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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68)화 (169/261)

* * *

이튿날.

다시 출발할 채비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난 맞은편 방에서 나온 오스카와 맞닥뜨렸다.

왜인지 그는 노인 행색이었다.

‘앗, 이건? 나 계속 가도 된다는 허락이겠지?’

좋아서 말을 걸려는데―

“스승…!”

“…….”

오스카는 차가운 눈으로 날 일별하곤 휙 지나쳐 가 버렸다.

멍하니 서 있는데, 나와 오스카의 싸한 분위기를 못 읽었는지 아빠가 웃으며 다가왔다.

“공주, 잘 잤어?”

“…….”

“공주야아…. 진짜 오늘 저녁까지 아빠랑 말 안 하게?”

“…아니야. 말할게….”

나는 오스카가 사라진 계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 * *

순례는 재개되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걷고, 노숙하고, 마을이 나오면 묵고, 또다시 걸었다.

“홀홀홀…. 우리 리리스, 힘들어 보이는데 10분만 업힐까?”

“…….”

“5분?”

“…5분만이요.”

“어이쿠, 좋아요.”

수상한 두 노신관은 호위대장의 과한 편애에 힘입어 계속 동행 중.

오스카는 가성비 떨어진다는 변형 마법을 걱정 없이 쓰고 있었다.

휴식, 노숙, 취침….

짬 날 때마다 본모습으로 마나를 채울 수 있게 체시어가 그를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스카 할아버지, 당 떨어지니까 이거 하나 드세요.”

“싫어. 치워.”

초콜릿을 까서 내밀자, 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오스카.

벌써 나흘째.

나한테는 눈길도 안 준다.

스승님 죽으면 따라간다는 나의 충격 발언 이후, 그는 계속 화가 나 있었다.

이제 우리가 일방적인 냉전 중인 걸 아빠도, 체시어도 다 안다.

“사람 참, 까칠하긴. 리리스, 할아버지 주세요. 할아버지 당 떨어졌으니까 먹을게. 아아.”

결국 나는, 나를 업고 있는 아빠 입에 초콜릿을 넣어 줬다.

오스카는 끝내 몰렉까지 가겠다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걱정은 되는지 귀찮게 마나를 쓰고 채우고 반복하는 짓을 감수하면서도 따라오고 있지만….

‘아직 그때 내 말을 용서할 수는 없다는 거겠지?’

나한테 화는 좀 더 내려는 모양.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 말도 안 해 본 적은 처음인데….

“와, 다들 고생하셨어요! 여기가 몰렉 마을 초입입니다!”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 * *

몰렉에 사는 이들은 50명 남짓.

마을 사람들은 전부 소박하고 맘씨 좋아 보였다.

마지막 일정 하나만 남겨 둔 순례단은 곧바로 휴식을 취했다.

‘순례단 중에는 병에 걸린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럼 역시 몰렉 마을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다 죽어 버린 건 우연인 건가….’

나는 생각하며 열심히 걸었다.

체시어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고 나온 길이었다.

휴식하는 대신, 마을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순례단 사람들 몇과 함께.

“이쪽으로 더 들어가면 몰렉 호(湖)가 나와. 거기가 성역이래.”

체시어가 좁아지는 길 앞에 난 풀을 치워 주며 말했다.

“그렇구…, 나아아악!”

나는 곧바로 탄성을 내뱉었다.

“오, 세상에!”

“정말 아름다워요!”

나뿐 아니라 모두 감격했다.

높디높게 깎아지른 기암절벽.

그 사이에 요새처럼 숨겨진 호수.

일주일의 고단함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경관이었다.

놀라운 점은.

“어, 어떻게 저렇게… 파랗게 빛이 나지?”

호수 전체가 오묘한 푸른빛으로 반짝인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성력계 능력자들이 능력 쓸 때 나오는 푸른 불꽃이나 검기 같은 유의 빛….

“괜히 성지가 아니었구나.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봐.”

나는 감동하며 계속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

“아니, 마법 없이도 이게….”

가능하다고? 홀린 듯 계속 중얼거리는데―

“으븝.”

갑자기 옆에 있던 체시어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뭐지? 왜 이래?

“리리스.”

