 해도… 안 되면?”

같이 지내던 내내 리리스는 그 점을 걱정했다.

아이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 개소리하지 말라며, 결국 테오를 살리지 않았느냐고 달래긴 했지만….

‘진짜 그런 거면 어떡하냐.’

실은 오스카도 착잡했다.

원래 죽었어야 할 시점에, 테오가 하필 부상당한 것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순한 우연 같지는 않았기에.

‘그럼 너는….’

프리메라의 완전한 소멸을 바라는 세계.

그리고 열일곱, 그 어린 나이에 죽어버렸던 리리스.

모든 것을 끝내도, 이 세계가 너의 존재를 바라지 않는다면 어쩌지.

그때는 나도 없을 테니까….

도와줄 수도 없는데.

울컥.

오스카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뜯듯이 붙잡았다.

“하, XX….”

난데없이 튀어나온 원색적인 욕설에 회담장 안에 모인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운명.

정말 무서운 단어다.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면 어떡하지?’

처음에는 내가 전생을 기억하는 이유가, 불쌍하게 죽어야 할 사람 살려 보라는 신의 안배라 생각했지만….

‘그냥 오스카가 회귀시키면서 다 기억하라고 해서 기억하는 것뿐이었지.’

난 생각보다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솔직히 전생이니 원작이니 하는 것도,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프리메라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 상상인지 확신할 방도도 없고….

그래서 테오가 16살까지 아프지 않을 수는 있었어도, 운명대로 죽을 날에 죽어야 했던 거라면?

“와아아. 정말 끔찍해. 제바아알!”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야….”

두꺼운 책을 펼쳤다.

이 책은 테오의 일이 있고 나서, 불안한 나머지 아빠랑 신전에 가 기도 좀 드리고 빌려온 성서(聖書)다.

원작에서 아빠와 체시어가 제일 많이 도움받았던 책.

원작에서는 그저―

‘성서에서 찾은 바로는….’

‘성서에 나온 성물은….’

‘성서에 따르면….’

정도로 서술되었던지라, 성서 안의 자세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

그래서 직접 읽어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빌려왔는데….

“글씨 크기 무슨 일이야?”

그냥 아빠한테 읽어달라고 할까?

좁쌀만 한 글씨 크기 때문에 읽어 볼 엄두가 안 났다.

“으어어.”

그래도 열심히 뒤적거리다 보니, 나름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성물’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심판자의 검.

중앙 신전의 대신관 루파치오가 제국력 465년 8월 8일에 받은 계시.

‘훗날 악에 물든 존재를 처단할 나의 검을 내릴 것이다.’]

“와, 이게 체시어가…!”

황제를 죽인 검이구나!

참고로 4년 전에 이미 확보해 놨다.

신도 인정한 원작 최고의 ‘선한’ 캐릭터 자드키엘만 들 수 있었던 그 검 말이다.

‘원작을 몰랐으면 무슨 소린가 싶었을 텐데, 알고 보니까 이해가 다 되네.’

성서에서도 대놓고 황제를 ‘악에 물든 존재’라 칭하고 있다니….

[사도의 심장.

중앙 신전의 대신관 베르마노가 제국력 525년 2월 4일에 받은 계시.

‘훗날 영원히 악에 물들지 않을 선한 자에게 소생의 심장을 내릴 것이다.

그는 평화를 지켜야 할 사명을 지닌 나의 마지막 사도.

심장을 지닌 사도는 운명을 재단할 수 있는, 이 세계의 유일한 중재자가 될 것이다.’]

“어, 이거….”

심장이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4년 전, 내가 성열에 들었을 때.

아빠가 날 깨우려고 찾아온 성물.

“좀 징그럽게 생겼었어. 처음에는 돌덩이였는데 결계를 풀고 보니까 심장처럼 팔딱팔딱 뛰더라고?”

나중에 아빠가 말해 줘서 알았다.

원작에서는 자드키엘에게 가야 했던 성물인데….

영원히 악에 물들지 않을 선한 자에게

“마, 맞네. 선한 자라면 역시 자드키엘 사제님 거였어.”

그런데 내가 가로채 버렸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우쒸. 이거 나중에 문제 되는 건 아니겠지?’

이미 삼켜버린 걸 되돌려줄 수도 없는데.

나는 내심 미안해졌다가, 곧.

“그런데….”

심장을 지닌 사도는 운명을 재단할 수 있는, 이 세계의 유일한 중재자가 될 것이다.

두근, 두근.

갑자기 흥분으로 가슴이 뛰어서, 나는 손을 가만히 심장 쪽에 올려놓았다.

운명을 재단할 수 있는

이거 설마, 내가 짐작하는 뜻이 맞을까?

“잠깐. 나….”

절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어, 엄청 대단한 걸 가로채 버린 것 같지…?”

* * *

갑자기 나직한 욕설과 함께, 괴로운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린 오스카.

