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73)화 (174/261)

* * * 

발렌치아노 후작가.

“뭐?”

마법사단장, 질리언 발렌치아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민 거주 지역에 일어난 테러.

들은 바로는 범위가 큰 불이었다.

고위급 능력자가 아니면 진압하기 어려울 듯한….

‘지금 갈 사람이 나밖에 없나?’

화재 진압에 특화된 능력자들은 단연코 법사들이었다.

“유, 율리안 에르조 후작은? 성법사단장도 지금 제도에 있을 텐데….”

“예. 안 그래도 에르조 후작가에도 지원 요청을 하러 갔습니다.”

“그, 그래?”

질리언은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하필 현장에 있던 악시온 리브르 공작이 자기를 콕 집어 지원 요청을 했다 하니, 무시할 순 없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곤란하다고.’

단장으로서 그는 제 군대를 자유롭게 움직일 권한이 있고, 고위 능력자라 화재 진압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

화재는 진압 시기가 중요하다.

황제의 허락을 기다렸다 움직이면 늦을 테고, 황제는….

‘허락하지 않겠지. 평민 거주 지역이라면… 어쩌면 황제에게는 반가운 일일 테니까.’

허락하더라도 이미 진압 시기가 다 지나버린 다음일 거다.

질리언은 황제의 눈 밖에 날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할 배짱도 없고, 그런 위치도 아니었다.

“미치겠구먼….”

질리언이 머리를 붙잡으며 고뇌했다.

* * *

그 시각, 황제의 방.

황제는 누군가에게 손수 차까지 타 주고 있었다.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군.”

손님은 마탑주, 오스카 마뉘엘.

“생각해 보니, 전에 소명 회담으로 자네를 귀찮게 한 일이 영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테오 앙트라세를 살린 일을 해명하라며 추궁당했던 회담….

벌써 한참은 지난 일이다.

‘갑자기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오스카는 황제의 의중이 무엇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알고 있겠지만, 당시 소명 회담은 보여주기식일 뿐이었어. 단장들이 하도 성을 내니, 내 별수 있나.”

“괜찮습니다.”

“뭐, 실은 그건 핑계고. 간만에 자네 얼굴 좀 봐 둘까 해서.”

한숨을 쉰 오스카가 결국, 못 참고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티타임 본론은 마지막 10분인 거 압니다만, 앞에 쓸데없는 20분 버티다가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체질이라.”

인상을 찡그리는 오스카에, 황제가 참듯이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한결같은 태도라 거슬리지도 않는 게 재미있달까.

“자네는 나와 닮았어.”

그 말에, 찻잔을 쥔 오스카의 손에 힘이 실렸다.

“알다시피 자네가 마법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능력자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쓸 데가 없지. 그러니 마법식을 독점하는 것이 곧 자네가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임을 알아.”

“…….”

“물론 자네가 어떤 마법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떤 수준의 마법까지 만들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네. 그렇다고 규제할 마음은 전혀 없어. 나와 이 제국에 힘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될 리 없으니까.”

“길게 말하느라 고생하십니다. 피차 다 아는 사이에 이렇게 격식 차려 말씀하실 필요는 없는데.”

마법식 얘기에, 오스카는 그제야 황제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았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습니다.”

“하하하.”

오스카는 사람 좋은 척 웃는 황제의 눈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이 쓰레기는 어쩜 이렇게 한결같냐.’

죽음 직전의 인간을 살린 마법.

그런 최고위급 수준의 치유 마법식을 만들 수 있다면….

‘쓸 만한 공격 마법식은 없냐고 물어보려고 날 불렀군.’

아마 황제는 생각했을 거다.

전쟁에 도움이 될 만한 파괴적인 마법식 또한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래, 네놈이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되긴 했지.’

에녹이 지난 4년간 제도 밖 권력자들을 거의 포섭하고, 제도 내 평민들의 인권을 개선하는 동안.

황제도 놀진 않았다.

4년 전, 대신관의 죽음으로 휘청였던 황실의 신권정치를 복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 왔으니까.

이제 제도의 분위기가 안정됐다고 여기는지 다시 정복 전쟁을 준비하려는 것이다.

“잘 보셨습니다, 폐하. 저는, 제 한 몸 편안하게 해줄 부와 남들 앞에서 머리 조아릴 필요 없는 권력만 유지할 수 있으면 뭐든 하는 놈입니다.”

오스카가 거만하게 등을 기대며 덧붙였다.

“그래서 지금 이대로,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그러한가?”

“예.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제국이야 쭉 건재하고 또 강대할 것이고, 저는 그 나라의 아쉬울 것 없는 권력자 아닙니까?”

“…….”

“저는 지금 이대로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더 바라는 거 없이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합니다.”

굳이 전쟁을 일으켜 땅을 넓히는 행위가 제 권력 유지에는 보탬이 될 일 없단 뜻이다.

오스카로서는 당연했다.

제국은 지금도 누구 하나 대적할 수 없는 강대국이고, 대륙 통일이야 황제만의 숙원일 뿐이니.

