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제의 방.
테이블 가득 간식이 놓였고, 떨고 있는 내 손에 황제가 포크를 쥐여줬다.
“이제 좀 진정이 됐느냐?”
“…네.”
우스운 광경이었다.
아비규환일 바깥의 상황과는 이질적인 한가로움.
‘진정해. 진정하자.’
상황은 다 파악했다.
황제는 뭔가 눈치채고 나를 자기 앞에 데려다 놓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 없다.
두렵지만 한시가 급했고, 최대한 태연하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저, 폐하….”
“음?”
“사, 삼촌이… 지금 좀 위험해서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삼촌? 아아, 악시온 경을 말하는 건가?”
“…네.”
“걱정할 것 없다. 그도 꽤나 강한 능력자니까.”
“삼촌 말고도…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지금 불이 난 곳에….”
어째선지 황제는 시큰둥해 보였고, 나는 그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지?’
황제가 평민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지금 불이 난 곳은 어쨌든 제도다.
황제, 자신의 터전 말이다.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불이 어디까지 번질지도 모르는데….
“신경 쓰여? 그럼 가자.”
그때, 오스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손발이 맞아 다행이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차피 마탑에도 지원 요청을 했었다고 하니.”
“잠깐.”
황제가 피곤한 듯 이마를 짚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아빠를 꼭 닮았구나.”
황제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었다.
“얘야. 내 한 가지 일러주마.”
“…아, 네.”
“계급과는 상관없이, 넌, 네 아버지의 딸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권력자로 살아가게 될 거다.”
“…….”
“자주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내 항상 너의 소식은 듣고 있었지. 신전에 봉사하러 다니는 것이나… 평민들과 어울리는 것들….”
나는 숨을 삼켰다.
“이제는 제법 자랐으니, 깨달아야 할 때지. 너는 태생적으로 그들과 섞일 수도 없고, 섞여서도 안 돼.”
“…….”
“네 다리를 타고 오르는 개미들을 상상해 봐라. 그것들이 사랑스럽거나 측은한가?”
황제는 다정하게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차라리 오늘 일로 네가 느끼는 게 있다면 다행이구나. 제도라고 다 같은 제도가 아니니, 앞으로 개미굴에는 얼씬도 말거라.”
쓰레기 같은 말들은 당연히 귀에 담지 않았다.
다만….
‘왜… 시간을 끄는 것 같지?’
일 분 일 초가 급박한 상황인데 황제는 나를 붙잡아 두려 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보냈을 때 따라나설 오스카를.
그리고 오스카가 불이 난 곳을 돌볼 상황을… 막으려 하고 있다.
‘대체 왜….’
순간, 어떤 의심이 머릿속에 번개처럼 피어올랐다.
뜬금없이 일어난 테러.
진압할 능력자들은 있지만, 딱히 황제의 눈치를 안 보고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오스카 정도.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스카는 지금 여기 붙들려 있었다.
왜?
제 발로 찾아왔을 리 없다.
황제의 호출이 있었겠지.
모든 게 잘 짜인 판 같았다.
‘설마, 이것도 직접 꾸민 거야?’
4년 전, 성수 사태 때도 황제는 사람이 죽고 땅이 망가지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를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도.
“아….”
나는 하릴없이 입술만 물었다.
‘그렇구나.’
테러가 일어날 곳에 파랗게 차올랐던 빛.
두 번의 경험으로, 그제야 나는 그 빛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단순히 많은 죽음이 일어날 곳을 알려주는 빛이 아니다.
주인공과 악당의 힘의 줄다리기. 그 혁명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무고한’ 죽음을 알리는 빛이었다.
* * *
그 시각.
‘내가 미쳤지, 미쳤어.’
마법사단장, 질리언 발렌치아노는 평민 거주 지역으로 달리는 마차 안에 있었다.
‘왜 가고 있지, 내가?’
일전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아들의 병역을 면제받으려고 마탑주에게 부정 청탁을 넣었던 사실이 드러났을 때….
“큼, 내 에녹 경에게는 면목이 없습니다.”
얼굴 보기 가장 민망했던 사람은 에녹이었다. 군대의 수장에게 병역 비리를 들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7년이나 탈영해 있던 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경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간 저 대신 고생해주셨으니.”
그러나 에녹은 퍽 너그러웠다.
“솔직히 저도 이제는 뭐가 맞고, 뭐가 그른지 잘 모르겠군요. 병역을 기피하려는 능력자들 잘못이 큰지, 죽을 때까지 군인으로 살아야 하는 악랄한 군법이 더 잘못됐는지….”
“…….”
