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69)화 (170/261)

오스카는 한참 동안, 흐느끼며 숨을 골랐다.

으스러질 듯 나를 꽉 안은 팔.

“나한, 테도…. 네가….”

떨리는 목소리가 부서지며 귓가에 스며들었다.

“…소중해, 너무….”

“…….”

“이렇게, 간절해 본 적이 없을 만큼….”

이내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가 속삭였다.

“리리스….”

“…네.”

“하나만, 약속해….”

“…….”

“황제 눈에 띄는 위험한 짓은… 하지 마라. 그리고… 생명력 많이 드는 일, 무조건… 나나 네 아빠한테 물어보고 해. 또….”

나를 안은 팔을 풀고, 오스카가 붉어진 눈을 맞추며 덧붙였다.

“…방법 같은 거 못 찾는대도, 나는 괜찮아.”

“…….”

“따라 죽는다느니 그런 말, 다신 하지 마.”

“…….”

“대답해.”

나는 오스카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하나만 약속하라고 하셨으면서 하나가 아닌데….”

“아오, 씨!”

버럭 내지르는 오스카에 나는 슬쩍 눈을 깔고 코만 훌쩍였다.

“약속 안 해?”

나는 못 들은 척 다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방법을 꼭, 찾을게요….”

“하.”

오스카는 이를 갈다 휙 일어났다.

“스, 스승님. 아직도 저 미워요?”

“…….”

“아니죠? 이제 저랑 말할 거죠?”

“못된 기집애.”

그는 눈치만 보는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 헤헤….”

“뭘 바보처럼 웃어, 웃긴.”

오스카는 내 손을 꽉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승님, 있잖아요. 사랑해요. 아주 많이요.”

코 막힌 목소리로 한 고백에 그가 멈칫하더니 하, 웃었다.

“…됐다고. 너 안 밉고, 이제 말도 할 테니까 그만해.”

“으으응. 스승님 화 풀라고 한 말 아닌데? 진짜 사랑해요. 아빠가 그랬는데, 진심은 틈날 때마다 매일매일 표현해야 한대요. 나중에 많이 못 한 거 후회하지 않게.”

“…….”

“스승님도 해 주세요. 사랑해.”

오스카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버럭 소리쳤다.

“난 그런 거 못 해!”

“쳇.”

분위기 좋았는데 금세 버럭 스승님으로 돌아왔군.

그래도 화해해서 다행이야.

―생각하다가, 문득.

‘아, 맞다.’

뒤늦게야 오스카만 데리고 나온 목적이 떠올랐다.

고대어 읽어 달라고 해야 하는데.

나는 오스카의 손을 잡고 서둘러 마을 초입으로 이끌었다.

“뭐야? 어디 가?”

“…….”

“뭐냐고?”

“고, 공기가 좋아서요! 산책도 할 겸? 바로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얼버무리자 오스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할 말 있다고 나 불러낸 거 핑계지? 처음부터 뭐 다른 속셈 있었지?”

예리하다….

“에잉, 속셈이라뇨. 말 되게 서운하게 하신다.”

“그럼 뭐야. 여기 왜 왔는데.”

“그냥 뭐, 간만에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 좀 하려구….”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히 안 믿는 눈치다.

“헉! 스승님, 이거 봐요!”

고대어가 쓰인 돌덩이가 보이는 곳까지 와서, 나는 그걸 우연히 발견한 사람처럼 연기했다.

“여기, 여기! 이게 뭐지?”

“뭐….”

“이런 곳에 마침 수상해 보이는 돌덩이가 있어요! 게다가 여기 적힌 거 고대어 아니에요?”

오스카는 물끄러미 돌을 살펴보다 내게로 눈을 돌렸다.

“…….”

“…….”

정적.

나는 민망해져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내 오스카가 한숨과 함께 돌 앞에 무릎을 벌리고 앉았다.

“너 연기 더럽게 못하니까 앞으로는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라.”

“넵.”

곧 오스카가 돌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멈칫.

“왜, 왜요? 뭐라고 쓰여 있어요?”

