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60)화 (161/261)

* * * 

소명 회담을 끝내고, 나가는 길.

오스카는 잽싸게 제 앞을 막아선 그림자에 놀랐다.

“아오, 씨! 깜짝아!”

체시어였다.

그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래냐? 착각 한번 웅장하네?”

오스카는 바로 비아냥거렸다.

전쟁터 한복판에 리리스를 불러낸 장본인. 머리를 죄 뜯어 놔도 시원찮겠구먼.

“네가 뭐가 이쁘다고 도와? 너 도운 거 아닌데?”

“아뇨. 리리스를 도와주셨다는 것 압니다. 리리스가 무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

그건 또 그것대로 짜증 나는데?

표정도 없던 얼굴이 답지 않게 기뻐 안도하는데, 영 마음에 안 든다.

“어이가 없네.”

눈살을 찌푸린 오스카가 체시어 가까이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내가 내 제자 도와준 걸, 네가 왜 고마워해? 네가 뭔데? 너, 걔한테 뭐 돼? 어? 설마….”

오스카의 눈이 번뜩였다.

“둘이 연애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네놈만 컸지, 애는 아직 쥐콩만 한데? 뒤진다, 진짜?”

“아….”

코앞까지 다가와 살기를 내뿜는 오스카에, 체시어가 옆으로 슬쩍 눈을 비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리리스한테 아무것도 아니고요. 혹시 제 말이 거슬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참, 나.”

옛날에는 아주,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

무조건 숙이고 들어오는 체시어에 전투 의지가 사라져 버렸다.

“알았으니까, 꺼져.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면 그게 누구든지 그냥 죽게 둬라. 애 또 위험하게 불러내면 진짜 너부터 죽여 버린다.”

“저, 귀가하시는 길 호위하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는 오스카를 따라오며 체시어가 말했다.

“뭐어라고?”

오스카가 황당해져서 돌아봤다.

에녹도 그러더니, 체시어도….

마탑주가 무슨 유리알처럼 연약한 36개월 아기인 줄 아는 걸까?

“내가 무슨 전쟁터 한복판 가로질러 가냐? 뭘 호위해, 뭘!”

그때.

체시어의 시선이 오스카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체시어!”

그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

곧 체시어는 이까지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시종일관 딱딱해 보였던 붉은 눈매도, 경계 없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걸 본 오스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자식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안다고?

대체 누구길래?

궁금해진 오스카가 휙, 돌아보았다.

* * *

“우와! 머리 뽀개질 것 같아!”

탁.

나는 펜을 놓았다.

내 앞에는, 이틀에 걸쳐 열심히 머리 굴려 정리한 결과물이 있었다.

1. ‘운명’이 발동되는 데에는 ‘시점’이 중요하다.

(‘죽어야 할’ 시점에 ‘죽지 않게’ 만들어야 함.)

2. 아무나 남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사도의 심장’이라는 성물을 가지면 아마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이건 내가 4년 전에 먹음.)

3. 내 주변 사람 중에 죽을 날을 확실히 받아둔 사람.

레온: 원작 2권 시점, 대규모 마수 토벌전 때.

오스카: 6년 후, 9월 4일.

나는 1번 가정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었다.

죽는 시점을 무사히 넘겨도, 죽을 운명이라면 언제든 또 위험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사도의 심장.

운명을 재단할 수 있다는 성물의 능력이라면, 죽을 사람들을 확실히 살리는 것도 가능할 터.

다만, 이 성물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심장을 먹은 내가 직접 개입해야 해.’

내가 최종적으로 내린 가정은 바로 이러하다.

죽을 운명의 사람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내가 재빨리 구해 내면 산다!

“흐음.”

나는 달력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이 가정을 확신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에피소드가 바로 다음 주에 있다.

사람이 많이 죽는다.

아주 많이.

그런데 다 살릴 수 있다.

죽는 원인을 확실히 알고 있고, 내 능력이 필요하다 해도 생명력은 30분이나 들까 말까 한 수준.

그렇다면 왜 고민하냐고?

‘이게, 하아…. 이 사람들을 살려 버리면 황제 좋은 일이라 이거지.’

그랬다.

다음 주에는, 원작 1권 후반부에 언급되는 ‘성지 순례’가 시작된다.

대신관을 필두로 각지의 신도들, 신앙심 높은 귀족들 50인 남짓이 모여 성지 ‘몰렉’이라는 곳으로 참배를 드리러 가는데….

