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는 짜증을 내며 계속 말했다.
“아, 몰라. 마을에 도착하면 바로 애 들고 튈 거야. 당신도 봤잖아요? 잘 걷지도 못하고 헉헉대고 상태 안 좋은 거.”
“…….”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조금이라도 체력 덜 빠졌을 때, 멀쩡할 때 데려가야지.”
맙소사….
멀쩡할 때 데려간다고?
나를?
대화의 내용이 인신매매나 납치의 목적임이 99% 정도 확실해지자, 내 눈앞은 새하얘졌다.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후우. 잠은 안 자요?”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 난 여기 있어야지.”
“호위들도 떡하니 있는데 무슨.”
“애 자다가 쉬 마려우면 나올 수도 있거든. 따라가야지.”
……!
나갔으면 큰일 날 뻔.
곧 쯧쯧, 혀를 찬 스카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듯했고 둘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결국, 그날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 *
새벽 5시.
기상한 순례단들이 분주히 다시 출발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체시어!”
날이 밝길 기다렸던 나는 곧바로 호위대장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뭐라고?”
수상한 두 노신관의 대화를 전부 일러바치자 체시어는 놀랐다.
그리고 급히 순례단 명부를 살폈다.
“…아르고니아 신전 소속. 둘 다 신분은 정상적으로 등록되어 있어. 출발 전에 신전 소속증도 제출했고.”
“신관님들을 사칭했을 확률은 없어? 초상화 같은 게 없어서 알아볼 수는 없지?”
“그런데, 그렇다기에는….”
체시어가 내 뒤쪽을 턱짓했다.
릭과 스카가 있었다.
“어머나, 아르고니아 신관님들도 오셨네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관님들 나이에는 고된 여정일 텐데요. 여전히 정정하고 신실하시네요.”
“홀홀홀, 오랜만입니다….”
릭이 다른 신전의 신관과 다정히 인사를 주고받는 게 보였다.
“전에 교류가 있던 신전 사람들은 저 두 신관 얼굴을 아는 눈치야.”
“…그러네.”
신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역시, 내 오해일까?
아니!
“으으, 체시어. 아무리 생각해도 오해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를 ‘들고 튄다’라든가, ‘마을에 도착하면 데려가겠다’라든가.
이 대화가 달리 해석될 여지가 대체 어디 있느냐고!
고뇌하는데,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로 체시어가 일어났다.
“왜, 왜? 뭐 하려고?”
“심문해 보게.”
“잠깐만!”
“신분이 확실하다고 해서 범죄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야. 네가 들은 대로라면, 저 신관들은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치만 지금 대놓고 털면 안 돼. 내가 엿들은 대화 빼곤 딱히 증거도 없고, 호위대가 갑자기 신관을 심문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불안해할 거야.”
“그럼 저걸 그대로 둬?”
“그러니까 지금 말고….”
나는 체시어의 귀에 속닥거렸다.
* * *
휴식 시간.
리리스는 어김없이 체시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에녹은 지척에서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슬쩍, 쳐다보기에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더니.
‘어이쿠, 우리 공주. 경계가 아주….’
질겁하며 호다닥 눈을 피한다.
에녹은 그럼에도 흐뭇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딸을 구경했다.
‘우리 공주, 열심이네.’
리리스는 휴식 때마다 뭔가를 꼭 했다.
순례단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핀 다음, 오른쪽 손목에 찬 팔찌를 보고, 들고 있는 종이에 끼적끼적.
에녹은 그걸 보고 짐작했다.
‘순례단 중에 앓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는 건가.’
리리스의 최종 목표는 몰렉 마을 사람들의 전염병을 해결하는 것.
딸은 최대한 능력 쓰는 것을 자제하고, 할 수 있다면 전염병의 원인을 파악해 보고 싶다고 했었다.
‘우리 공주, 정말….’