체시어는 왜인지 경관에 한눈판 주변 사람들을 살피면서, 나만 들을 수 있게 물었다.

“무슨 뜻이야?”

“뭐가?”

“파랗게 빛난다는 거.”

갑작스러운 질문이 의아해, 나도 조용히 속삭였다.

“…? 말 그대로 빛난다는 건데? 마법 쓸 때 나오는 파란색 빛 말이야. 호수가 빛으로 다 채워져 있잖아.”

“아니야.”

“응?”

체시어가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물이야. 맑은 것뿐이지, 네가 말하는 파란색 빛 같은 건 없어. 마법 같지도 않아.”

“뭐?”

“내 눈에는 그냥 물처럼 보여.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은데.”

체시어의 말에 나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나는 누가 봐도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감탄했던 건데….

“체, 체시어.”

“응.”

곧바로 뭔가 깨달은 우리는, 진지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 호수에 뭔가 있나 봐.”

“그런 것 같아.”

이내 체시어는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급히 향했다.

“네가 봐야 할 게 있어.”

* * *

우리는 달리며 말했다.

“왜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지?”

“네가 삼켰다는 그 성물 때문이 아닐까.”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운명을 재단할 수 있다는 사도의 심장.

그리고 그 심장을 삼킨 이에게 뭔가 알려주려는 듯, 내 눈에만 기이한 푸른빛을 띠는 호수.

호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없어선 안 될 수원지다. 식수의 역할도 하고 있으니까.

‘식수로 쓰는 물…. 전염병…. 뭔가 촉이 온다, 촉이 와.’

누군가 남긴 힌트를 찾아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마을 초입.

체시어는 웬 돌덩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혹시 아까 신관님들이 설명해 줄 때 들었어? 이게, 이 마을 사람들이 아까 그 호수만큼 신성시하는 거래.”

“아니, 못 들었어. 이게 뭔… 아!”

돌덩이에는 비석처럼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고대어!

“너, 읽을 수 있잖아.”

“그, 그치.”

아주 오랜 옛날에 쓰던 언어.

내가 알기로, 지금은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한 명 빼고.

나는 그 한 명에게 배웠다.

오스카가 가르쳐 준 몇 가지 마법식에, 고대어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마법식 그릴 때 필요한 단어 몇 개만 아는 건데.’

나는 슬쩍 체시어의 눈치를 봤다.

허풍 떨었던 게 생각났다.

“엣헴! 나 오늘 스승님한테 고대어 배웠어! 완전 어려운데 다 읽을 수 있다고!”

“대단하다.”

“리리스?”

“으응! 어디 보자….”

나는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 생긴 고대어를 천천히 살펴봤다.

바로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 이거 ‘시작’! 음, 그리고…. 으음, 또….”

이제 모르겠다.

슬쩍 옆으로 눈알만 돌리니, 체시어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실토했다.

“미안. 사실 다 읽는 게 아니고 단어 몇 개만 알아.”

“…그렇구나.”

민망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내 체시어가 말했다.

“그럼 제도에 돌아가면, 책 같은 거 있어? 가서는 해석할 수 있지? 옮겨 적어 갈까?”

“그치만, 당장 여기 마을 일 해결하는 데 필요할 수도 있잖아.”

“…….”

“…….”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체시어의 표정을 보니,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머리를 붙잡았다.

“으응, 맞아. 지금 여기에… 이거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하지….”

* * *

나랑 말도 안 섞을 줄 알았는데.

오스카는 다행히 단둘이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말해, 빨리.”

“에이, 성격 급하시긴….”

뭐라고 말해!

나에게는, 저기 가서 고대어 좀 읽어 주십쇼, 스승님! 하고 곧바로 말할 용기가 없었다.

아직 냉전 중인데 뻔뻔하게….

“우와아!”

나는 괜히 몰렉의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가리켰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요새.

웅장한 위엄을 뽐내는 기암절벽 사이, 눈이 시리게 빛나는 푸른 호수.

“너어무 예쁘죠. 그쵸?”

“어, 안 예뻐.”

“…스승님.”

“할 말 없으면 간다.”

“잠깐만요!”

나는 정말로 미련 없이 가 버리려는 오스카의 손을 잡았다.

“놔.”

