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체시어.”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나 삼촌이랑 조금 전까지 이야기하다 왔는데….”
“무슨 이야기?”
“4년 전에 옥타바까지 징병했던 성수 사태 있잖아. 그때 나, 마나 다 썼을 테니 배고팠겠다고 그러더라? 그러면서 마나 떨어지면 공복이 제일 먼저 느껴진다고 하던데?”
“그럴 리가.”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가 널, 떠본 것 같은데.”
“그치? 와, 뭐지? 왜 떠봤지?”
설마 내 정체를 의심하는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다.
좀 많이 자랐을 뿐인데, 누구든 눈치만 있다면 내가 프리메라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단 거니까.
“괜찮아. 의심할 수는 있어도 확신하기는 힘들걸. 또, 알게 되더라도 아버지는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괜히 삼촌도 걱정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어.”
체시어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갑자기 네가 여기서 숨어 지내는 것부터 이상했으니까. 의심할 만도 해.”
“으으, 안 돼. 아빠가 삼촌 멘탈 생각보다 약하댔는데….”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그보다, 얼른 나가자. 오늘 갈 데 있다면서.”
“아, 맞다!”
오늘은 오랜만에 리코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정보 길드 <붉은 매>의 수장!
제도의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우리의 정보통!
나는 그간 원작을 복기하면서….
[1783년 7월, 제도에서 평민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 내용은 평민 거주 지역에도 최소한의 치안과 방범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이를 묵살하였고 시위를 선동했던 주모자 열 명을 참수했다.]
리코에게, 곧 일어날 사건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었다.
“나 얼른 옷 갈아입구… 아!”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나는, 체시어의 방 창문 너머 이질적인 광경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왜 그래?”
멀리 보이는 푸른 빛.
‘저, 저게 왜 또?’
성지 몰렉, 호수에서 봤던 바로 그 빛이었다.
내 눈에만 보였던….
<빛이 거두어지면,
운명대로 희생이 시작되리라.>
* * *
제도, <리코 식당>.
평범한 식당 내부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흐르는 건물 지하.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어?”
웃는 피에로 가면을 쓴 사내가 날카로운 구둣발 소리를 새기며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정보 길드 <붉은 매>의 수장, 리코였다.
“이쪽은 전혀.”
“세라프 거리 쪽도….”
모여 있던 정보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네. 괜히 알아봐 달라고 한 게 아닐 텐데.”
리코가 들고 있던 편지를 열었다.
2주 전, 리리스가 보낸 것이었다.
[리코리코 씨! 오랜만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
혹시 요즈음 평민 거주 지역 분위기가 어떤지 살펴봐 줄 수 있나요?
시위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누군지 미리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답장은 안 해 줘도 괜찮아요. 2주 후에 직접 만나러 갈게요.
그때 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리코.”
정보원, 마리나가 말했다.
“황제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는 평민들이, 갑자기 목숨 무서운 줄도 모르고 시위할 일이 뭐가 있겠어?”
맞는 말이다.
귀족도 아니고 평민들이 황제에게 뭔가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이건 일단 두고. 다른 쪽은?”
리리스가 원하던 것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대신 그 과정에서 수집한 묘한 행적이 있었다.
“평민들을 매수하고 있댔지?”
이유는 모르지만, 누군가 은밀하게 평민들을 모으고 있었다.
“왜 모은 거지?”
“알아낼 수 없었어.”
마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능력 밖이야. 단순히 돈 몇 푼으로 매수한 게 아닌가 봐. 은근히 접근해서는 절대 입을 안 열어.”
“어떻게든 열게 해.”
“뭘 어떻게 할까? 잡아서 고문이라도 해? 그런 거, 우리 방식 아니잖아.”
“돈을 쥐여 줬으면 그 열 배, 백 배를 들여서라도 개중 한 놈은 손에 넣어. 대체 누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갑작스러운 리리스의 연락.
