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하.”
에녹의 웃음이 짧은 정적을 깼다.
“성장기잖아. 요즘 잘 먹더니 많이 컸나 봐.”
“…….”
악시온이 리리스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마지막으로 본 게 2주 전쯤인가.
뺨에 통통하게 붙어있던 젖살이 몰라보게 빠져 이제는 어엿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키도 컸고….
“그러네.”
고개를 끄덕인 악시온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데 다짜고짜 애까지 데리고 오면 어떡해? 내가 불편한 게 아니라 애가 불편하지.”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은 여자애 아닌가.
“챙겨 줄 사용인이 없는데? 하인들도 다 남자라 아가씨 드레스 입혀줄 수 있는 놈도 없다고.”
체시어를 입양한 뒤로 들인 하인들은 다섯인데 때가 되면 퇴근했고, 입주 사용인이라고 해 봐야 유모 마사, 집사 카론이 전부다.
“대체 왜 우리 집에서 놀고 싶은 건진 모르겠는데 정 그러면 너희 집 하녀들 몇 데려오는 게….”
“괜찮아요, 아버지.”
체시어가 불쑥 끼어들었다.
“리리스는 제가 챙겨 주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네가 애 옷 갈아입혀 주게?”
“삼촌!”
리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옷 정도는 저 혼자서도 입을 수 있어요. 그리고 마사 아줌마도 계시니깐요. 음, 체시어랑 놀고 싶어서 온 건데….”
“맞아.”
에녹이 끼어들어 리리스의 등을 위로 떠밀며 말했다.
“그리고, 하하. 사람이 염치가 있지. 나까지 쭉 신세 지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 잠만 자고 항상 일과는 집으로 돌아가서 볼게.”
“아, 그러냐.”
악시온이 이번엔 에녹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침묵.
에녹의 입에서는 다짜고짜 머물겠다는 이유가 더 나오지 않았다.
‘이 자식, 또 뭐 숨기네.’
에녹은 종종 뭔가 감추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지 않고 혼자서 짊어지려는 짐들이었다.
‘목적은 애를 우리 집에 맡기려는 거겠고.’
그래서 악시온은 항상, 캐묻지 않고 에녹의 속내를 파악해야 했다.
“그… 우리 집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좀 신경 쓰이거든.”
‘일부러 사람 없는 곳에?’
왜?
리리스를….
‘노출시키기 싫다?’
악시온은 생각을 마치고 에녹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알았다.”
* * *
악시온의 집에서 맞는, 첫째 날 아침.
당분간 여기에 머물자고 한 건 아빠 의견이었다.
그대로 귀가했으면 매일같이 내 얼굴을 보던 수많은 집안사람 전부,
“와, 너 그새 뭐 이렇게 컸냐?”
어제 악시온 같은 반응이었을 터.
한두 명이면 몰라도, 모두 의아해하면 위험했다.
‘너무 짧은 시간에 생명력을 많이 썼어. 겨우 한 달 사이에 나 혼자만 1년이 흐른 거니까.’
그래서 아빠는, 집에 돌아갔을 때―
‘안 본 사이에 부쩍 자라셨네요!’
―라고,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만큼의 시간을 갖자고 했다.
한동안은 내 얼굴이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숨어 지내는 거다.
아빠와 제일 친한 악시온의 집이라면 오래 머물러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테고, 사람도 거의 없어 적격이었다.
“왜, 왜요?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악시온이 들고 있던 식빵을 반 베어 물었다.
“이제 아주 어엿한 아가씨가 됐다 싶어서.”
“앗, 그런가?”
아침에 만난 마사 아줌마도, 집사 카론도 첫 마디가 “몰라보게 자라셨네요!”였지만, 그뿐.
하지만 악시온은 어제부터 나를 보는 눈빛이 묘했다.
‘삼촌한테는 들키면 안 되는데….’
최대한 안 들키는 게 좋지만, 어쩔 수 없이 들켜도 우리 편은 괜찮겠지.
그리 생각했지만.
아빠는, 딱 두 사람.
“할아버지는 진짜 위험해, 공주야. 혈압 올라 쓰러지셨다가 매일매일 네 걱정에 잠도 못 주무실 거야.”
할아버지와,
“그리고, 악시온도. 그 녀석 생각보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네 정체를 알 때랑 모를 때랑 차이가 클 거야.”
악시온.
둘이 알게 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랐다.
‘맞는 말이야. 내 정체를 아는 건, 사업에 하나도 도움이 안 돼.’