“나라를 방비해야 하니 군인들은 필요합니다. 다만 군법은 좀 바꿔 보고 싶군요. 짧은 의무 복무 기간을 정해 놓고, 젊은 능력자들이 그만큼만 희생해 주더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경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질리언은 그때 너무 놀라, 답하지 않고 도망쳤다.
무척이나 예민한 화제였으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꺼냈을까?
군법을 지배하고 군대를 마음대로 통솔하는 것은 황제의 특권.
군법의 개혁을 논하는 것은 곧,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도 같다.
그날….
에녹이 그런 말을 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설마?
어쩌면?
상념에 빠진 사이, 마차는 현장에 당도했다.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질리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의 재난을 수습하려는 자신의 행동은, 분명히 황제의 눈에 거슬릴 것이다.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겠지.
항상 그래왔다.
‘죽으라고 사지에 출정을 보낸다든가.’
순간의 판단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상하고 있음에도….
질리언은 미친 척 움직였다.
믿는 구석은 없었다. 에녹밖에는.
“……?”
이윽고 마차에서 내린 질리언은 놀랐다.
현장에는 이미 많은 능력자들이 도착해 있었다.
‘아니, 마탑에서 왔다고?’
마탑 연구원들의 하얀 가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질리언 경?”
성법사단장, 율리안 에르조.
제 단원들을 데리고 와 있던 그가 질리언을 발견하고 놀라 달려왔다.
“경께서 오실 줄은….”
“어어. 그, 그렇게 됐네.”
젊은 피인 율리안은 움직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황제 무서운 줄도 잘 아는 친구였는데 말이지.’
마탑도, 율리안도 전부 의외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마법사단도 와 줬으니 진압이 훨씬 빨라질 겁니다.”
함께 혼날 사람들이 있어서일까.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질리언이 팔을 걷어붙였다.
“그래, 얼른 움직여 보세.”
* * *
제도, 파빌 신전.
대신전의 지하에는 성물 보관소가 있었다.
체시어는 망설임 없이 보관소의 고요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최후의 순간에는 특별한 ‘검’이 꼭 필요해! 체시어가 들어야 해!
리리스가 자신이 잡힐 것을 예상하고 에녹에게 남겨 뒀던 편지.
결국 체시어가 나중에 봐 달라는 약속을 어기고 찾아내 읽었던, 그 편지.
내용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뜻을 알 수 없었던 말들도 지금은 전부 이해되었다.
최후의 순간에는
그것은 곧, 황제의 목을 베는 순간.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특정한 무기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도.
“저… 마검사단장님?”
체시어의 뒤를 따르던 여러 명의 신관 중, 젊은 남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의 이름은 파울로 셔먼.
새로이 대신관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장님 부탁이라 제 재량껏 보관소의 문을 열어 드리긴 했습니다만, 원래는 이렇게 방문하셔서는 안 됩니다.”
들은 체도 안 하는 체시어의 뒤에 허둥지둥 따라붙으며 파울로가 덧붙였다.
“보관소를 열람해야 하는 사유를 말씀해 주시고 방문 전에 연락을 꼭 주셔야만….”
말하던 중, 체시어의 걸음이 멎었다.
‘찾았다.’
유리로 된 보관함 안에 가로로 놓인, 검 한 자루.
파울로는 체시어가 멈춰 선 성물함을 바라보았다.
궁금했다. 대체 다짜고짜 찾아와 보관소의 문을 열어 달라고까지 하며 찾는 것이 무엇인지….
[심판자의 검]
4년 전, 가짜 계시 소동을 일으킨 선대 대신관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성물이다.
원정대가 회수하려 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검.
자드키엘이라는 사제가 유일하게 들 수 있어서 겨우 옮겨온 성물.
“이거였나요? 급히 확인하시려던 성물이….”
쨍―!
말하던 순간.
“허억!”
“흡!”
체시어가 내지른 주먹에, 성물을 담고 있던 유리 보관함이 하릴없이 산산조각 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신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다, 단장님? 이, 이게 대체 무, 무슨 짓….”
체시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먹 위에 박힌 유리 조각을 잡아 뜯듯이 쓸어냈다.
뚝, 뚝.
고요한 사위.
모두 숨을 참은 가운데, 바닥 위로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선명했다.
“…….”
체시어가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신관들은 형형하게 살의가 들어찬 체시어의 붉은 눈을 발견하고 겁에 질려 숨도 쉬지 못했다.
“비키세요.”
비키지 않으면 분명, 이 남자는 자신들을 죽이고 지나갈 것이다.
모두 그 사실을 알았고, 덜덜 떨며 양손을 머리 옆으로 세운 채 비켜났다.
반항하지 않겠다는 듯.
“…….”
숨 막히는 공포가 내려앉은 그 틈으로, 체시어는 유유히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