“…여기 마을 사람들, 다 죽는다고 했었나?”

“네!”

나는 흥분해서 물었다.

“이거, 계시 같은 거 맞죠? 혹시 사람들 죽을 거 미리 알려주고 있나요? 살릴 방법도 나와 있어요?”

오스카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불길한 웃음이었다.

“아니. 살릴 방법은 무슨.”

“그럼요?”

그는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 아빠를 위해서 얌전히 죽어 줬으면 한다는데?”

* * *

캠프로 돌아가는 길.

“왜 새삼스럽게 충격받냐?”

오스카가 멍하니 걷는 나를 보며 말했다.

“설마 신이 정상일 줄 알았던 건 아니지? 나라를 이런 개판으로 만든 주범인데.”

“작은 믿음은 있었어요….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을 줄은 몰랐죠….”

“바보네.”

계시는 충격적이었다.

분명 성지 몰렉의 참사를 예견하는 내용이긴 했지만, 대비하라든가 하는 말이 아니라….

<빛이 거두어지면,

운명대로 희생이 시작되리라.

이는 영웅의 승리를 위해 바치는 고귀한 피이니.

악을 몰아낼 운명들아,

슬퍼하지 말지어다.>

오스카의 말마따나, 얌전히 죽어 달란 소리가 적혀 있었다.

영웅은 아빠, 악은 황제.

혁명을 돕기 위해, 신이 친히 죽을 운명으로 점찍어 준 마을 사람들.

“스승님, 있잖아요.”

나는 이 계시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테오 오빠가 왜 하필, 원래 죽었던 시점에 딱 죽을 뻔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뭐. 걔도 죽을 운명이었다고?”

“네에, 아마도. 아니, 확실히요.”

나는 힘없이 덧붙였다.

“오빠가 죽는 건, 슬프지만 좋은 계기였거든요. 체시어한테도, 아빠한테도.”

딸을 잃은 에녹 루빈슈타인과 달리, 혁명을 위한 목적의식이 없었던 체시어.

그는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쌍둥이의 죽음을 겪으며 각성했었다.

“또, 이번에 마을 사람들이 죽는 것도 아빠한테 좋은 일이구요.”

몰렉 참사는 황제에게는 타격을, 아빠에게는 힘을 실어주었다.

“운명이 정해진 건 아닌데….”

원작과 달리 많은 게 바뀌었으니,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딱 정해진 몇몇 사람들은 있나 봐요.”

신이 운명을 ‘정해 놓은’ 특정한 인물들.

몇 페이지 몇째 줄에 구체적으로 죽음이 서술된 책 속 캐릭터처럼….

그들은 아마, 정해진 시점에 죽을 위기를 겪어야만 할 거다.

왜냐면.

영웅의 승리를 위해 바치는 고귀한 피이니.

그들에게는 전부, 주인공의 의지를 부추기거나 혁명에 도움이 되는 ‘장치’―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에휴, 진짜 충격이다.”

이 세계는, 아무래도….

아빠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신이 철저히 짜 놓은 각본 같았다.

* * *

산 중턱.

나는 아빠와 단둘이, 호수가 잘 보이는 곳에 올라와 있었다.

“이야, 경치 조오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마음 놓고 노인 분장을 푼 아빠는, 눈이 부신 호수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주인공.

영웅.

악당인 황제를 무찌르려고 신이 고른 사람.

아빠가 원작에서 무난히 승리를 거머쥔 데에는, 당연히 그의 주인공다운 기량도 큰 몫을 했지만….

‘주인공이니까 갖게 되는 우연한 버프들도 분명히 존재했었지.’

소설을 읽다 보면.

오, 이렇게 온 우주가 도와주는 일이 생긴다고?

아니, 이런 우연이?

―라고 생각하게 되는 상황들이 종종 나왔는데.

그게 바로 작가의 전능.

곧, 신의 안배일 것이다.

이곳, 몰렉에서 일어난 참사 또한 그렇다.

‘원인도 모르는 전염병이 갑자기 돌 리가 있나. 이상했었지.’

심지어 이건 시작일 뿐.