내가 능력이라도 쓰면 황제에게 들킬까 봐 파들파들 떠는 오스카나 분리불안증이 극에 달한 아빠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훅 자란 나를 보고 멘탈이 완전히 나갔던 체시어도 떠올랐다.
“잠자리는 안 불편했나?”
“네, 삼촌! 잘 잤어요.”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또… 출정 일정을 조정해 두마.”
“네?”
“당분간 나랑 체시어가 같이 집을 비우는 일이 없게 말이야. 누구든 한 명은 남아있을 테니까, 어디 나갈 일 있으면 동행해.”
“…….”
나는 수프를 떠먹다 말고 슬쩍 눈을 들어 악시온을 살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식빵을 뜯어먹다 눈으로 ‘왜?’ 하고 물었다.
“아, 아니요. 알겠어요, 삼촌.”
* * *
6월, 초여름.
햇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 * *
황제, 니콜라스의 집무실.
“루빈슈타인 공작이 평민 거주 지역 치안대의 상벌제 도입을 상정(上程)했습니다.”
“뭐?”
보좌관, 라몬이 귀족 회의 안건을 보고하자 펜을 끼적이던 니콜라스의 손이 뚝 멎었다.
“상벌제?”
치안대 인원을 충원하자는 에녹의 안건이 통과된 지 한 달도 안 지난 시점이었다.
유명무실한 치안대의 수야 늘려 봤자 별 의미 없는지라 허락했지만….
‘일하고 싶게 만들겠다, 이거군.’
상벌제가 도입되면 허울뿐이었던 치안대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할 터.
에녹의 의도는 빤히 보였다.
평민 거주 지역의 치안과 방범을 강화하는 것.
곧, 평민들의 복지였다.
“다른 귀족들은?”
“아무래도 대놓고 반대하기 어려웠겠지요.”
귀족들은 언제부터인가 황제보다 에녹의 눈치를 더 봤다.
에녹이 제도로 돌아온 후.
그들의 일상은 달라졌으니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공작이 저번 주 중부 토벌에서 또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터라….”
에녹이 최소한의 인원으로 군대를 꾸려 대부분의 출정을 도맡으면서 능력자들은 눈에 띄게 부담이 줄었다.
기꺼이 자신들을 대신해 사지로 내몰려 주는 에녹의 눈치를 어찌 안 볼 수 있을까.
“골치 아프군.”
자신의 전공을 내세워, 에녹은 귀족 회의에서 편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간 야금야금 내놓은 안건들은 벌써 제도를 많이 변하게 했다.
특히나 평민들의 터전이….
“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지.”
하위 계급에게 많은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들의 요구는 점점 커질 것이고, 계급 사회에 독이 될 터다.
“에녹은, 빼앗겨 본 적이 없으니 모르는 거지.”
종국에는 ‘군림하는’ 계급인 에녹 자신의 위치도 흔들릴 텐데….
“개미들이 자기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꼴을 꼭 봐야, 그 알량한 정의를 고쳐먹을까.”
“폐, 폐하. 어찌 하면 좋을지….”
“치안대의 체계를 바로잡으려는 모양인데, 이번 안건은 과해.”
대체 왜 개미들의 숨통을 터 주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징그러운 개미굴이 지난 4년 동안 조금씩, 크고 단단해진 것도 아니꼬웠다.
그간 추락했던 대신전의 입지를 다시 세우기 바빠, 에녹이 하는 짓을 두고만 봤지만….
“버러지들을 몇 모아와라. 더러운 개미굴을 한 번 부숴 놓을 필요가 있겠어.”
* * *
리브르 공작저에 머문 지 한 달.
나는 꼭꼭 숨어 배부르고 등 따습게 지내고 있었다.
‘다음 주쯤엔 집에 가도 되겠지?’
할아버지도 보고 싶고, 여기까지 찾아오는데도 바쁘네, 아프네 핑계로 돌려보냈던 쌍둥이들도 보고 싶었다.
“하, 이 자식은 애 맡겨 놓고 아주 신났네.”
한가로운 오후.
악시온이 내 옆에서 책을 읽다 말고 구시렁거렸다.
그간 악시온과 체시어는 각각 한 번씩 짧은 출정이 있었고, 아빠는.
“뭐, 대신 굴러준다는데 사양할 것도 아니지.”
옳다구나 한 달 내내 파티였다.
마수 토벌 파티….
“미리 이렇게 들쑤셔 놔 주면 우리야 좋지. 집에서 너 계속 돌봐야 할 때는 적당히 나섰지만….”
