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적이 이리 무서울 때가 또 있었던가?
오스카는 노신관 릭, 아니, 에녹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나는 되도록 안 걸리고 조용히 갔다 오고 싶어. 걸리면 공주가 엄청나게 화낼 거야.”
…안 걸릴 생각이 있긴 한 거야?
물론 생각 없이 행동했다고 탓하기엔, 에녹은 당황하고 있었다.
여기 리리스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골목 밖을 지나가다 어째 상태가 위험해 보이는 남자를 보고 본능적으로 따라왔을 거다.
“그…. 아하하, 아니구나. 홀홀홀! 운동을… 운동을 열심히 했더니 이런 데서 도움이 되네!”
에녹은 해맑게 변명했고, 오스카는 도저히 못 보겠는 그 모습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다, 힐끔.
리리스의 눈치를 봤다.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빡, 깜빡.
가만히 에녹을 쳐다보다, 이내 옆에 있는 오스카를 올려다봤다.
‘젠장, 이거 백 퍼센트 눈치챘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더 무서워!
리리스는 조용히 제 손목을 들어 팔찌를 보았다.
아이는, 뭔가 확인하고 있었다!
오스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에녹이라고 짐작했다면, 저 팔찌로 정체를 확인할 방법은 많다.
저 노인 조종하는 데 몇 년 들지?
―라고만 물어도 떡하니 282년!
에녹밖에 안 뜨는 수치가 나올 텐데, 어떻게 안 걸리겠나.
“하아.”
이내 리리스는 쬐끄만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아빠는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얼굴을 가린 손 틈 사이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공주야….”
돌아온 숙소.
아빠와 오스카는 의자를 가져다 두고 나란히 내 앞에 앉아있었다.
“화 많이 났어?”
내 눈치를 보는 아빠.
“…….”
다리 꼬고 팔짱 끼고, 자기는 잘못 없다는 듯 고개를 튼 오스카.
“공주야? 왜 말이 없어…? 무섭게….”
침대에 앉은 내가 대답이 없자, 아빠는 SOS라도 치려는지 뒤를 힐끔 돌아봤다.
벽에 기대어선 체시어가 보였다.
‘참, 나. 체시어가 편이라도 들어줄 줄 아나?’
쟤도 나만큼 짜증이 났을 거다.
뒷수습을 혼자 다 했으니까.
우왕좌왕하던 호위들 일일이 찾아다니며 오해가 있었다고 변명해….
아빠와 오스카가 본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 숙소도 따로 옮겨….
‘내 짐은 그냥 옆의 숙소에 놔뒀어도 됐는데!’
딱 하나는 마음에 안 든다.
아빠랑 자라고, 내 짐을 여기에 옮겨 놓은 것!
앞으로 3일 정도는 아빠 얼굴을 보기 싫은데 말이다!
“저한테만이라도 말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리리스가 많이 무서워하기도 했고….”
체시어는 오스카의 피 묻은 옷을 보며 덧붙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기도 했고요. 미리 알려 주셨으면 오해가 없었을 거예요.”
착한 체시어는 아빠 편 안 들어주겠다는 소리를 길게도 돌려 말했다.
‘뭘 잘했다고 절 보십니까?’ 하고 쏘아붙여 줘도 됐을 텐데.
“그렇지…. 내가 다 잘못했지….”
“아오, 답답해.”
그때, 오스카가 자기 머리를 헤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난 잘못 없다. 네 아빠 다 혼내면 내 방으로 와라.”
“아니, 마탑주? 당신은 잘못 없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같이 와 놓고? 기다려! 잠깐! 기다…!”
쾅!
오스카가 매정하게 방을 나서자 아빠가 그를 향해 뻗었던 손을 슬쩍 내리며 다시 내 눈치를 봤다.
“아빠.”
“으응.”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아니야.”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공주 못 믿어서 따라온 거 아냐. 이건 아빠 잘못이지. 왜냐면, 아빠는 공주가 고생하는 거 싫어서…. 위험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고….”
