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성지 순례가 시작되었다.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는 몰렉.
제도에서 성지인 몰렉까지는 북쪽으로 쭉 걸어서 일주일―
‘―은 무슨!’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일주일은 대체 누구의 기준이란 말인가?
1시간 반 걷고 15분 휴식, 하루에 세 번 있는 식사 시간은 단 30분.
샤워도 중간중간 방문이 예정된 마을에서만 가능한데, 그 마을이 겨우 세 군데뿐이란다.
일주일에 세 번 씻으라는 거다.
‘미친 거 아니야?’
절로 욕이 나왔지만, 탓할 사람이 없었다. 원작만 믿고 순례를 감행한 내 탓이었으니까.
누가 알았겠나? ‘몰렉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라고만 나와 있는데!
노숙은 물론이고 오줌은 노상 방뇨, 똥은 나눠 주는 배변 봉투에 봐야 한다는 사실까지 알았다면…!
‘와, 아빠 보고 싶다.’
출발한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집이 그리웠다.
‘나는 바보가 틀림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성지 순례라고 해서 교회 다니던 애들이 여행 가듯 유럽 다녀오던 거 생각했다….
“헉, 헉.”
여행? 개뿔.
여긴 철저한 개인플레이.
힘들다고 쉬어 가자며 권해 주는 사람도 없고 뒤처진다고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이, 이제 체시어도 안 보여….’
인가와 가까운 숲길을 가로질러 쭉 걷는 순례단.
풀 체력이었던 처음에는 선두의 체시어와 나란히 발맞춰 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50인이 넘는 행렬에서 맨 끝으로 뒤처져 있었다.
“공기가 좋네! 한 십 년은 젊어진 기분이야!”
“하,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게다가… 이 수상한 두 신관 할아버지!
릭과 스카!
첫 만남부터 뭔가 느낌이 싸해서 되도록 피해 다니려고 했는데!
‘빼도 박도 못하고 계속 같이 걷게 생겼잖아!’
순례단 중 체력이 제일 달리는 셋은, 아마 나와 이 두 노인일 터.
그래서인지 나는 의도치 않게 두 사람과 함께 맨 뒤에서 걷고 있었다.
“리리스, 힘들지?”
릭이 헉헉거리는 나를 보며 안타까운 듯 물었다.
“아, 아뇨. 헉…. 안 힘들어요.”
“할아버지가 업어 줄까?”
“아니요!”
“그럼 안아 줄까?”
“그건 더 아니요!”
“왜에. 힘들잖아.”
“저 진짜 괜찮아요!”
대체 이 미친 할아버지는 왜 자꾸 이러는 걸까?
업어 주겠다는 소리만 세 번째!
오늘 처음 본 사이인 건 그렇다 쳐도, 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깡마른 몸으로 뭘 업어 주겠다는 건지!
“놔둬요. 쟤는 고생 좀 해 봐야 해. 순례가 뭔 줄 알고 겁도 없이 나서, 나서길?”
스카는 내가 아니꼬운지 처음부터 쭉 저런 태도였다.
그런데 자꾸 부담스럽게 들이대는 노망 난 할아버지 릭보다야 차라리 스카 쪽이 나았다.
“리리스.”
아, 또 왜 부르는 거야.
“…….”
“쉬 마렵구나?”
못 들은 척 걷던 나는 흠칫했다.
내가 오줌 참고 있었던 건 대체 어떻게 알았지?
자꾸 주춤거리는 내 걸음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니고서야…?
“싸고 오자. 참으면 병나요. 할아버지가 같이 가 줄게.”
“…네에?!”
릭의 말에, 주변의 몇몇 사람과 후방의 호위 기사 두 명이 흠칫하며 우리를 힐끔거렸다.
이상하게 볼 만도 하지.
11살 귀족 아가씨에게 같이 쉬하러 가자 하는 노인이라니!
“괘, 괜찮아요. 안 마려워요.”
나는 이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 * *
리리스에게 경계를 넘어 의심까지 사기 시작한 두 노신관, 릭과 스카.
둘의 상상도 못 한 정체는 다름 아닌 에녹과 오스카였다!
물론, 리리스가 둘의 정체를 절대 눈치채지 못할 만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건 발생 네 시간 전.
에녹의 방.
“정말 키랑 이목구비도 바꿀 수 있단 말이야? 아예 다른 사람처럼? 그게 가능해?”
별 기대 없이 물었던 에녹은 무척 놀랐다.
정말 가능하다면 참 실용적이긴 하겠으나, 역시 악용의 여지도 꽤 있을 텐데….
하지만 일단, 오늘의 에녹에게는 꽤 유용할 것이다.
‘공주 앞에서 안 숨어도 되잖아!’
듣도 보도 못한, 존재하지도 않는 마법.
상식 밖의 상황을, 리리스는 절대 짐작 못 할 테니까!
애가 다리 아프면 안아 주고, 밤에 옆에 꼭 붙어서 지켜줄 수도 있다!
“나 알려 줘. 혹시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단 소리는 아니었지?”
“뭐래. 양성소 안 나왔어요?”