그러나 그는 대번에 뿌리쳤다.

“어….”

나는 내쳐진 손을 멍하니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화가 진짜 많이 났구나.

한 번도 이렇게까지 쌀쌀맞았던 적은 없었는데.

“…….”

“…….”

소심하게 오스카를 올려다보는데, 그도 멈칫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무심코 냉정하게 손을 뿌리친 걸 신경 쓰는 눈치.

“스승님…. 화 많이 났어요? 이제 제 얼굴도 보기 싫어요…?”

“…….”

“손, 잡으면 안 돼요…?”

불쌍하게 말하자 오스카는 지그시 눈을 감고 한숨만 쉬었다.

허락일까?

다시 손을 잡으려는데 오스카가 빼냈다.

그리고는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야.”

“네….”

“너 내가 우습지.”

“네?”

“네 말이면 다 들어주니까. 네 목숨 조금이라도 닳는 거 못 보고 예민하게 구니까. 너한테 맨날 휘둘리니까.”

“…….”

“내가 바보 같지.”

“아니요? 아니에요! 저는….”

“뭐가 아니야. 날 우습게 보는 게 아니면, 어떻게 장난이라도 그딴 말을 해.”

“…….”

“너 그거 아냐? 나, 사실 잠을 못 자는 게 아니라 일부러 안 자려고 하는 거야. 잠들면 맨날 개 같은 꿈이나 꾸니까.”

오스카는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갑자기 네가 사라지는 꿈, 황제 놈 손에 네가 잡혀있는 꿈, 생명력 다 빨리고 늙어서 죽어가는 너를 보는 꿈…!”

“…….”

“그럼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

나는 숨을 삼켰다.

젖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오스카는 한 손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뜯듯이 꽉 잡았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해.”

“…….”

“몇 년 버텨 보니까 이제 걱정이 안 돼? 황제 놈 무서운 거 실감이 안 나지?”

“그게, 그게 아니라….”

“그놈은 신이나 다름이 없어. 나나 네 아빠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널 못 지켜. 그놈은, 지금 손짓 한 번에 너를 자기 눈앞에 데려다 놓을 수도 있거든.”

“…….”

“그래서 제발,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눈에 띄지 마. 숨죽이고 살라고.”

무릎 꿇은 오스카는, 얼어붙은 내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너 때문이 아니라, 네 목숨 하나에 벌벌 떠는 나 때문에라도!”

“스승님….”

“나는 너 하나 무사하길 바라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뭐? 내가 죽으면 따라와? 지옥에서 만나? 이, 씨….”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이성을 잃은 오스카를 처음 봐서.

“내가 너한테 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이내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기억했냐…. 그냥, 영영 기억하지 말지….”

“…….”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멈춰 있다가, 떨리는 팔로 오스카를 끌어안았다.

“죄, 죄송해요…. 함부로 죽겠다는 말 해서….”

당황한 손이 자꾸 떨렸다.

내가 정말, 실수했구나.

“그치만, 그치만 그만큼 스승님이 저한테 큰 의미라는 말이었어요….”

“…….”

“…스, 스승님이 저한테… 저한테 세상을 만들어줬잖아요….”

멈칫한 오스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행복하라고 해서…. 스승님이 만들어 준 세상에 태어나서… 행복해 봤잖아요….”

놀라고 무서워서 흐려진 시야.

눈을 질끈 감았더니,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행복한데도 돌아온 거, 스승님 때문이라고 말했잖아요…. 스승님 기억하려고, 스승님을 만나려고 돌아온 거라고….”

“…….”

“저, 으, 저한테는 이미 스승님이 너무너무 소중해 졌는데…. 그런데 스승님이 사라지면 전… 어, 어떻게 살아요. 스승님 때문에 돌아왔는데, 스승님이 저를 버리고 가면 어떡해요….”

“야….”

나는 자꾸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고 말했다.

“저는 뭐든지 할 거예요. 방법을 찾을 거예요. 스승님이 저랑… 흐윽. 계속 말 안 하고, 화, 화내고… 제 얼굴 영영 안 보려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할 거예요….”

“으아아, 진짜!”

울듯이 소리친 오스카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를, 진짜….”

“…….”

“진짜 어떡하면 좋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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