뜬금없는 천재지변이나 묘한 인재(人災)가 일어나 공교롭게도 황제가 민심을 잃고 주춤하게 되는….

‘주인공 버프’ 전개는 앞으로도 몇 번 더 있다.

아빠의 승리를 위해 아무 죄도 없이 희생해야 할 사람들이 더 있단 뜻이다.

“공주야, 근데 여기는 왜 오자고 했어?”

“아아, 응. 나 여기 사람들… 도와주려고…. 그러려고 왔으니까….”

“여기에서? 어떻게?”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아빠를 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아빠.”

“응.”

“나… 나 안아 주라.”

“어어?”

입이 헤벌쭉해진 아빠가 잽싸게 나를 안았다.

“웬일이야, 우리 공주? 아직 아빠한테 조금 삐져 있더니? 그럼 혹시 뽀뽀도 될까? 움~!”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가오는 아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뽀뽀는 아직 안 돼. 네 밤 자고 난 후부터 해 준댔잖아.”

“쳇.”

“아빠, 그보다 할 말이 있어.”

“할 말? 뭔데?”

“내가 아빠 사업 성공한다고 했었잖아?”

“아, 응. 그랬지.”

“어, 물론… 아빠가 아주아주 잘해서도 있지만, 사실 운이 좋았던 것도 조금 있나 봐….”

“오, 그래?”

“근데, 아빠.”

혁명이 쉽도록 신이 운명을 정해 놓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은 곧….

‘주인공 버프’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혹시 그런 운이 없어져도 아빠는 사업 성공시킬 수 있어?”

“음?”

“운은, 신님이 주는… 그러니까 선물 같은 거야. 이번에 이 마을 사람들이 다 죽으면, 아빠한테는 이득이거든. 만약에 그런 행운이 앞으로 다 없어지면….”

“공주야?”

아빠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는데 그게 어떻게 이득이고 행운이야? 그런 게 선물이면 아빠는 안 받을래.”

나는 차마 아빠를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사실… 아빠라면 당연히 이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난 사람들을 구할 결심도 이미 했고, 앞으로 예정된 죽음들도 모른 척할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아빠에게 묻고 있었다.

끝내 일을 어렵게 만들 생각이면서―

‘아빠 허락을 받았으니까 괜찮아.’

―하고, 내 마음 편해지려고.

“미안.”

“…….”

아빠는 뜬금없는 내 사과에 침묵했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다 아는 사람처럼.

“공주야. 아빠가 선물이 없으면 힘들 것 같아?”

“으응. 아빠 못하는 거 없는 거 알지만, 그래도 좀… 걱정은 돼.”

“흐음.”

고민하는 아빠 얼굴을 보고, 나는 소심히 말했다.

“도와주지… 말까? 괜히 내가 뭔가 해서… 아빠 힘들고 사업도 망해 버리면….”

“공주야.”

아빠가 작게 웃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아빠는 신님한테 이미 선물 받았어. 그것만 있어도 충분해서, 더 안 받아도 돼.”

“엥? 무슨 선물?”

갑자기 무슨 소리지?

“궁금해?”

“응!”

“궁금하면 뽀뽀~!”

궁금한 건 못 참지.

쪽, 입술에 뽀뽀해 주자 아빠가 씩 웃고는 내 코를 건드렸다.

“선물은 바로 우리 공주야.”

“……?”

“방금 공주가 뽀뽀해 줘서 아빠는 힘이 났지. 아빠는, 공주가 있어서 강해졌거든.”

맞춰오는 아빠의 눈빛이 깊었다.

“공주 덕분에 이렇게 세져서 막 괴물도 잡고, 공주 지키려고 사업할 마음도 먹었어. 그러니까 아빤 이미 너무너무 큰 선물도 받았고, 평생 있을 행운도 다 챙긴 거야.”

“그게….”

아빠는 웃으며 이마를 맞대 왔다.

“아빠 믿지? 공주는, 괜히 아빠 걱정하지 말고 공주 마음이 편한 일을 해. 아빠는 우리 딸만 있어 주면, 뭐든 해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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