그리고 누군가의 묘한 행적.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증거랄 게 있으면 뭐든 확보해 놔야겠지.”
리코가 매섭게 덧붙였다.
“다시 움직여.”
* * *
이렇게 갑자기?
나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초조히 손톱을 물어뜯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마차는 제도의 평민 거주 지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쪽 일대가 전부 푸른 빛으로 싸여 있었으니까.
‘계시가 단발성이 아니었어. 앞으로도 저 빛은,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알려줄 거야. 그런데….’
몰렉 참사야 원작에 나왔기에 알고 찾아갔었다.
‘…이번엔 대체 뭐야?’
가늠되는 사건이 하나도 없었다.
“리리스.”
그때, 체시어가 속삭였다.
“응?”
“…이번에는 안 돼.”
빛이 보였고, 사람들이 죽게 될 걸 알고 있지만 내 능력을 쓰지 말란 뜻이다.
“으응,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또 자라게 되면, 확실히 문제가 된다.
슬프지만 내 안위를 보장할 수 있는 한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냥 무슨 상황인지만 확인해 보자. 능력 안 쓰고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 네 능력을 안 써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뭐든 할게.”
체시어는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해. 약속해 줘.”
“알았어. 걱정하지 마.”
우리는 속삭이다가 문득, 맞은편을 쳐다보았다.
반대편에 착, 다리를 꼬고 앉아 밖을 내다보는 악시온.
“아.”
우리 시선을 느낀 그가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 하는 모양인데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라.”
“어, 음…. 삼촌, 죄송해요. 근데 저랑 체시어만 나와도 됐었는데.”
“뭐, 데이트하려던 거냐?”
“아뇨?!”
“데이트 아니면 아저씨도 끼워 줘. 딱히 할 일 없어서 심심하다.”
나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악시온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그가 날 떠본 걸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했다.
악시온도 악시온이지만….
‘으으, 리코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와중에 갑자기 계시의 빛이라니.
“앗! 여기서 내리자!”
나는 푸른 빛이 눈이 아플 정도로 주변을 메운 곳에 마차를 세웠다.
건물 십수 채가 전부 빛난다.
“여기 맞아?”
“어, 맞는데… 근데….”
너무 평화롭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가 않았다.
‘폭탄이라도 떨어지나?’
그건 너무 현실성이 없고.
‘아니면 갑자기 마수라도 나오는 걸까?’
이건 꽤 가능성 있다.
아빠가 있으면 좋을 텐데, 하필 토벌 나가서….
“여기서 뭐 하려고?”
마차에서 내린 악시온이 물었다.
“어, 음. 그러게요.”
나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체시어, 일단 우리 아무 데나 들어가 보….”
고민할 시간도 아까워서 뭐라도 알아보려고 체시어에게 속삭이는데.
“아아악! 불이야!”
별안간 건물 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불이라고?’
곧, 눈앞에 보이는 건물 안에서 대여섯 명쯤 되는 사내 무리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큰 꾸러미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병?’
목이 좁은 유리병이었다.
“젠장, 저것들 뭐야?”
수상함을 느꼈는지 사내들을 잡으려던 악시온이 우왕좌왕했다.
잡아야 할 게, 한 무리가 아니었으니까.
이 건물뿐 아니라 파랗게 빛이 나는 건물들 전부에서 수상한 이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쨍―!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건물을 향해 병을 내던졌고, 동시에.
“아악!”
“살려 주세요!”
화르르륵.
“불이야!!!”
곧바로 불길이 피어올랐다.
‘마, 말도 안 돼.’
기름을 채워 만든 화염병이었다.
이미 안쪽에 먼저 불을 내고 나온 모양인지, 건물들은 층마다 발갛게 물들었다.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된 거리.
곳곳에서 터지는 비명.
‘테러였다고?’
빛이 이곳을 가리킨 이유였다.
