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서 성물을 강탈해 간 마검사단장.
체시어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굳어 있던 신관들이 하나둘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대신관님!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
“조용!”
대신관, 파울로는 복잡한 머리로 깨어진 유리함을 바라보았다.
[심판자의 검]
갑자기 저 성물이 왜 필요했을까?
마검사단장 정도 되는 자라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합법적인 절차로 가져갈 수도 있었다.
문제가 될 것이 분명함에도 신관들을 겁박하고 소란까지 피워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아니, 고민할 필요 없다.’
파울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가 뭐든, 이 일로 체시어가 피해를 보아선 안 됐다.
그는 황제의 검이기 때문이다.
“나와 대신전을 지지해 줄 무력이 없으면 곤란하지. 그는 젊은 세대의 도스고, 곧 대적할 자 없는 능력자가 될 걸세. 나는 그를, 내 검으로 삼을 것이고.”
황제는 체시어를 새로운 무력의 기반으로 삼겠다 말했다.
“듣기로는 에녹 경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하던데요. 순순히 따를까요?”
걱정하는 파울로의 질문에 황제는 웃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보였다.
“이미 공을 들이고 있고, 반쯤은 넘어왔지. 에녹이 뭘 가르쳤든, 아주 작은 틈만 있으면 그뿐이네. 비집고 들어가면 돼.”
황제의 말대로라면, 체시어는 귀한 인력이다.
판단을 마친 파울로가 말했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세요. 성물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내가 마검사단장에게 양도한 것입니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지요.”
* * *
같은 시각.
중부에 머무르고 있던 에녹 루빈슈타인의 책사, 조제프 뤼트먼.
그는 손에서 카드를 파라락 넘겨 가며 킬킬거렸다.
‘순조롭구먼, 순조로워.’
근처에 토벌을 왔던 에녹과 오랜만에 접선했고,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 뱀이 체시어 리브르를 노릴 것쯤이야 뻔했지.’
체시어는 황제의 구미를 당기는 능력자였다.
숙원을 이루기 위해 체시어를 손에 넣고 싶어 할 것쯤은 이미 조제프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다만, 에녹과의 유대가 공공연하게 알려진 체시어를 어떻게 포섭하려 들까?
―황제가 써먹을 만한 패는 하나였다.
“체시어 리브르의 친부가 오닉스 후작이었던가요? 아마 가까운 시일 내에 그가 접근할지도 모르겠군요. 경계하십시오.”
조제프의 예상대로.
체시어가 기사 서임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오닉스 후작이 접근해 왔다.
“친부에게 마음을 연 것처럼 연기해야 합니다. 거의 넘어왔다고 판단되면, 황제는 오닉스 후작을 통해 자기 꿍꿍이를 내비칠 테니까요.”
다만, 변수는….
‘정말로 친부에게 마음을 여는 일이 생겨선 안 되는데.’
체시어는 아직 어렸기에 휘둘리기 쉬웠고, 반란에 목숨 바칠 만한 목적의식도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알면서도 미끼를 물고, 체시어가 반란군을 배신하는 것.
“흠, 역시 걱정되네.”
조제프가 중얼거렸다.
* * *
제도, 파빌 신전의 게이트실.
토벌을 마치고 성기사 5인과 함께 귀환한 에녹은, 조제프를 만나고 온 후라 생각이 많았다.
“체시어 리브르를 잘 살피십시오. 각하께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하셨지만… 그래도 혈육이니, 친부와 이리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체시어는 에녹의 부탁대로 마음을 연 척, 친부인 오닉스 후작과 몇 달째 만나오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잘해줬다.
연기인지 아닌지 후작도 몰라보고 황제도 어느 정도 넘어왔을 만큼.
‘마탑주도 깜빡 속을 정도였으니.’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스카와 나눈 대화.
“마탑주, 대체 왜 그렇게 틈만 나면 체시어를 죽일 듯이 노려봐?”
“마음에 안 들어서요. 혹시나 댁 딸이랑 연애 같은 거 못 하게 감시하고 있는 거예요.”
“…왜 마음에 안 드는데?”
“쟤 친부랑 다시 만나고 있는 거, 당신도 안다면서요?”
알고 보니, 오스카가 다정한 둘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다.
때는 거슬러 올라가, 두 달 전.
오스카의 소명 회담이 있던 날.
표정이라곤 없는 체시어가 활짝 웃길래 대체 누굴 그리 반가워하나 봤더니, 오닉스 후작이었다고.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아주 잘도 따르던데? 어이없어서 내가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이랑 리브르 공작이 서운해서 뒈질 일이라고.”
“어어, 그랬구나.”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둘 다 안대. 괜찮다고 했대. 그리고 뭐, 옛날에 있던 앙금은 다 풀렸으니까 앞으로도 잘 지낼 거라던데요?”
