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사는 이유야.
“…….”
툭 튀어나온 고백에, 리리스는 묘한 표정으로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아, 잠깐.”
오스카가 이마를 짚으며 웃었다.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리겠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사랑해서?”
다시 만났을 즈음에 했던 대답도 그렇고.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째 매번 모호하게 들리겠다, 싶었다.
“이건 그런 뜻이 아니고….”
“저도예요.”
“뭐?”
“제 삶의 이유도 스승님이에요.”
리리스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스승님은 제가 아빠만큼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꼭, 죽을 때까지 같이 행복할 거예요.”
“…….”
“만약 스승님이 죽기라도 하면요.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면요.”
리리스는 눈을 똑바로 맞춰 오며 덧붙였다.
“그럼 저도 따라갈래요.”
“뭐?”
순간, 오스카는 흠칫했다.
“뭔 개소리….”
“그냥 하는 말 아니고, 정말 진심이에요.”
거듭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오스카는 리리스의 말에 흔들렸다.
아이는 이미 한 번, 고민도 없이 제 아버지를 위해 죽음까지 결심했었다.
‘아니, 그건 지 아빠고….’
나는 왜?
내가 너한테 뭔데?
기껏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라고 내 목숨까지 바쳐 키워 놨더니?
아니겠지?
아니, 그런데 혹시라도.
정말 그러면 어떡해?
“너, 너… 미쳤냐? 너 죽으면 네 아빠는 어쩌라고?”
“슬프겠죠? 그렇지만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는 죽고 난 후니까. 남은 사람이 슬퍼하는 거, 알 수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아요.”
“와, 너.”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진심인가?
대체 애가 왜 이런 말을….
“말, 개같이 하지.”
이내 화가 난 오스카가 떨며, 퍽 매섭게 읊조렸다.
그러나 리리스는 무서워하지도 않고 말했다.
“개같이 말하는 거 듣기 싫으시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스승님 오래오래 살면 돼요. 스승님의 삶의 목표가 제가 아니라, 스승님이면 돼요. 죽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생각을 하시면 돼요.”
“…….”
오스카는 멍해졌다.
아이는 꼭, 뭔가를 다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스승님이 없는 세상에서 제가 무슨 선택을 할지 걱정되시면 절대 죽지 마세요. 죽으면 그만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리리스는 멍해진 오스카의 목을 잡고 안겨 왔다.
“다 스승님을 위해서예요. 그래도 말리시면… 저는 스승님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집에 갈게요.”
그리고는 살가운 행동과 다르게 귓가에 무서운 말을 속삭였다.
“제가 스승님을 도울 수 없어서 스승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
“…그래도 괜찮아요. 지옥에서 바로 다시 만나면 되니까요.”
“이, 미친….”
“안녕히 주무세요.”
아이는 충격받은 오스카를 두고 방을 나가 버렸다.
* * *
“…스승님한테는 충격 요법이 필요했어.”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았을까.”
체시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나무랐다.
역지사지 좀 해 보라고 오스카에게 무서운 말을 하고 돌아온 얘기를 털어놓은 참이었다.
“그럼 어떡해…. 내 수명 1초라도 닳는 건 싫어서 벌벌 떨면서, 자기 죽는 건 신경도 안 쓰는 사람 어떻게 정신 차리게 해….”
“그렇지만 네 목숨 가지고 마탑주님을 협박한 거잖아.”
“…….”
전부터 느꼈던 건데, 얘는 참….
말수는 없는데 와중에 할 말은 다 하는 스타일 같다.
그래서 조금 찔렸다. 나도 그 점은 좀 비겁했다고 생각하니까.
“그치만, 다른 방법이 생각이 안 났어. 이제 스승님도 뭔가 느끼는 게 있겠지. 자기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구나, 싶으니까 악착같이 살려 하지 않을까?”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그것보다 너, 내 짐 왜 여기로 가져왔어? 나 아빠랑 안 잘 건데. 아빠랑 3일 동안은 말 안 할 거야.”
“아, 공작님이 네가 옆에 있어야 안심하실 테니까.”
“……?”
그러니까 날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 때문이란 말인가?
“와, 체시어.”
“…….”
“이런 질문 유치할 수도 있는데 혹시 아빠야, 나야?”
체시어는 멈칫했다가 이내 웃었다.
“너.”
“그런데 왜? 너 설마 이번에 아빠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공작님의 마음은 이해해.”
