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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70)화 (171/261)

“아빠….” 

나는 눈물이 날 뻔했지만, 꼭 참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빛이 거두어지면,

운명대로 희생이 시작되리라.

나는 아빠 뒤로 푸르게 빛이 나는 호수를 내려다봤다.

계시에서 말하는 ‘빛’.

그건 아마….

지금 내 눈에만 보이는, 호수를 감싼 푸른 빛일 터.

‘역시… 아까보다 훨씬 더 옅어졌구나.’

저 빛은 곧 사라질 것이다.

순례단이 떠나는 타이밍에 맞춰 계시가 실현되어야 하니까.

“있잖아…. 아빠도, 누가 아프고 죽는 거 싫지?”

“…응.”

“사람들이 전부 행복하고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서 사업하는 거잖아.”

“…….”

“그러니까… 이게 맞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는 신님이 오래 살라고 시간 많이 줬으니까… 그러니까 내 시간으로 많은 사람을 살려줄 수 있으면…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눈에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1year

옅어지던 빛이 사라진 순간.

난 내가 뭘 하면 되는지 물었고, 신은 1년의 시간을 요구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 정체를 들키지 않을 만큼 자라면서,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만큼.

내심 정해둔 수명이었으니까.

“나는 혼자 오래오래 사는 거 싫어. 아빠도, 스승님도, 체시어도 다, 나 두고 먼저 가 버리잖아. 그럼 나는 엄청 슬프고 외로울 거야.”

“…그래.”

“나는… 많이 안 살아도 돼, 아빠.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똑같이 늙고, 똑같이 죽을래.”

“…….”

아빠는 입술을 달싹이며 나를 보다, 이내 꽉 끌어안았다.

“아빠, 나는 아빠가 자랑스러워. 아빠는 내 영웅이야.”

“…그래. 사랑해, 우리 딸. 많이많이.”

“응, 나도. 나도, 아빠.”

1year

호수 위로, 다시 아름다운 빛이 차올랐다.

동시에 약간의 이질감.

자란 앞머리가 시야를 가렸다.

“…….”

코앞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빠의 눈이 커졌다.

곧, 입술 새로 떨리는 숨이 토해졌다.

“아….”

작은 신음과 함께, 아빠는 다시 나를 아플 만큼 꽉 끌어안았다.

* * *

성지 순례의 마지막 일정인 기도까지 마친 뒤, 순례단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딱 1년만 쓸게요. 그 이상 쓰면 좀 위험하니까. 만약 더 많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러면…. 그냥 모른 척하고 돌아올게요. 약속!”

기다리던 오스카는 캠프로 돌아온 리리스와 에녹을 발견했다.

다가가려다, 멈칫.

“…미친.”

대번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함께 있던 체시어의 얼굴도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체시어! 스승…, 스카 할아버지!”

마냥 해맑은 표정으로 달려오는 리리스는 자라 있었다.

매일같이 리리스의 얼굴을 보는 익숙한 이들이라면, 의아하다고 느낄 만큼.

아슬아슬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너.”

재빨리 다가간 오스카가 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 마법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리고는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무섭게 속삭였다.

“너, 이…. 약속대로 한 거 맞아?”

“네, 그럼요. 딱 1년 들었어요.”

그래, 아마 약속은 지켰을 거다.

하지만, 위화감이 들 만큼 티가 나는 이유는….

아이가 테오를 살리기 위해 1년의 수명을 쓴 지 얼마 안 되어서일 터.

그렇다면 거의 한 번에 2년을 쓴 셈이었고 성장기라 변화는 더 도드라졌다.

“돌겠네, 진짜. 그래서, 해결은 됐냐?”

“네, 아마도!”

리리스는 순례단을 배웅 나온 마을 사람들이 꽃을 나눠주는 걸 보며 만세를 불렀다.

“와! 나도 꽃 받아야지!”

지금 제 모습을 확인하지 못해서인지 리리스는 한없이 천진했다.

아마, 멀쩡히 웃고 떠드는 마을 사람들을 무사히 살렸다는 생각에 더 기쁘기도 하겠지.

“성자 납셨네.”

신나서 사람들 틈으로 달려가는 리리스를 보다가, 오스카가 휙 뒤돌았다.

“얼굴도 모르는 인간들 목숨이 딸 수명보다 중요했어요? 애를 한번 말려라도 보긴 했….”

멀찍이 있던 에녹에게 다가가던 오스카가, 가까워지자 보이는 그의 표정에 놀랐다.

“…이봐요. 뭡니까? 괜찮아요?”

에녹은 넋이 나간 채 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아니야, 나는.”

“…….”

“나는, 이러려던 게 아니야….”

에녹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실… 수십 명의 목숨보다, 내 아이의 1분 1초가 더 소중해. 그런데, 그런데 아이에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어.”

“…….”

“내가 영웅이래. 웃기지.”

에녹은 자조하며 덧붙였다.

“무슨 대단한 대의 때문에… 내가 싸우는 줄 알아. 있지도 않은 아빠 사명감을 지켜주려고 해.”

