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61)화 (162/261)

에녹은 반쯤 정신이 나가 빽빽거리는 오스카를 보며 깨달았다.

저거, 딱 봐도.

‘모르는 것 같지?’

성지 순례를 떠난 리리스가 이 주나 집에 없을 예정임을 몰랐던 것 같다.

평소처럼 수업하러 왔더니 애가 없어서 지금에야 안 모양.

“집사한테 듣고 왔어? 애 성지 순례 갔어. 리리스가 당신한테도 허락받았다고 했는데.”

“내가 언제…!”

발끈하던 오스카가 멈칫했다.

그래, 분명 저번 주 수업 때 애가 뭐라 조잘거리긴 했었다.

“아, 이런 미친. 그때 그게 그런 얘기였어?”

오스카가 사색이 되어서 제 뺨을 잡아 내렸다.

“말했지? 에이, 뭐야. 자기가 듣고 까먹어 놓고서는.”

쯧쯧, 혀를 찬 에녹이 다시 거울로 눈을 돌렸다.

“대체 애를 거기 왜 보내요!”

뒤에서 오스카는 절규했다.

“하루 종일 걸어야 하고, 맨날 길바닥에서 자야 하고,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할 텐데! 으아아악! 데려와! 얼른 애 다시 데려와!”

“진정해, 마탑주. 내가 안 말렸겠어? 그런데 꼭 가야 한다잖아. 전에 내가 애 혼냈을 때 기억하지?”

에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아빠한테 말만 해 달랬더니, 진짜로 이렇게 바로 말할 줄은….”

“그런다고 홀랑 허락해요? 힘든 건 둘째 치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안 된다고 대충 둘러댔어야지!”

“그렇게 말했는데, 이길 수가 없어. 당신도 알잖아. 리리스가 미래를 다 알고 있는 거. 위험할 일 절대 안 생긴다는데?”

그래, 다 알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혹시나라는 게 있잖아요!”

“물론 그 점도 걱정했어. 그런데, 체시어도 같이 가게 될걸?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 이러는 거 있지?”

황실에서는, 순례단을 위해 직접 호위 행렬을 붙여주는데….

이때 호위대장은 도스 계급 군단장 중 한 명이 맡는 것이 관례.

“너 아직 황명도 안 내려왔는데 체시어가 갈지 누가 갈지 어떻게 알아? 물었지.”

“그런데?”

“그런데 이번 순례는 원래 마검사단장이 호위였다는 거야?”

에녹은 혀를 내두르며 덧붙였다.

“와, 정말 애 말대로였어. 소름이 다 돋더라. 다음 날에 진짜 체시어로 정해졌지. 차라리 나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

“아주 앞일을 훤히 다 내다보고 있잖아. 그런 애가 위험하지도 않고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하니 내가 어떻게 말려?”

“꼭 가야 하는 이유가 뭔데요?”

“…….”

에녹은, 그 질문에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둘러댔다.

“아니, 그리고. 못 말린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어. 나한테 울면서 소리치는데, 좀 찔리더라고?”

“…….”

“아빠는 나를 언제까지 가둬 키울 거야아~! 아빠 없으면 나는 평생 혼자서 여행도 못 가고 놀러도 못 다녀~?”

“…….”

“아빠 전쟁터 나갈 때마다 고모 집, 삼촌 집 가는 거 진짜 지긋지긋해~! 아빠, 이거 과잉보호야~!”

리리스를 흉내 내던 에녹이 들고 있던 콧수염을 붙였다.

물론, 그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결정적인 이유는 오스카에게 말하지 않았다.

딸의 결재 서류, 8번.

8. 내가 스승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걸 확신하고 싶어.

에녹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회귀의 대가는 존재 자체의 소멸이야. 스승님은 10년 후에 시체도 없이 사라지나 봐.”

회귀에 대가가 있겠거니,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사실을 리리스가 확신시켜준 이후.

오스카를 무사히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에녹은 그간 밤낮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

사업 준비만큼 열을 올렸었달까?

고대 마법도 조사해 봤고.