‘하필 순례단이 다녀가고 나서 몰렉 마을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다 죽어 버리지.’

물론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작고 조용한 마을에 순례단이 다녀갔더니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

그리고 몰살?

이 일로, 억울하겠지만 대신전과 황제는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성지 순례는 황실에서 주관하는 매우 중요하고 큰 연례행사니까.

‘동시에!’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에게는 치고 나갈 기회였다.

신권정치를 하는 이 나라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신전의 힘이 약해지고 신앙심이 사라질 만한 일이 생기면 혁명 세력에게 이득이니까.

‘아니,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는데 이득이라고 할 수 있나?’

황제한테 타격을 주겠답시고, 많은 사람의 죽음을 외면하는 건 아빠도 원치 않을 거다.

“일단, 아빠한테 가자!”

어차피 아빠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 * *

“공작님.”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제임스 브라운 씨의 집무실을 찾았다.

“…공작님?”

아빠는 놀란 눈치였다.

“아버지.”

“…이번엔 아버지?”

그도 그럴 게, 아빠가 일할 때는 방해하기 싫어서 나는 집무실에 잘 안 가는 편이니까.

나는 예의 바른 숙녀처럼 말했다.

“소녀,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전에 아버지께서 저의 힘으로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말만 해 달라 하셔서….”

아빠는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아, 그랬나…. 기억이 잘….”

“아잇, 생각 안 나는 척하지 말구!”

“으응, 아빠가 그랬던 것도 같네.”

아빠는 긴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왜, 왜? 우리 공주가 뭘… 하고 싶어서 그럴까?”

나는 논문 쓰던 시절의 경험을 살려 만든 세 장짜리 레포트를 아빠 책상에 올려놓았다.

“공작님, 이 결재 서류 읽어 보시고 승인해 주세요.”

“…….”

아빠의 파란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 * *

“…스승님! 듣고 있는 거 맞죠?”

“어어.”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오스카는 리리스의 말을 하나도 듣고 있지 않으면서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요, 아빠랑 세 시간 넘게 싸우긴 했는데 화해했어요. 위험할 일 없고, 체시어도 있고, 사람들도 살릴 수 있다고 하니까 아빠가 고민하다 허락해 줬어요.”

“어, 그래….”

“근데 아빠가 스승님도 걱정할 거라고 스승님 허락도 받으라고 했거든요. 으음, 저 거기 가도 될까요? 스승님 걱정하는 일 하나도 없을 거예요. 같이 가는 사람들도 많고, 마수 같은 것도 안 나와요.”

“응, 그래….”

지금 오스카의 머릿속을 점령한 건 다름 아닌 체시어.

“와! 정말요? 이렇게 쉽게?”

“어, 그래….”

제 소명 회담이 있던 날 봤던, 그의 ‘낯선’ 모습 때문이었다.

“으항항!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럼 우리 삼 주 후에 다시 수업하는 거 맞죠? 저 보고 싶어도 꼭 참고 기다리세요!”

“그래, 그래….”

“만약 제가 정말 그 심장 성물로 특별한 사람이 된 거라면… 힘닿는 데까지 사람들 많이 살리고, 또…. 저도 오래오래 살고, 스승님도 오래오래 살게 해 드릴게요.”

“어어.”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수줍게 뺨을 붉힌 리리스의 얼굴은 보였다.

오스카는 잠시 체시어의 앞에서 저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는 리리스를 상상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네!”

“너 연애하지 마라.”

“…갑자기요?”

리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도 뭣도 아닌데 연애를 하라느니 말라느니 하면 애가 반항심만 갖겠지?

생각한 오스카는 덧붙였다.

“평생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음…. 아, 그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지 마.”

그러니까 죽고 무덤에 묻혀서 눈에 흙 들어가기 전까지!

보통 이런 말은 꽤 오랜 시간을 의미하지만….

‘나는 6년 남았으니까 괜찮아!’

사라지고 난 후에야 리리스가 뭘 하든 말릴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말리고 싶어졌다.

왜냐고?

이번에 발견한 체시어의 ‘의외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리리스가 연애를 한다면 그 상대는 체시어일 확률이 꽤 높은데….

‘이미 옛날에 걔한테 반했다고도 했고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리리스는 뭔가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다.

“불만이야?”

“…언제 스승님 눈에 흙 들어가는데요?”

……?

뭐야, 이 패륜적인 질문은?

동글동글한 눈매에 힘을 빡 주고 노려보는 게 제법 반항적이다.