새삼 대견스러워 울컥하는데, 옆에 있던 오스카가 불안한 듯 손톱을 딱딱 물어뜯는 게 보였다.
“자꾸 팔찌 보는 거 더럽게 신경 쓰이네. 저거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에녹은 흠칫했다.
‘공주가 몰렉에 왜 가려는지 알게 되면, 마탑주 난리 나겠지?’
오스카는 리리스가 능력 쓰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정확히는 ‘남들 살리는’ 데에 생명력을 소모하는 것을.
딸은, 어차피 남들처럼 성장하려면 무조건 능력을 써야 했지만….
“미쳤냐고!!! 너, 또야? 내가 그딴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애 데리고 평민들 있는 쪽에 가지 말랬잖아요!!! 내가 거기 다 불 질러 놔야 그만하겠어?!!!”
오스카는 그럴 때마다 눈이 뒤집혀서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그는, 리리스에게 절대 자기 능력으로 남을 돕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차피 능력을 써야 한다고 반박하면, 그냥 허공에 태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인성이 나빠서는 아니다.
자기희생에 익숙해지는 리리스를 경계하는 거였지.
‘나도 그 점은 걱정스럽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억지로 생명을 태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그때라고 리리스가 제 능력으로 살릴 수 있는 이들을 외면할까?
지금이야 딸의 선택을 존중하고 있지만, 에녹도 적잖이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내일 마을에 도착하면 내가 애 데리고 간다고 했어요.”
오스카가 말하자, 에녹이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그러지 말라니까? 그럼 뒷수습은 어떻게 하라고?”
“알아보니까, 아프거나 하면 중도 포기 가능해요.”
“…아, 그래? 아니, 그래도 안 돼. 공주 생각을 존중해야지. 내가 여기 왜 보낸 건데….”
얼버무리는 에녹에, 오스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굳이 몰렉까지 가야 하는 이유, 있죠? 계속 대답 피할 거예요?”
에녹은 슬쩍 눈을 피했다.
그가 몇 번이고 대답을 피했기에 오스카는 당연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혼자 가겠다던 에녹을, 오스카가 바득바득 따라온 것도 그래서였다.
“하아, 됐고. 내일 저녁까지밖에 못 기다리는 이유가 있어요.”
“응? 무슨 소리야?”
“나 그때쯤이면 마나 바닥나.”
“바닥난다니? 왜?”
에녹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 가성비 떨어지는 변형 마법 계속 쓰고 있잖아요. 당신이야 더 오래 버틸 수 있겠지만, 나는 내일 저녁이면 마나 다 떨어진다고요.”
“뭐라고?”
에녹이 입을 떡 벌렸다.
“마나는 다시 차잖아…?”
“아니, 누가 마나 다시 차는 거 몰라요? 회복되는 속도보다 이 마법 유지하느라 떨어지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니까 하는 말이지!”
설명해 주는 말에도 에녹은 의아해하며, 제 심장 쪽의 코어에 집중해 남은 마나를 가늠해 봤다.
“오, 이런.”
그리고 놀랐다.
“미안한데, 나 정말 몰랐어. 이게 그렇게 가성비 떨어지는 마법인 줄도 몰랐다.”
“바본가? 그런 것도 못 느껴요?”
“못 느낄 만도….”
에녹이 어색하게 웃었다.
“…난 지금 마나 쓰는 속도보다 차는 속도가 더 빠른데?”
“……?”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짜 미친 인간이네….”
“아니, 무슨 마탑주가 사흘밖에 못 버텨?”
속닥이는 에녹의 말에 오스카가 발끈했다.
“가성비 떨어지는 마법이라고! 괴물 같은 당신 기준으로만 생각하지 말라고요!”
“바로 그거야! 자기 기준에서만 생각하면 안 돼. 이제 내 맘 알겠지? 다른 사람들 멍청하다고 무시하지 않기다?”
“하아.”
오스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 쉬었다.