기적을 행했다는 역대 대신관들의 기록도 뒤져 봤으며.

타국으로 망명했다는 옛날 마법사들의 핏줄이 남아있는지까지 찾아봤으니….

정말이지, 안 해 본 게 없었다.

“저기요.”

“아, 응.”

어두워진 표정을 금세 푼 에녹이 오스카를 돌아봤다.

그는, 에녹과 리리스가 제 6년 남은 시한부 인생을 알고 있음을 전혀 몰랐다.

원망할 만도 한데.

나를 미워할 법도 한데.

그런데, 참….

“…듣고 있어요?”

“어어, 뭐라고? 미안.”

에녹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오스카가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마법으로 바꾼 금발.

어정쩡하게 붙인 콧수염.

“보내긴 했는데 걱정은 되니까? 그래서 지금, 그렇게 허술하게 변장하고 몰래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정답.”

해맑게 말한 에녹이 다시 거울을 돌아보았다.

“바보예요? 머리 색 바꾸고 콧수염만 붙이면 애가 못 알아볼 것 같아요?”

“당연히 공주는 알아보겠지. 다른 사람들만 못 알아보면 돼. 애 눈에 안 띄게 몰래 따라갈 거야.”

“마법은 뒀다 뭐 하는데?”

“오, 마탑주. 나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어.”

에녹이 휙 돌아봤다.

“혹시 키랑 이목구비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바꿀 수 있는 마법은 없을까?”

“하아.”

미치겠다, 진짜.

오스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여기는 제도, 파빌 신전.

성지 순례를 앞두고, 많은 사람이 하얀 순례복을 차려입고 모여들고 있었다.

각지의 신관, 사제들은 물론이고 신앙심 깊은 귀족들의 수도 꽤 됐다.

나는 한숨이 나왔다.

‘2주 노숙, 실화야?’

순례길은 고단함을 이겨내는 게 핵심이라, 왕복 2주가 걸리는 거리 내내 노숙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목적지인 몰렉에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참사를 해결하려면 순례단에 합류하는 것이 가장 의심 없는 방법이었다.

‘뭐, 잘 때 등은 좀 배기겠지만. 딱히 위험한 일도 없고.’

순례단들의 무사 귀환은 원작에 서술되어 있다.

‘또, 체시어도 있으니까.’

나는 체시어가 순례단의 호위를 맡을 줄 알고 있었다.

원래 이 에피소드의 호위대장이 마검사단장이었으니까.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선대 마검사단장은 4년 전, 성수 사태 때 죽고 말았다.

“그런데, 체시어. 내 말 맞지? 혹시 너도 내가 버르장머리 없었다고 생각해? 내가 아니라 스승님이 너무하지 않아?”

나는 순례단이 전부 모이길 기다리는 동안 체시어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저번 주 마지막 수업 때.

오스카에게 성질을 내고 나온 일 말이다.

“난 스승님 살리려고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기 금방 죽는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지?”

솔직히 울컥했다.

자기 눈에 곧 흙 들어간다느니 뭐니,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쉽게도 해서….

“그러게. 속상했겠네.”

“맞지? 스승님이 잘못했지?”

순례복 차림인 나와 달리, 갑옷 풀 착장 중인 체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체시어도 앞으로 6년밖에 안 남은 오스카의 사정을 알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나도 아빠도 체시어도 오스카를 구하려고 이것저것 하며 직접 발로 뛰었으니까.

“아니, 그리고 대체 뜬금없이 연애 얘기는 왜 하냐구. 자기 걱정이나 할 것이지, 지금 내 연애 걱정할 때야?”

“…….”

“그게 맞아? 응?”

물었더니, 체시어는 왜인지 눈을 느릿하게 껌뻑이며 나를 응시했다.

잠시 당황한 듯 뭔가 생각하던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리리스.”

“응.”

“그… 마탑주님이 왜 그런 걱정을 하셨는지 알 것 같아.”

“엥. 왜?”

체시어는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말했다.

“사실 저번 주에… 소명 회담 있던 날, 있잖아.”