그는 성자가 아니다.

누구보다 이기적인 아버지였다.

칼을 쥔 것도, 딸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숭고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그냥 아이를… 내 딸을… 살려야 하니까 칼을 잡은 것뿐인데….”

부끄러울 만한 고백이 거리낌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는 내가… 자랑스럽대. 그렇게 말하는 아이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는 거야, 나는 또.”

덤덤히 듣던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빠는 딸이 생긴 뒤로 누구보다 이기적인 인간이 됐는데. 애는 부모 마음 모르지.”

“…….”

“있죠, 당신 딸.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런 단순한 이유로 제 수명 깎아 가며 뭔가 하려는 게 아니에요.”

오스카가 에녹을 똑바로 보며 덧붙였다.

“아빠 신념을 지켜주려는 거지.”

“하….”

에녹이 눈을 가리며 또 자조했다.

“황제 목에 검이 닿기까지, 그 길에… 아빠의 신념과는 다른, 억울한 피가 없었으면 하는 거예요.”

“못난 아빠인 걸, 꼭꼭 숨겨야 해서 괴롭네.”

“계속 숨겨요. 괜히 약한 소리 해서 애 실망시키지 말고.”

오스카가 멀리 리리스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애를 위해서라도… 실패하지 맙시다.”

* * *

“엥?”

사람들 틈에 섞이기도 전에 리리스는 체시어에게 잡혔다.

“왜?”

체시어는 리리스의 순례복 후드를 푹 덮어씌우며 말했다.

“그냥, 그냥 여기 가만히 있어. 꽃은 내가 받아다 줄게.”

“……?”

리리스는 그제야 체시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걸 발견했다.

“아…. 나 혹시, 좀 많이 자랐어?”

체시어가 떨리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는 지금만큼 불안해 본 기억이 없었다.

황족이 아닌 능력자를 프리메라와 연관해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그러니까, 남들은 그저 성장기의 소녀가 부쩍 자랐다 생각하고 말 텐데도….

당장 누군가가 리리스의 정체를 알아내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체, 체시어. 너 표정 엄청나.”

덩달아 겁먹은 리리스가 제 뺨을 쥐고 더듬거렸다.

“뭐지? 나 대체 뭐가 얼마나 자랐길래….”

“아.”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체시어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아무렇지도…. 아무렇지도….”

“…….”

그러나 이미 창백해진 리리스의 얼굴색은 여전했다.

체시어는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체시어?”

터져버린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리리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뭐, 뭐야?”

“괜찮아.”

매일같이 쫓기는 듯한 불안함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황제를 죽이기 전에는.

하지만, 체시어는 모든 준비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명분….

황제의 목을 베고도 그것이 합당함을 인정받으려면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왜?

언제 리리스의 정체가 탄로날지 모르는데.

불안한 살얼음판 위에서 하루하루 버텨야 하는데.

네 발목에 꽉 물린 족쇄를 천천히 녹여내야만 한다니.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걸 부술 수 있는데.

“불안해하지 마.”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지금의 그는 누구에게도 통제되지 않고 있었다.

그를 붙들고 있는 뭔가가 툭 끊어지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든 행동할 수 있었다.

에녹이 실패한다면?

성공한다 해도, 늦어진다면?

그래도 리리스는 살아야 했다.

약속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무사할 거야.”

“…….”

“내가 그렇게 할 거니까.”

아주 쉬운 답이 코앞에 있었다.

그냥, 명분 없는 검으로 무작정 황제를 없애고 단두대에 서게 되더라도….

너를 위협할 수 없게.

악마를 데리고, 함께 지옥에 떨어지면 그만이니까.

* * *

제도, 리브르 공작저.

성지 순례단의 호위 일정을 마친 아들이 돌아오는 날.

“뭐냐, 이건.”

현관까지 마중 나왔던 악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2주 만에 보는 체시어는 뜻밖의 군식구를 둘이나 달고 왔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오냐. 근데 뭐냐고.”

“뭐긴? 둘도 없는 전우지. 잘 지냈냐?”

큰 짐가방을 들고 뒤뚱뒤뚱 들어오는 에녹.

“그… 우리 집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좀 신경 쓰이거든. 당분간 신세 좀 지자. 한 달? 두 달?”

“뭐? 아니, 네 집에 사람이 안 많았던 적도 있나? 갑자기 뭐가 신경 쓰인다는 건데?”

“흠흠. 삼촌, 안녕하세요.”

에녹의 뒤에 새끼 오리처럼 리리스가 따라 들어왔다.

“어어, 그래.”

무심코 인사를 받아주고 다시 에녹에게 고개를 틀다, 멈칫.

‘뭐지?’

악시온이 다시 휙, 리리스를 돌아봤다.

“와, 너 그새 뭐 이렇게 컸냐?”

대수롭지 않게 던진 물음.

그러나 왜인지 체시어도, 에녹도, 리리스도 그 자리에 땡 굳었다.

악시온이 눈을 껌뻑거렸다.

“뭐야?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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