“엥. 이걸 이해한다고? 정말? 할 일도 많은 사람이 노인 분장까지 하면서 따라온 걸?”
“응. 난 아직 자식을 안 낳아 봐서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도.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까 공작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
“…….”
“딸이잖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게다가 아직 어리기도 한데, 또.”
체시어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작게 웃고는 천천히 덧붙였다.
“너는 너무 예쁘고 작으니까.”
“…….”
“지켜주고 싶을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는 것도 못 미더울 거고. 네가 더 자라도, 아무리 강해도…. 공작님 마음은 항상 같을걸.”
곧, 체시어는 부끄러운지 자기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내가 나중에 너 같은 딸이 생긴다면… 공작님처럼 하지 않을까.”
아빠가 된 체시어?
그런데 이제 제임스 씨처럼 주접떠는?
상상이 안 돼서 대답을 머뭇거리는데 체시어가 말했다.
“실은, 더할 것 같기도 해. 그래서 바로 공작님 마음이 이해가 됐어.”
“글쎄…. 너는 아닐걸….”
“그러니까 마음 풀어. 솔직히 공작님이 순례길 끝까지 같이 가 주시면 나는 좋아. 너 힘든데 내가 챙겨줄 수도 없잖아.”
아빠랑 화해하라고 설득하는 체시어의 말에, 나는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렇게 쉽게 풀면 안 돼. 이러다 나 나중에 신혼여행 갈 때도 아빠가 따라오면 어떡해?”
“…….”
“알겠어. 3일까지는 좀 아닌 것 같아. 네 얼굴 봐서 참을게. 하지만 오늘은 진짜 안 돼. 오늘까지는 내가 화난 걸 보여 줄 거야.”
* * *
“저도 따라갈래요.”
“스승님이 없는 세상에서 제가 무슨 선택을 할지 걱정되시면 절대 죽지 마세요.”
오스카는 리리스의 말을 곱씹어 보며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건 협박이었다.
‘영악한 기집애….’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는 협박.
오스카에게 자신의 의미가 무척 크다는 걸, 아주 잘 알고 하는 협박.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오스카는 리리스의 말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내가 정말 너한테 그 정도로 큰 의미가 되어 버린 거라면….
“…자?”
“깜짝아, 이씨!”
침대에 누워있는데, 에녹이 젖은 머리로 빼꼼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예요?”
“방이 없어….”
“뭐?”
“공주가 내일 저녁까지는 나랑 말 안 한대. 그래서 오늘 혼자 자겠대.”
에녹은 베개까지 가지고 터덜터덜 들어와 누워있는 오스카를 밀었다.
“옆으로 좀 가 봐.”
“아니, 장난하나?”
오스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 없으면 딴 방에 가!”
“이 층에 방 두 개뿐이잖아.”
체시어는 에녹과 오스카가 마음 편히 마법을 풀고 잘 수 있게 숙소 꼭대기 층을 내주었다.
“아래층은 다 차기도 했고 호위들이 묵고 있어. 나도 오늘은 마법 풀고 편히 좀 자 보자.”
“그럼 바닥에서 자요! 아니, 밖에 나가! 복도에서 자!”
“너무하네. 다 씻었는데 저 더러운 바닥에서 어떻게 자. 침대도 넓은데 남자끼리 유난 떨지 말자.”
에녹은 오스카를 무시하고 누워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와, 짜증 나. 이 미친 인간.
결국, 오스카는 이를 갈며 돌아누웠다.
“…….”
눈을 감았는데 잠은 안 오고….
또 영악한 기집애의 무서운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괜찮아요. 지옥에서 바로 다시 만나면 되니까요.”
“아오, 씨!”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
죽는 게 쉬워?
“저기요.”
“응.”
자는 줄 알았는데, 에녹에게서는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오스카는 그 언젠가 에녹에게 했던 적이 있는 질문을 또 던졌다.
“애 대신 죽을 수 있어요?”
“응.”
역시, 고민도 없이 나오는 대답.
오스카가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아, 좀! 1초라도 고민을 해 보고 말하면 안 돼요?”
“그게 고민할 질문인가.”
오스카는 똑 닮은 부녀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넌 아빠 대신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
“네, 머.”
이게 말뿐인 게 아니라는 점이 제일 무섭다.
에녹은 실제로 딸 대신 죽었고, 리리스는 아빠 대신 죽으려던 걸 겨우 말렸으니까.