체시어는 제 상황을 철저히 숨기려는지, 후작에게 살갑게 군 이유를 오스카에게도 해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에녹이 대신 오해를 풀어주었지만….
“아니, 그게 연기였다고? 혹시 당신, 직접 본 적 있어요? 연기라면 더 무서운데? 연기하다 혹시 친부한테 진짜 넘어가 버린 건 아니고?”
오스카는 계속 의심했다.
책사인 조제프와 똑같은 걱정을 하며, 혹시 체시어가 배신하게 되는 상황을 꼭 경계하라고 했다.
하지만 에녹은….
‘체시어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끝내 황제의 목을 벨 수 있다면 체시어는 뭐든 할 것이다.
‘오히려 다른 걸 걱정해야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미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체시어가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
에녹은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 * *
도착해서 본 황실은 평화로웠다.
악시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곳이 피바다가 되어버린 모습을, 오면서 몇 번이나 상상했던가.
황제궁.
‘제발. 늦지 않았길.’
체시어는 무고한 이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혹시 마검사단장이 방문했나?”
악시온은 황제궁의 방문객을 관리하는 시종에게 다급히 물었다.
체시어는 최대한 조용히 황제 앞에 가려고 했겠지만, 감히 황제에게 당일 독대를 청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막혔을 게 분명했다.
‘너무 조용한데? 안 온 건가? 내 착각이었나?’
정말 마음을 먹었다면, 입궁을 막는 궁인들을 제압하고 쳐들어갔을 텐데….
“마검사단장님이라면 조금 전에 찾아오셨습니다. 보좌관님을 대동하고 올라가셨습니다.”
“…? 그게 무슨….”
독대를 허했다?
황당해하는 악시온의 표정을 알아봤는지 시종이 웃으며 덧붙였다.
“폐하께서 몇몇 분의 방문은 당일이라도 항상 허락해 두셔서요.”
“……?”
어이없는 상황.
눈앞이 아찔했다.
황제의 목을 베러 온 이에게, 길을 대놓고 터 준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상상도 못 하겠지.’
이들은, 상식 밖의 일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체시어가 무슨 마음으로 이곳을 찾아왔는지 아무도 모를 뿐더러….
단신으로 프리메라에게 맞서려 하는 이가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겠지.
“고, 공작 각하!”
악시온은 무작정 달렸다.
망설이는 일 분, 아니 일 초 만에도 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제발, 제발!’
당황하며 막아서는 궁인들을 제치면서, 빠른 걸음으로….
이윽고, 긴 복도 끝.
황제의 방으로 향하는 체시어의 뒷모습이 보였다.
* * *
결심한 순간부터, 체시어의 가슴은 뛰지 않았다.
리리스가 잘못될까 봐 긴장으로 요동쳤던 게 언제였냐는 듯.
그는 놀라우리만치 차분했다.
“체시어 경, 먼저 오신 손님이 있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또, 그… 검은 검집에 좀 챙겨 오시든가 하셨어야….”
여기까지 오는 것은 어이없을 만큼 쉬웠다.
황제의 보좌관이라는 자는 검을 덜렁 들고 있는데도 무서워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황제가 프리메라이기 때문이다.
그 누가 감히 프리메라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을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우스운 일이었다.
황제가 평범한 능력자였다면….
무고한 피를 흘리는 일 없이, 이리 쉽게 들어올 수는 없었겠지.
“무기류는 반납해 주십시오.”
가까워지는 황제의 방.
앞을 막아선 다섯 명의 친위대 중 한 명이 말했다.
이들은 황제의 능력으로 그에게 절대복종하는 5인의 능력자들이다.
아마… 이곳에서 처음 보는 피가 되겠지.
막아서면 벤다.
“체시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악시온의 목소리와 함께, 체시어는 검을 바로 잡았다.
* * *
원하는 만큼 붙잡아 두어서일까.
황제는 가려는 둘을 막지 않았다.
“마탑주, 내 또 연락하겠네.”
오스카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리리스의 손을 잡고 뒤돌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힐끔 내려다본 아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리리스는 아마도, 아무런 지원 없이 계속 불타고 있을 현장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지만….
‘마탑에서 갔을 테니 괜찮을 텐데.’
나가면 그 사실부터 말해 줘야 할 듯했다.
“얼른 가자.”
조그맣게 속삭이고, 문을 연 순간.
오스카가 놀라 숨을 삼켰다.
바로 코앞에 보이는 낯익은 얼굴.
체시어.
조금 전까지 현장에 있다 왔는지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고.
‘이게 지금 무슨….’
서서히 시선이 내려갔다.
손에… 검이 들려 있다.
황제의 방 앞에, 검을 쥔 채로 와 있는 것이다.
오스카는 찰나에 깨달았다.
체시어가 뭘 하기 위해, 여기에 왔는지.
“무슨 일인가?”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도 쉬지 못할 기분.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