악시온이 픽 웃으며 덧붙였다.
“지금은 나한테 너를 맡겨 둬서 그런지 아주 물 만난 고기다. 아, 너 양성소에 있을 때 악몽이 떠오르네.”
“맞다. 그때도 맨날맨날 토벌 나갔다고 했죠?”
“그래. 너 천재니까 한 달 만에 양성소 졸업할 거라면서, 그 사이에 마수들 씨를 말려놓겠다고 했지.”
책을 탁, 덮은 악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네가 진짜 한 달 만에 거길 졸업하고 나올 줄은 몰랐거든.”
“엣헴.”
“네 아빠가 팔불출인 줄로만 알았는데. 다른 녀석들도 허구한 날 너 대단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더라고. 거 뭐냐….”
악시온이 기억을 더듬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4년 전에 성수들 날뛰었을 때 있지? 옥타바까지 징병했던.”
“아아, 네에.”
“그때 네가 A급 실드를 썼다면서. 테오 앙트라세랑 제라드 슈미트가 틈만 나면 그걸 영웅담처럼 이야기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야. 자기들은 코앞에서 봤다더군.”
“앗, 그랬구나.”
“대단하긴 해. 마법식은 외우면 된다 해도, A급이면 마나가 어마어마하게 드는데.”
악시온이 혀를 내두르며 다시 책을 펼쳤다.
“넌 그때 처음으로 마나를 다 써봤겠군. A급 실드는 옥타바 마나 탈탈 털어야 겨우 시전할 테니.”
“아아! 그렇죠.”
“배 엄청 고팠겠네.”
“배요?”
갑자기 웬 배?
내가 의아해하자, 악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배 안 고팠어? 마나 다 쓰고 나면 제일 버티기 힘든 게 공복이잖아.”
헉, 몰랐다!
알 턱이 있나?
나는 능력자가 마나를 다 썼을 때 어떤 상태인지 아는 바가 없다.
영원히 느낄 수도 없을 테고.
‘그런데 모르면 이상하지!’
아는 척은 해야 했다.
나는 순간 긴장한 마음을 다잡고 얼버무렸다.
“그, 그랬나…? 배가 고팠던 것 같기도 하고…. 으항항,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래?”
잠시 나를 바라보던 악시온이, 다시 책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와, 위험했다.’
예상치 못한 대화에, 나는 내가 안일했음을 느꼈다.
보통의 능력자를 연기하려면 그들 상태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 법.
‘만약 이런 대화를 황제랑 했다고 생각해 봐. 바로 걸렸을걸?’
나는 덤덤히 책장을 넘기는 악시온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일어났다.
“으음, 체시어 뭐 하지? 가 봐야겠다.”
그리고 재빨리 체시어의 방으로 달려갔다.
‘알아놔야 해!’
벌컥, 문을 열자.
“체시어!”
씻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터는 체시어가 보였다.
아직 윗옷은 입지도 못한 채로.
“어이쿠!”
나는 휙 몸을 돌렸다.
“미안해. 내가 미쳤나 봐. 노크도 안 하고. 좀 이따 다시 올게.”
“아니야. 기다려. 금방 입어.”
민망함에 뺨만 긁적이고 서 있으려니 금세 옷을 입은 체시어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미안.”
“괜찮아. 왜?”
“있잖아, 있잖아. 너 마나 몽땅 다 써본 적 있어?”
체시어는 뜬금없는 질문에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전에. 아직 마나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을 때, 몇 번.”
“오! 그럼 그때는 어떤 상태야? 많이 힘들어? 몸이 어떻게 돼? 비슷하게라도 설명해 주라.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체시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아마 일주일 내내 억지로 깨어 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일 거야.”
“뭐?”
아니, 그건 고문이잖아?
“머리가 제일 아파.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고.”
“기력 없는 거랑 비슷하네? 배가 제일 고프지? 공복이 그렇게 심하다며? 버티기도 힘들 정도로?”
“공복?”
체시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와중에 배고픈 걸 느낀다고?”
“응?”
“글쎄, 그런 사람은 없을걸. 뭘 입에 넣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 만큼, 몸에 힘이 없으니까.”
“엥? 아니야. 삼촌이….”
나는 악시온과 다른 말에 의아했다가, 곧 깨달았다.
“잠깐. 설마….”
“배 안 고팠어? 마나 다 쓰고 나면 제일 버티기 힘든 게 공복이잖아.”
…날 낚으려고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