“리리스! 저쪽으로 물러나 있어!”
체시어가 나를 밀쳤다.
힘없이 밀려나는 내 시야에, 건물 안에서 썰물처럼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건, 이러면 어떻게 해야….’
왜 빛이 이곳을 향했는지 알아볼 새도 없이, 뭔가 대비할 새도 없이.
거의 1분 만에 일대를 살라먹은 불길.
그리고, 비명.
‘침착해. 침착하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 제복을 입은 치안대원들이 보였다.
“저, 저기요!”
“이봐, 너희들!”
나보다 악시온이 더 빨리 그들을 붙잡았다.
“리, 리브르 공작 각하? 왜 여기 계신….”
“지금 당장 이곳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해라. 황실, 마탑, 그리고 발렌치아노 후작가와 에르조 후작가에도. 마법사단장과 성법사단장은 지금 제도에 있으니까.”
“예, 예?”
황실, 마탑, 고위 귀족….
지원을 요청하라는 이들은 전부 고급 인력이었다.
평민 거주 지역에서 벌어진 화재 따위에 움직일 리 없는 게 당연한 이들인지라, 대원은 당황했다.
“테러 범위가 너무 커. 최대한 빨리 진압하지 못하면 이 일대가 다 끝장날 거야. 심각하다는 사실을 잘 전달하면 움직여줄지도 모른다.”
“그, 그….”
“정신 차려! 내 요청이었다고 하면 돼. 악시온 리브르가 현장에 있고, 지원을 바란다고 전해라.”
말을 맺으며 악시온이 소리쳤다.
“빨리 움직여!”
“네, 네!”
대원들이 떠나갔고, 곳곳에서 비명이 계속 터져 나왔다.
불길은 매초 몸집을 키웠다.
뜨거운 열기.
흩날리는 불씨.
그 사이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악시온과 체시어가 보였다.
머릿속이 새하얬지만.
‘뭔가 해야 해.’
힘껏 고개를 털어내고, 팔찌를 봤다.
‘뭘 해야….’
탁―!
“아!”
그때, 어느새 다가온 체시어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리리스, 정신 차려.”
“…….”
“전부 지원을 와도 진압하기 힘든 불이야. 이게 꺼지면 네 정체를 그냥 알리는 거나 다름없어.”
체시어는 매섭게 덧붙였다.
“바보 같은 생각 절대 하지 마.”
안다. 나도 알아.
불길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걸.
생명력이 얼마 드느냐를 떠나,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을 불린 화재가 단숨에 진압되는 것이 말도 안 되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뭘 해야 하지?’
다시 멀어진 체시어를 보며, 나는 진정하려 애썼다.
‘생각, 생각….’
그때, 중년 여인이 물 담긴 양동이를 들고 건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 멈춰!”
악시온이 급히 여인의 팔을 낚아챘다.
“이렇게 진압했다간 더 커지기만 하는 불이다. 지원이 올 테니 멀리 대피해 있어.”
“아흐, 아, 안 돼요. 저, 저기 우, 우리 아이가… 아이가 있어요…. 아직, 아직 못 나왔어요….”
여인이 울며 소리쳤다.
‘그래. 아직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몰래 빼내는 것쯤은…. 그런 것쯤은 해도 괜찮을지 몰라.’
나는 얼른 그들에게 달려갔다.
“삼촌! 이, 있잖아요….”
왜인지 악시온이 나를 보며 흠칫 굳었다.
“제가….”
“리리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네?”
“내가 하마. 너는, 지금부터, 절대. 무슨 일이 생겨도.”
“…….”
“아무것도 해선 안 돼.”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역시, 악시온이….
내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다는 것을.
“자, 잠깐만요! 삼촌!”
그는 경고하듯 내 어깨를 더 꽉 잡았다 놓고는, 자기 몸에 옅은 실드를 둘렀다.
“삼촌!!!”
그리고 불길 가득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