“흙이 금방 들어가나 봐요? 그럼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무덤에 묻히실 생각이죠? 뭐 굳이 더 살 생각 없고?”

“어쭈?”

말하는 거 봐라. 나 죽을 때까지 연애하지 말랬다고 화가 났나?

어차피 6년밖에 안 남았는데.

물론 그 말은 당연히 못 하고, 대충 돌려 말했다.

“야, 내 눈에 흙 금방 들어가. 맨날 햇빛도 못 보고 죽어라 일만 하는데 뭐 오래 살겠냐? 어?”

“…….”

“대답 안 해?”

대답, 안 한다.

리리스는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오스카를 노려보기만 했다.

“눈 이쁘게 떠라.”

“스승님은 진짜 뭐가 문제지? 왜 듣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말을 할까? 나는, 나는 이번에도 스승님 때문에, 스승님 때문에….”

시선을 피한 리리스가 펜을 쥐고 말끝을 흐렸다.

“나 때문에, 뭐? 계속 말해!”

“…….”

울컥했는지 말을 못 잇는다.

꾹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억지로 크게 뜬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고였다.

멈칫한 오스카가 서둘러 덧붙였다.

“아니, 내 말은. 아직은 좀 이르다 이거지. 조금만 참으라는 게 그렇게 서러울 일이야? 이렇게 울 만큼?”

애써 책을 보는 척하며, 리리스는 펜을 쥔 손을 파르르 떨었다.

“말 좀 해!”

크으응, 코를 삼킨 리리스가 눈에 고인 눈물을 쓱쓱 닦아내더니 오스카를 휙 돌아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연애 안 해요!”

“그래?”

“네! 남자친구한테 미안하잖아요? 저도 손 놓고 살면 어차피 몇 년 후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야?!”

오스카가 발끈하며 벌떡 일어났다.

“뭔 재수 없는 소리야?”

“제 말이 재수 없어요?”

“그래!”

“스승님도 재수 없어요!”

“뭐?!”

금세 다시 눈에 눈물을 매단 리리스가 씩씩거리며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

오스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나 공부 안 해!”

“야! 너 미쳤어?”

쿵, 쿵, 쿵, 쿵!

리리스는 잡을 새도 없이,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공부방을 나가 버렸다.

세상에, 애가 사춘기인가?

오스카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렸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성지 순례가 시작되는 날.

리리스가 야무지게 짐을 챙겨 소집 장소인 파빌 신전으로 향한 지는 10분째다.

“하아아아.”

분리불안증 11년 차, 싱글대디 에녹 루빈슈타인.

그는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점검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딸을 이긴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진짜 완벽히 패배했다.

‘대체 우리 공주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 소리 나지?’

딸이 가져온 그놈의 ‘결재 서류’에는 반박의 여지가 하나도 없었다.

‘안 돼!’ 하면 그야말로 억지인 수준.

결국은 졌다.

결재 서류 13번에 의거, 에녹은 딸을 혼자 보내야만 했다.

13. 귀족들의 성지 순례 참여는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에녹 루빈슈타인이 딸이랑 갑자기 같이 가는 건 이상함.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의 핵심은 황제 폐하의 의심을 사지 않는 것!

하지만.

‘미안하다, 공주야. 못난 아빠를 용서하렴.’

에녹은 어디선가 구한 가짜 콧수염을 대 보며 딸에게 사과했다.

자식을 언제까지 품 안에 가둬 키울 건가?

독립심, 자립심….

물론, 길러 줘야지.

좋다. 다 좋은데.

에녹의 사전에는 일평생 없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제논에서 숨어 살 때.

주변 이웃들의 조언으로, 딸에게 첫 심부름을 시켜 보냈던 날.

‘너는 모르겠지만….’

그날도 사실, 에녹은 걱정에 손톱 딱딱 물어뜯으며 몰래 딸의 뒤를 밟았었다!

“하아, 그땐 그랬지….”

그때.

쿵쾅쿵쾅.

매서운 발소리에 에녹이 흠칫했다.

이내,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미쳤어요?!!!”

쩌렁쩌렁.

저택이 떠나가라 내지르는 소리에, 에녹이 비틀거렸다.

‘마탑주?’

갑자기 등장한 것은 오스카.

“왜 왔어? 오늘은 리리스 수업―”

“미쳤냐고요!!! 어?!!!”

쩌렁쩌렁.

또 비틀거린 에녹이, 재빨리 양쪽 귓가를 더듬어보며 말했다.

“…나, 나 귀에서 피 안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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