“마탑주?”

에녹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 미안합니다. 내가 어디까지 했었지?”

“마탑주, 그 마법식을 알려준다면 앞으로 많은 이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흥분한 눈으로 성법사단장, 율리안이 말하자.

“아니, 뭐 부탁까지야…. 공익을 위해서는 공유가 당연한 말이오. 그건 황명이니까.”

질리언이 받아쳤다.

그리고 오스카의 눈치를 보다 크흠, 헛기침하며 덧붙였다.

“폐하께서 이걸 왜 숨겼는지 궁금해하실 텐데…. 이유는 있고?”

“로벨.”

“예.”

오스카가 또 보좌관을 불렀다.

곧바로 로벨이 모두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주었다.

마법식이 그려져 있었다.

“아.”

“흐음.”

보자마자 곳곳에서 당황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 표정이 어두웠고, 기대하던 율리안은 절망한 얼굴이었다.

“…쓸 수가 없겠군요.”

율리안이 중얼거리자,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지금 보고 계신 건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겁니다. 들어가는 마법식만 여든여섯 개. 고정된 상숫값 빼고 장기 상태, 위치, 부상자의 신장에 따라 달라지는 매개변수는 개중 스물두 개. 장기 구조가 다르니 성별에 따라서도 달라져요.”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오스카가 유유히 회담장 테이블 한 바퀴를 돌며 말했다.

“모탈 상태의 인간이 숨이 붙어 있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까지 부상자의 장기 손상 상태, 신체 구조 전부를 오류 없이 파악해서 마법식 배치한 다음, 머릿속에 구현하고 시전할 수 있는 분?”

오스카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당연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제한 시간 30분. 있어요? 할 수 있는 사람?”

있을 리가.

직접 손으로 그려도 일주일은 넘게 걸릴 복잡한 마법식이다.

그리고 여차여차 마법식을 구현한다고 해도….

“이거 시전하는 데 드는 마나량은 최소 백만에 가까워요. 여기 그만한 인간 누가 있지? 나,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에녹, 그리고 그 오른편의 체시어에게 향했다.

“저 둘.”

오스카가 마법식이 그려진 종이를 팔랑거리며 에녹에게 물었다.

“이건 시간이 핵심인데. 나처럼 빨리 머릿속에 구현하고 부상병 죽기 전에 쓸 수 있어요?”

“힘들겠지, 당연히.”

에녹이 곧바로 대답하자, 오스카가 큭큭 웃으며 제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내가 이걸 숨긴 것 같아요? 나 혼자 쓰려고?”

회담장 안, 모두의 입이 조개처럼 꽉 다물려 있었다.

“보다시피 매우 비효율적인 마법이에요. 괜히 프리메라가 대단한 게 아니지. 누구나 이런 게 되겠냐고.”

오스카가 쯧쯧 혀를 찼다.

“공개 안 한 데에는 다아, 이유가 있는 겁니다. 댁들 대가….”

대가리가 어쩌고 하려던 오스카가 멈칫했다.

우연히 마주친 에녹의 눈빛.

‘제발 부탁이야, 마탑주. 굳이 여기 단장들이랑 척질 필요가 없어. 제발, 조금만 순화해 줄 순 없을까?’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댁들 수준으로는 어차피 알려 줘 봤자 쓸 수도 없는 거라, 공개할 필요성도 못 느꼈던 겁니다.”

에녹은 눈을 질끈 감았다.

별로 순화 안 됐어!

“아시겠어요?”

거만하게 마무리한 오스카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 봐도 되죠? 내가 워낙에 바쁜 몸이라.”

그야말로 회담장의 폭군!

아무도 오스카를 잡지 못하고 이만 갈았다.

‘이거 큰일이네.’

회담은 말할 것도 없이 오스카의 승리였지만, 에녹은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권력자인 도스들 눈에 밉보이면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이 자리에는, 훗날 혁명을 위해서 싫든 좋든 데리고 가야 할 이들이 많았다.

“아.”

그때, 나가려던 오스카가 멈췄다.

그리고는 뒤로 두어 걸음 돌아오더니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뭐, 자식 걱정에 어리고 건방진 마탑주한테 고개 숙이며 속살거렸던 부모님들 마음은 다 이해합니다. 이 거지 같은 나라가 문제지, 당신들이 문제겠어요?”

청탁 넣었던 걸 까발릴까 봐 불안해하던 모두가 뜻밖이라는 듯 오스카를 쳐다봤다.

“까발려 봤자 내가 이득 보는 것도 없고.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으면, 괜히 얌전히 사는 나 건드리지만 않으면 돼요.”

그에, 전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정말…?

“그럼 이만. 수고.”

오스카가 회담장을 나갔다.

에녹은 오스카가 나간 문을 가만 바라보다, 슬쩍 웃었다.

…완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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