“정신 좀 차려요. 아빠가 자기 대신 죽으면 애가 좋아할까? 당신이 딸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걔 그렇게 정신력 강한 애 아니에요.”
오스카가 쯧쯧 혀를 찼다.
“아빠가 나 살려 줬으니까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마음 다잡을 애 아니라고. 따라 죽었으면 죽었지.”
“…알아. 그러니까 절대 그런 일이 안 생기게 해야지. 공주도 지키고, 나도 악착같이 살 거야. 요즘은 예전이랑 달리 전쟁터에서 몸 사리면서 일하고 있어.”
에녹은 환하게 웃었다.
행복해 보인다.
아마 딸을 생각하고 있겠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간절한 사이.
남들은 절대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유대를 느낄 때면, 오스카는 그게 좋아 보이면서도 내심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해? 공주가 당신 대신 죽기라도 하겠대? 아니면 따라가겠다든가?”
…눈치 무슨 일이야?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아뇨? 뭔 개소리야. 걔가 그런 말을 왜 해요. 내가 뭐라고.”
“…….”
오스카는 묘한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하는 에녹의 눈치를 봤다.
서운할 거다.
진심이든 아니든, 애가 그런 말을 한 걸 알면….
“아니, 내 말은.”
오스카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해가 안 돼서 그러지. 당신도 당신 인생이 있잖아요. 그런데 애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쉽게 드나?”
“웃긴 질문을 하네.”
에녹이 피식 웃었다.
이해가 안 된다니.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왜냐면 애가 내 세상이고, 전부니까.”
그는 새삼, 아이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있지. 리리스가 막 태어났을 때는, 엄청 신기했다? 나랑 똑같이 생긴 작은 아기가 숨도 쉬고, 눈도 깜빡이고, 웃는 게….”
“…….”
“되게 작고, 약해. 그리고 내가, 세상에 태어나게 했어. 그걸 생각하면 처음에는 책임감이 생겨. 아, 내가 지켜줘야 하겠구나.”
에녹의 눈이 깊어졌다.
“리리스는 말이 늦게 트였는데, 한 번 트이니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은 궁금한 걸 물어봤지. 아빠, 이건 뭐야? 저건 뭐야?”
“…….”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이의 세상은 비어있거든. 그럼 내가 가르쳐 줘. 이건 꽃이고, 저건 달이야.”
그 말에, 오스카는 떠올렸다.
세상을 잃고 갇혀버린 아이에게 처음부터 하나하나, 모든 걸 가르쳐줬던 자신을.
“내가 이걸 달이고, 저걸 꽃이라고 했으면 리리스는 반대로 알았겠지. 그게, 뭐라 해야 할까? 내가… 아이의 세상을 만들어 주는 느낌이었어.”
“…….”
“아직 아이에게는 나밖에 없고, 내가 전부고,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만 알아 가니까.”
에녹이 오스카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아, 이 애의 세상은 나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에, 너무 소중해져서, 내 전부가 돼.”
전부….
그래, 맞다.
“그때부터 내 세상은 아이로만 다 채워졌어. 정말,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장 큰 의미야.”
오스카는 지금 에녹이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똑같이, 자신의 세상이 그 아이 하나로 가득 차는 경험을 해 봤으니까.
“그리고 아마 당신도… 공주에게 큰 의미일 거야. 나는 모르는 많은 기억이 있을 테니까.”
에녹이 웃었다.
오스카는 그 말에, 차마 에녹의 눈을 보지 못하고 돌아누웠다.
머릿속이 혼란했다.
“다 스승님을 위해서예요.”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던 아이의 말.
오스카는 그것이 괴롭고 걱정스럽고 초조하면서도….
“스승님은 제가 아빠만큼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꼭, 죽을 때까지 같이 행복할 거예요.”
한편으로는 아이에게 제 의미가 그렇게나 커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찼다.
우스울 만큼 모순된 감정이었다.
“난 리리스를 믿어. 그 애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야. 그리고, 나도.”
방법….
그런 게 있었으면, 누구보다 내가 먼저 알아냈을 거야.
감히 신의 권능을 넘본 마법을 쓰고서,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다.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꼭, 흐린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막막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이 살아있는 미래 따위 그려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러니까, 살아남자.”
힘주어 말하는 에녹의 목소리에 오스카는 입술을 물었다.
“꼭, 같이 살아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