“아, 응.”

“내가 그때 마탑주님을 댁까지 호위했었는데….”

그때.

나를 발견한 대신전의 시종 사제 한 명이 허둥거리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순례에 참여하려고 오신 거죠?”

“앗, 네!”

“소집 시간이 다 되어서 인원 점검 중이에요. 신전 소속이 아닌 귀족분들은 저쪽 줄에 서서 명단 등록해 주세요. 랭크 슬릿은 가져오셨죠?”

“네!”

시종 사제가 가리키는 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체시어, 나 얼른 이름 올리러 갈게! 이따 다시 말하자!”

나는 체시어를 뒤로하고 대기 줄에 섰다.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 신분증 역할을 해 주는 랭크 슬릿을 꺼내는데―

“……?”

―톡톡.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돌아보니, 백발이 성성한 두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홀홀홀.”

“…….”

뭐지?

일단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봤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홀홀홀.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참 예의도 바르네요. 너무 예뻐서 인사하려고 불러 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저~기 남부 아르고니아에 있는 주신관 할아버지예요. 이쪽은 내 친구, 부신관이고.”

신관님들이었구나.

아르고니아 주신관 할아버지는 옆에 선 부신관 할아버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무척 상냥해 보이는 주신관과 달리 부신관은 뭔가 불만이 있는 듯 뚱해 보였다.

“저는 리리스 루빈슈타인이에요. 신전 소속은 아니지만 기도드리려고 왔어요. 리리스라고 불러 주세요.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

“홀홀홀. 그래도 될까? 세상에나, 이렇게 천사 같은 아가씨라니. 정말 예의도 바르고 깜찍한 게 내 딸을 쏙 빼닮았어.”

“아! 적당히 좀 해요, 적당히.”

주신관이 넉살 좋게 말하자, 부신관이 인상을 팍 쓰며 노려봤다.

나는 줄어드는 대기 줄을 따라서 걸으며 물었다.

“음, 저는 신관님들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여기 다른 신관님들도 많아서….”

“아! 내가, 내가 이름이….”

주신관은 멈칫하며 눈을 굴렸다.

“…늙어서 가물가물. 이름이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대충 릭이라고 불러 주렴. 그리고 이쪽은.”

릭이 부신관을 쳐다보며 1초 정도 머뭇대다 말했다.

“…스카 할아버지란다.”

“하아.”

릭이 대신 소개해 주자 부신관, 스카는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노려보며.

“너 대체 여기 왜 왔냐? 2주일 내내 다리 아프게 걷고, 길바닥에서 자고, 맛도 없는 밥 먹고, 응? 고생이 뭔지 탐구해 보려고 왔어? 지금이라도 집에 가라?”

늙어서 숨쉬기도 힘든 듯한 목소리로 버럭 내질렀다.

“…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뭔 상관이람?

당황해서 주춤거리는데 릭이 스카의 등을 짝, 후려쳤다.

“악!”

“이그, 사람 참! 귀여운 아가씨가 기도하러 간다는데 대견하다고 칭찬은 못 해 줄망정!”

“즈그으. (저기요.)”

릭은 발끈한 스카가 이를 악물든 말든 홀홀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리 아프면 이 릭 할아버지가 업어 주면 되~지!”

“네, 네?”

나는 뒷걸음질 치며 릭과 스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깡마른 몸.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대체 이 두 노인이 쉼 없이 걷고 노숙하는 2주간의 여정을 어떻게 버틸 생각으로 온 건지 궁금했었다.

나를 업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업어 줘야 할 판인데….

‘아니, 그리고 날 언제 봤다고 자꾸….’

친한 척하는 릭도, 다짜고짜 버럭 짜증을 내던 스카도 좀 이상하다.

‘아빠가 낯선 사람이랑 괜히 친한 척하는 사람은 절대 따라가지도 말고 의심부터 하랬다!’

거의 다가온 내 차례.

나는 가방끈을 야무지게 붙잡고 도망치듯 줄을 서며 생각했다.

이 할아버지들, 경계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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