“평생 고생도 안 하고, 평생 옆에 아빠가 붙어 있고, 그럴 수 없잖아. 나도 언젠가는 아빠 없이 혼자 이것저것 하고 고생도 하게 될 텐데….”
“…….”
“그때마다 아빠가 다 해 주는 거에 익숙해져서, 나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가 되면 어떡해.”
아빠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느끼는 게 있는지, 입을 모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공주 말이 맞아.”
나는 묘한 표정의 아빠를 한참 보다 한숨 쉬었다.
“아니, 그리구! 스승님은 왜 데려왔어? 들어 보니까 변신 2주 동안 유지도 못 하는 것 같은데!”
“마탑주는 아마 처음부터 순례길 끝까지 따라갈 생각 아니었을 거야. 나보다 더 널 걱정했으니까. 지금도 머릿속에 너 데리고 집에 돌아갈 생각밖에 없는걸.”
“하아.”
나는 뺨을 붙잡아 내렸다.
그래, 오스카….
아빠도 아빠지만, 당장 오스카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가 다른 생각 하느라 못 들었다는 사정을, 다시 설명해야 했으니까.
“잠깐 기다려 줘.”
나는 일어났다.
“나 일단 스승님이랑 대화 좀 하고 올게.”
* * *
리리스는 오스카가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들어왔다.
척, 팔짱을 낀 채 오스카는 다른 말 없이 눈으로 얘기했다.
이제 말해 봐.
“…곧 몰렉에 전염병이 돌아요. 마을 사람들이 다 죽을 거라, 해결하러 가요.”
“응,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오스카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대번에 무섭도록 표정을 굳히고는, 성큼 다가와서 리리스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나 이동 마법 쓸 수 있을 만큼 마나 차니까, 바로 집에 가.”
“안 돼요. 저 몰렉까지 가야 해요.”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아?”
“4년 전에 저 성열에 들었을 때 깨워 주려고, 아빠랑 찾아오셨던 심장 모양 성물 기억하세요?”
“…….”
“그게 좀 특별한 성물이었던 것 같아요. 성서에 보니까, 그 성물을 삼킨 사람은 남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나 봐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뒤질 운명 네가 바꿔 주겠다는 거야?”
“네.”
“네가 왜 그런 걸 하는데?”
이를 악문 오스카가 무섭게 덧붙였다.
“그럼, 네가 아는 죽을 운명인 놈들 하나하나 찾아가서 살리겠다는 거야? 네 수명 깎아 가면서?”
리리스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오스카는 이를 갈며 비아냥거렸다.
“내가 이래서 사사건건 너 하는 일에 훼방 놨던 거야.”
“…….”
“네가 신이라도 된 것 같지? 네 수명 조금이면 다 죽어가던 놈들도 살아나니까 좋아 죽겠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지?”
“…….”
“너, 신 아니야. 너도 언젠가는 죽어. 이딴 짓 하면 할수록, 더 빨리 죽어.”
“알아요.”
“안다고만 하면 다야? 알면 해도 돼? 얼굴도 모르는 인간들 죽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놀고 싶으면 놀고,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어. 억지로 생명력 태우면서, 숨죽이면서 사는 것도 금방 끝나. 네 아빠가 황제 놈 죽일 때까지만이야.”
내가 왜 너를 살렸는데.
남들처럼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해 보라고.
오래오래 살아 보라고.
그걸 바랐는데.
“죽는 게 걔들 운명이면 그냥 죽게 놔둬. 아무것도 하지 마. 누구도 너한테 희생하라고 강요한 적 없어.”
“희생 아니에요. 저 이번에 몰렉에 가는 거, 그렇게 대단한 이유나 대의 때문이 아니에요.”
리리스는 고개를 젓고 덧붙였다.