“…? 나왔지. 정규 교육 과정에 수록된 마법식은 다 외우고 있다고.”
“근데 왜 몰라?”
“그런 마법은 없었으니까?”
실용 마법은 원래도 가짓수가 많지 않지만, 개중에서도 알려진 변형 마법식은 모색이나 눈동자 색을 바꾸는 정도뿐이다.
“변형 마법이야 알지만….”
“……?”
오스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그거. 그 변형 마법식에 눈, 코, 입, 체형 좌표 추가하고 응용해서 구현하면 되잖아요.”
1+1이 2인 걸 왜 모르지? 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스카.
에녹은 그런 그를 멍하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멍청한 머린 아닌데.
얘랑 대화하다 보면 멍청해지는 기분이란 말이지.
“마탑주, 확실히 말해 두는데.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고, 보통 사람들은 당신처럼 생각하지 못해.”
“뭐래?”
“응용하면 되잖아? 하고 응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이목구비에 체형, 뭐 어쩌고…. 그런 것까지 뚝딱 바꿀 수 있으면 응용이 아니라 창조야, 창조.”
“빡대가린가?”
“아니야, 마탑주. 당신 수준에 못 미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빡…, 그런 취급 하면 안 돼. 내가 다 큰 어른 인성 교육까지 시켜야겠어?”
에녹이 오스카의 어깨를 딱 잡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미 나와 있는 수학 공식을 가지고 문제를 풀 순 있지. 하지만 자기가 아예 새로운 공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응?”
“아, 됐고. 모른다 이거죠? 자기 멍청하단 소릴 왜 이렇게 길게 말해?”
어휴, 저 싸가지. 에녹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오스카는 제 방인 양 에녹의 테이블에서 펜과 종이를 찾으며 말했다.
“변형 마법은 지속형이라 머릿속에 계속 구현 못 하면 쓸모없는데. 내가 그려주면 외울 수는 있고요?”
“외우는 건 잘해. 맡겨만 둬.”
에녹이 신나서 냉큼 말했다.
인성 좀 부족하면 어떠하리.
불편하게 미행이나 할 생각이었던 딸의 첫 여행에 합법적으로 동행할 수 있게 해 줄 구세주인 것을!
* * *
그렇게 두 남자는, 변형 마법의 숙지 외에도 짧은 시간 아주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리리스의 첫 여행에 따라붙은 것이었는데….
* * *
점심시간.
순례단은 멈춰서 빵과 주스를 나눠 받았다.
돗자리? 그런 거 없다.
그냥 길바닥에 앉아서 30분 동안 퍽퍽한 빵을 삼켜 내고 다시 출발이었다.
“체시어어!”
“리리스.”
휴식 때마다 나는 앞으로 달려갔고 체시어는 뒤로 달려와서 우리는 꼭 중간쯤 만났는데….
“힘들지.”
“죽겠으어어어….”
체시어 얼굴을 볼 때마다 울컥해서 눈물 날 것 같았다.
내 점심을 챙겨 온 체시어가 땅바닥의 돌을 쓱쓱 치우고 손수건 한 장을 깔아 줬다.
“앉아서 먹어.”
“으응.”
…오줌 마려운데.
타이밍을 놓친 나는, 식사부터 할 생각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가까운 곳에 앉은 릭이 보였다.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릭.
‘아, 진짜! 왜 저래, 정말?’
나는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맨 뒤에 있더니 또 언제 앞으로 왔지?
릭과 스카는 한시도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이제는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
“리리스.”
“으응?”
신경 쓰이는 노인 둘.
맛대가리 없는 빵.
터질 것 같은 오줌보.
최악의 컨디션에 인상을 찌푸리며 체시어를 보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왜?”
“이리 와.”
뭐지? 나는 들고 있던 빵과 주스를 손수건 위에 내려 두고 체시어를 따라갔다.
체시어는 길 옆에 난 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제법 깊이 들어온 그는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 이리저리 자란 잡풀들을 대충 쓱쓱 쳐 내고, 내게 휴지를 건넸다.
“볼일 봐.”
와.
어떻게 알았지? 귀신이다.
부끄러웠지만, 계속 참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소심하게 휴지를 받아들었다.
몇 걸음 멀어진 체시어가 내게 등을 보이고 뒤돌았다.
‘아아, 내 존엄성….’
다른 게 고난이 아니라, 이런 게 고난이구나.
나는 울고 싶어지는 마음을 꾹 참고 체시어에게 말했다.
“있잖아, 체시어….”
“응.”
“소, 소리 안 들리는 쪽까지 쫌만 더 가 주라….”
“…….”
멈칫한 체시어가 이내 몇 걸음 더 멀어져 줬고, 나는 비참하게 쪼그려 앉아 순례복 치마를 살짝 들쳤다.
정말이지….
‘아빠 보고 싶다.’
* * *
순례단의 취침 시간은 밤 11시, 기상 시간은 새벽 5시.
각자 배급해 주는 휴대용 천막을 받아서 펼치고 잔다.
가족 단위로 온 귀족들이나 같은 신전 사람들은 큰 천막을 펼쳐 함께 자리 잡았다.