에녹은 그런 그를 보며 고민했다.
‘그나저나 내일 저녁까지라니, 이거 어떡하지? 큰일이네.’
리리스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오스카에게도 말해 줘야 한다.
오스카는….
아이를 걱정할 자격도, 자신이 해야 할 자식 교육에 참견할 자격도 충분하니까.
오스카의 희생을 알게 된 후부터, 에녹은 계속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윽고 에녹이 조용히 속삭였다.
“마을에 도착하면 내가, 우리 신전 부신관은 중도 포기한다고 말하러 갈게. 당신은 리리스한테 가서 사실대로 말한 다음에….”
* * *
성지 순례, 3일 차 저녁.
예정대로 순례단은 첫 숙박지인 라고다 영지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여관을 통째로 빌려 묵기로 한 순례단은 건물 입구에서 숙소 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가 어디 있지?’
그 사이에서, 오스카는 리리스를 찾고 있었다.
에녹은 관리 신관에게 오스카의 중도 포기를 말하러 갔고….
“…왜 몰렉까지 가려 하는지 직접 들어 보고, 애 의견을 존중해 줘. 계속 가고 싶다고 하면 그만두라고 강요하지는 말아 줬으면 해.”
오스카는 에녹이 말한 대로 리리스와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젠장,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오스카는 초조했다.
생각보다 마을에 늦게 도착한지라 마나가 거의 바닥이었다.
‘아, 저기 있네.’
리리스의 하얀 뒤통수를 찾아낸 오스카가 손을 뻗으려는데.
“……?”
누군가의 단단한 손이 그보다 먼저 오스카의 팔을 휘어잡았다.
체시어였다.
“…뭐야?”
체시어는 오스카를 날카롭게 노려보더니 조용히 그를 데리고 근처로 빠져나왔다.
“이거 안 놔? 지금 뭐 하는….”
그리고는 두 명의 호위 기사에게 오스카를 인계했다.
“절대 소란 피우지 말고, 내가 갈 때까지 잘 감시하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체시어의 명령에, 두 호위가 신속하게 오스카를 잡아끌었다.
* * *
쾅―!
문이 닫히고, 무표정한 호위 둘이 그 앞을 떡하니 막고 섰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순례단의 숙소 오른편, 다른 여관.
거기서도 맨 꼭대기에 있는 방까지 끌려온 오스카는 황당했다.
“오, 부신관! 나 데리러 온 거야?”
아무래도 먼저 잡혀 있었던 듯한 에녹이 반갑게 다가왔다.
“…아뇨. 나도 잡혔어요.”
“뭐?”
에녹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는 곧 호위들에게 부탁했다.
“잠깐만 나가게 해 줘.”
“그럴 수 없습니다. 호위대장님의 명에 따라, 아르고니아의 두 신관께서는 이곳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호위대장님이랑 따로 얘기해 보겠네.”
“예, 기다리십시오. 호위대장님은 순례단의 숙소 배정을 도우신 뒤에 곧 여기로 오실 겁니다.”
에녹이 초조한 듯 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숙소 배정이 거의 끝난 듯, 밖에 보이는 순례단은 몇 없었다.
체시어는 금방 올 것 같긴 한데, 문제는….
“대체 뭔 일이에요?”
오스카가 속삭였다.
“몰라. 나도 다짜고짜 잡혀 왔어. 의심 가는 부분이 있다고 체시어가 날 심문하겠다는데?”
“…? 뭐 걸릴 게 있어요? 준비는 철저히 해 놓고 왔는데.”
“내 말이! 아니, 그보다.”
에녹이 침을 꿀꺽 삼키고 한껏 더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얼마나 남았어?”
곧 오스카의 마나가 동날 거다.
그게 문제다.
낯선 호위들이 떡하니 버티고 선 와중에 마법이 풀려 버리면….
“10분 정도.”
오스카의 말에 에녹이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