“제가 그 성물을 먹어서 확실히 사람들 운명을 바꿀 수 있게 됐는지 확인할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성물의 힘을 쓸 수 있는지, 만약 방법이 있으면 알아봐야 해요.”
“하, 지금 너 나랑 말장난하냐? 같은 말이잖아! 오히려 확신하게 되면, 앞으로 더 신나서 사람들 살리고 다니겠지!”
“아니에요. 같은 말 아니에요.”
리리스는 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하려다, 멈칫.
“…금제 무서우니까 함부로 대답하지 마세요.”
오스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도 리리스는 회귀에 대해 말하려는 모양이었다.
“스승님이 마법을 썼잖아요. 그럼 분명히 대가가 있을 거고요.”
“…….”
“죽은 사람 살리는 부활 마법도, 쓰는 사람 목숨이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스승님이 쓴 마법도….”
오스카는 리리스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깨달았다.
아이는 자신이 회귀 마법을 쓴 걸 알고 있다. 그 대가를 걱정하는 거다.
다행히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는 눈치지만….
“저는 항상 스승님을 걱정하고 있어요. 스승님이 어떻게든 살아 줬으면 하니까…. 그러니까 저는 꼭 방법을 찾을 거예요.”
“야.”
오스카가 웃었다.
그리고 거짓말했다.
“내가 죽냐? 나 안 죽어. 혼자 왜 이렇게 심각하지?”
“…….”
“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내가 누굴 부활시켰냐? 딱 봐도 죽은 놈 살리는 게 제일 힘들고 대가도 크지 않겠어?”
“…….”
“말 못 하는 게 끝이야. 그러니까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
리리스는 안심하라는 듯 웃는 오스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회귀의 대가가, 고작 미래를 발설 못 하는 금제가 전부라고 말한다.
리리스는 울컥했다.
내가 모르는 줄 알고, 거짓말을….
“나 때문인 거라면, 몰렉에 안 가도 돼. 집에 가자.”
오스카는 리리스의 두 손을 모아 잡고,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으며 눈을 맞췄다.
“밥도 맛없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고생만 하잖아. 10분만 참아. 집에 보내줄게.”
“스승님.”
“왜.”
“저는 스승님한테 뭐예요?”
“뭐?”
“저라는 사람이… 스승님한테 무슨 의미예요?”
오스카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멍해졌다.
의미?
네가 내게, 어떤 의미냐고?
아이의 질문에, 오스카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네가 나한테 뭘까.’
사라진 시간 속….
회귀 전의 오스카 마뉘엘에게….
삶은, 무료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딱히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다.
남들은 근사한 걸 보면 즐거워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하고….
또, 뭔가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가는데….
그래서일까?
한편으로는 황제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삶의 목적이 명확한 인간이라서.
욕망이 있고, 목표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라서.
“나한테, 너…?”
그러다 오스카는 아이를 만났다.
리리스.
황제의 꼭두각시.
남들처럼 욕망이 있어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이.
작은 안쓰러움에서 시작된 감정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오스카의 가슴을 채웠다.
항상 같은 곳에서 매일 나를 기다리는 존재.
내가 없으면 외로울 존재.
나뿐이었던 존재.
너로 인해 삶에 목표가 생겼다.
오스카는, 끝내 자유로워진 아이가 보고 싶었다.
바람대로 아빠랑 행복하게 사는 것도 보고 싶었다.
나의…… 살아 숨 쉬는 대부분의 순간에 존재했던 너.
아이를 향한 감정은 아마 사랑이라고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너는….”
오스카는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남은 6년의 시간.
다른 삶의 목표가 생길 수도 없을 만큼, 깔끔하리만치 짧은 시간.
그동안 자신은, 모든 걸 바쳐서 되살린 아이를….
지켜주면 된다.
그리고 행복하게 자라는 걸 볼 수만 있으면….
그거면 된다.
“너는, 내가… 사는 이유야.”
그는 그렇게 무심코, 진심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