“굳이 이 줄을 잡을까, 저 줄을 잡을까 고민하는 인간들은 기반이 빈약한 놈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뭐, 아시다시피 전 아쉬울 게 없어서.”

황제에게 잘 보이려 알랑방귀를 뀔 처지도 아니란 뜻이다.

여유로웠던 황제의 눈빛이 점차 식었다.

그때.

“폐, 폐하. 라몬입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보좌관의 목소리에 황제가 인상을 팍 썼다.

“죄송합니다. 그, 급한 일이라….”

“들어오라 하세요.”

떨며 덧붙이는 말에, 피식 웃은 오스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들어와라.”

라몬이 허둥지둥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지금 평민 거주 지역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치안대원이 황실에 지원 요청을 하러 왔습니다.”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화재에 놀라서? 아니….

‘목숨이 두 개인 놈인가? 거기 불이 난 걸 왜 황제한테 말해?’

지원 요청 자체가 황당해서다.

황제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불을 꺼 달라고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말인가? 대원 누구지?”

“그것이… 지원 요청을 한 것은 현장에 있는 악시온 리브르 공작입니다. 대원은 그의 명으로 왔고요.”

“아아.”

황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날 것이야 이미 알았다. 직접 꾸민 일이니까.

그러니 보고할 필요가 없는데도 보좌관이 들이닥친 건….

“리브르 공작도 참, 황당하군. 대체 황제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 그러게 말입니다. 황실뿐만 아니라 마탑과 두 법사단장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는데….”

“그럼 뭐, 됐군. 단장 둘 다 지금 제도에 있으니 심심하면 가겠지.”

“아, 그. 예에…. 그렇겠지요?”

라몬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 봤다.

오스카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찻잔이나 기울이는 황제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어이가 없네. 그 인간들이 자기 눈치 보느라 못 갈 거 다 알면서.’

악시온이 굳이 황실에까지 지원 요청을 한 이유도 뻔했다.

황제에게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다.

단장들이 눈치 보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뜻이겠지.

‘마탑에도 연락했다니 그건 다행이네.’

오스카는 보좌관, 로벨에게 자신의 권한을 일부 위임해 두었다.

마탑을 비웠을 때 돌발 상황이 일어난다면, 로벨이 발 빠르게 대처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손님도 있는데 고작 그걸 보고하려고 온 건가, 라몬?”

“죄송합니다, 폐하. 현장에 리브르 공작도 있고, 마검사단장도 있다고 해서…. 예기치 못한 인력 손실이 있을 듯해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어이가 없군. 둘이 어디, 거기서 멍청하게 휘말려 죽을 이들인가?”

“그, 루빈슈타인 공녀도요….”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젓던 황제가 멈칫했다.

동시에.

“뭐?”

오스카가 휙 돌아봤다.

“누가 있다고?”

매서운 오스카의 물음에, 라몬이 땀을 닦으며 재빨리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루빈슈타인 공녀도 그곳에 있습니다. 살펴야 하지 않을지….”

황제가 낭패라는 듯 쯧쯧 혀를 찼다.

능력자들이 휘말린 것은 예상 밖의 일이지만, 악시온도 체시어도 딱히 걱정할 것은 없다.

그러나 에녹의 딸은….

‘그 계집은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 없군.’

만약 리리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뻔히 그 현장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대로 둔다면….

‘에녹이 난리가 나겠지.’

어디 에녹뿐인가.

인사도 없이 나가려는 오스카가 보여, 황제가 잡아 세웠다.

“멈추게. 어딜 가나?”

“마탑에도 지원 요청을 했다니 가 보려고 합니다.”

“하아, 자네가 거길 왜 가.”

일어나 다가간 황제가 오스카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공녀 때문이지?”

“…….”

오스카는 에녹의 딸을 마탑으로 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거의 집착 수준이랄까. 이미 그 일로 오스카와 부딪쳐 본 기억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보니, 내가 공녀의 마탑 영입을 도울 수 있을 듯한데. 전과는 상황이 달라져서 말일세.”

황제는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다.

이제 목줄로서의 가치도 없으니, 마탑에 가든 말든….

“에녹이 반대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 말을 잘 해 보도록 하지. 공녀가 마탑에 들어갈 수 있게….”

“폐하.”

오스카가 제 어깨를 잡은 황제의 손을 떼어내며 이를 꽉 물었다.

“불이… 났다니까 지금, 가 봐야 한다고….”

“괜찮아. 아이는 걱정 말게. 자네 같은 인력이 그런 별것 아닌 소동에 왜 움직이나.”

인자한 웃음을 지은 황제가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

황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순식간에 리리스가 나타났다.

엉망이 된 옷.

하얀 얼굴 이곳저곳에 묻은 재.

“흡.”

오스카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곧, 황제의 얼굴을 발견하고 굳었다.

“이런. 가엾기는.”

태연하게 다가간 황제가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뺨을 닦았다.

“아….”

숨도 쉬기 힘든 상황.

공포에 질려 한계까지 치뜬 리리스의 눈에 삽시간에 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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