나는 체시어 옆에 1인용 천막을 치고 자려고 했는데….
“혼자 자면 무섭지 않을까? 할아버지랑 같이 잘까?”
“히이이익!”
천막을 펼쳐 주는 체시어를 구경하는데 뒤에서 릭이 불쑥 말했다.
같이 자자고? 이건 진짜 선 넘었는데?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호다닥 달려가서 체시어의 뒤에 숨었다.
천막 치던 체시어도 황당한 릭의 말을 들었는지, 나를 막고 서서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살폈다.
“아아, 미안.”
그때 배급받은 천막을 옆구리에 끼고 다가온 스카가 릭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우리 주신관님이 노망이 나서 그런 거니 이해해.”
이내 릭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스카에게 끌려가 멀리서 천막을 펴기 시작했다.
아니, 멀다기에는 나와 너무도 지척인 곳….
“리리스.”
의심스러운 눈으로 둘을 살피고 있던 내게 체시어가 물었다.
“친해진 사람들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말은 제일 많이 해 봤어. 저 주신관 할아버지가 자꾸 나한테 말 걸거든. 나랑 친해지고 싶나 봐.”
“…….”
“나만 한 딸이 있대. 근데 그렇게 어린 딸이 있을 나이는 아니지 않아? 손녀를 잘못 말했나?”
심각하게 추리하고 있는데, 나를 안심시키려는지 체시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신전 소속은 신원이 다 보증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바로 옆에 있잖아. 호위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도 서.”
“아, 응! 걱정하는 건 아니야.”
오늘 모인 사람들은 원작에 나온 순례단 그대로일 테고, 원작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 * *
깊은 밤.
“쉬 마려….”
나는 오줌이 마려워서 중간에 깨고 말았다.
아직 고요한 밖.
얇은 천막 너머로 밝은 모닥불 빛이 일렁였다.
날이 밝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듯한데….
‘아아, 쌀 것 같은데.’
하루 사이 노상 방뇨에는 익숙해졌지만, 그게 깊은 밤 숲을 헤치고 들어가야 하는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밤인데 뭐가 튀어나올지 어찌 아는가.
오줌 누다 뱀에게 엉덩이를 물릴 수도 있고.
‘그냥 좀만 참고 아침에 싸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3초 만에 다시 떴다.
도저히 못 참겠다.
‘혼자는 무서우니까 체시어한테 같이 가 달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체시어는 내일 불침번이다. 그러니 오늘은 푹 자게 해 줘야 하는데….
‘어휴, 일단 나가 보자.’
나는 휴지를 챙겨 천막의 입구를 조금만 걷어 보았다.
그리고, 멈칫.
저 멀리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릭과 스카가 보였다.
“……마….”
“…는…….”
둘은 서로 얼굴을 붙이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작게 말하는 거라, 당연히 내용은 하나도 안 들렸다.
‘이 밤중에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거람?’
낮부터 느꼈지만 체력이 참 좋다.
수상한 할아버지들이 야심한 시각에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으니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무슨 작당 모의라도 하는 것 같잖아.
‘작당 모의?’
순간 든 생각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신실한 신관님들을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저 나이에 이 고된 순례길에 바득바득 오른 것도, 자꾸 나한테 말 걸고 옆에 붙으려고 하는 것도, 너무 수상했다.
촉이랄까?
나와 친해지려 한다기보다는….
‘감시당하는 느낌이었지.’
결국, 나는 팔찌를 봤다.
‘죄송해요, 신관님들. 사적인 얘기라면 듣고 바로 잊을게요. 오해도 이만 풀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써 본 적 없는 능력이지만….
‘저 대화 데시벨 내 귀에만 좀 키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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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엿듣는 데 생명력 1초.
가성비 최고.
곧, 둘의 대화가 내 귀에 선명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젠장. 여자로 할 걸 그랬어.”
릭의 첫 마디를 듣자마자 나는 흠칫 놀랐다.
여자로 할 걸 그랬다니, 대체 무슨 뜻이지?
그리고….
‘젠장이라고?’
내내 방긋방긋 상냥하던 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욕이라곤 모를 것 같은 할아버지였는데….
“당신은 여자가 좋아요? 하, 난 노인만 아니면 뭐든!”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스카.
나는 인신매매범 같은 두 사람의 대화에 멍해졌다.
“애가 경계가 너무 심하잖아.”
“아니, 대체 몰렉까지 가야 하는 이유가 뭔데? 그냥 이쯤 하고 애 들고 튀자고요.”
뭐라고?
“나도 바쁘고 당신도 할 일 많잖아요. 설마 2주 동안 이 짓거리를 계속 하겠다는 건 아니지? 모레 마을에 도착하면 내가 애 데리고 갈 테니 뒷수습은 알아서 해요.”
“미쳤어? 안 돼. 순례자 명단에 떡하니 루빈슈타인 공녀가 올라가 있는데 애가 갑자기 사라져 봐. 난리 나.”
거기까지 들은 순간.
‘마, 말도 안 돼!’
나는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