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하얘진 순간.
오스카는 리리스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가만히 있어.’
그 뜻이었다.
힐끗 내려다본 리리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파르르 떨고 있는 손만이 충격받은 심정을 대변했다.
“웬 소란인가?”
침착하자.
다가오는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자 오스카는 곧장 리리스를 끌어안고 실드를 둘렀다.
지금부터는 퍼포먼스.
“뭐 이런 정신 나간 새끼가 다 있지? 칼 안 집어넣어?”
리리스가 황제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음을, 무사함을 보여줘야 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딴 걸 덜렁덜렁 들고 찾아와?”
오스카는 리리스가 안전하게 제 품에 있다는 걸 내보이며 체시어를 노려보았다.
체시어의 시선은 리리스에게 빤히 꽂혀 있었다.
긴장한 기색도, 두려운 기색도 없이 그저 리리스의 상태를 확인하겠다는 듯.
“이봐, 칼 치우라는 소리 안 들려? 그리고 여기 인간들은 대체 나랏돈 처먹으면서 하는 일이 뭐야?”
오스카가 보좌관, 라몬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오, 오해십니다. 안쪽에서 먼저 문을 여시는 바람에…. 체시어 경은 폐하께 독대를 청하고 찾아오셨고, 무기는 방금 반납하고 대기하려….”
“뭐지.”
황제가 옆으로 다가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체시어의 시선이 그에게 옮겨간 걸 본 순간, 오스카는 숨을 참았다.
어디로 튈지 모를 놈이다.
리리스가 무사한 걸 확인했다고 검을 내려놓을까?
죽음도 불사한 듯한데, 여기에서 황제와 함께 죽는 것이 쉬운 길이라 생각한다면?
“아….”
같은 생각이었는지, 품 안의 리리스가 빠져나가려고 움직였다.
지금 리리스가 체시어를 말리면….
“안 돼.”
조용히 속삭인 오스카가 리리스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할 만큼 했어.
저놈이 어떤 선택을 하든….
너는 살 수 있으니까 괜찮아.
“폐하!!!”
그때, 악시온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지금 당장… 재난 지역에 능력자들의 지원을 허해주십시오.”
“뭐라?”
“아, 악시온 경? 이 무슨 무례입니까? 황제궁에 절차도 없이….”
라몬이 경악했다.
악시온이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 따라온 궁인들이 뒤에서 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다.
“하, 나 이것 참.”
황제가 인상을 썼다.
노여워하는 그 모습에 전부 떠는데도, 악시온은 체시어의 앞을 막고 서서 계속 말했다.
“원인은 신원 불명인 자들의 집단 테러였습니다. 진압과 동시에 속히 관련자들도 잡아들여야 합니다. 마검사단장에게….”
악시온은 체시어가 손에 든 검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그들의 즉결 처분권을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황제의 시선이 천천히….
제 앞을 막은 악시온에게서 그 뒤에 선 체시어에게로 옮겨가, 그가 손에 쥔 검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래?”
황제가 한 발자국, 악시온의 앞에 다가섰다.
“그것 때문에 쳐들어왔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악시온 리브르.”
숨이 섞일 만큼 악시온에게 얼굴을 바짝 붙인 황제가, 매섭게 중얼거렸다.
“자네가 황제인가?”
“…….”
살기를 내뿜는 황제의 기세에 모두 숨을 삼켰지만, 악시온만은 그의 눈빛을 똑바로 받아치며 버텼다.
숨 막히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뭐, 그래.”
이내 피식 웃은 황제가 한 발짝 물러나며 양팔을 쫙 펼쳤다.
“지금까지 목숨 바쳐 나라를 수호해 온 그대의 노고에 권력을 내린 것도 나이니, 이런 건방진 짓거리를 한 번은 눈감아주기도 해야겠지.”
“…….”
“하지만 이 난리를 피우고 너무 조용히 넘어가도 내 면이 서지 않는 일이라….”
“송구합니다. 후에 징계를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 불 지른 놈들은 황실에서 따로 조사하도록 할 테니 두고, 자네는 가서 진압에나 신경 쓰게.”
황제는 뒤돌며 매섭게 중얼거렸다.
“다들 이만 나가 봐.”
* * *
무슨 생각으로 황실을 나섰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걸로… 됐어? 황제가 정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고?’
아니,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황제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더라도 지금 우리를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하에 움직였겠지.
‘그러면? 어디까지 눈치챘을까? 체시어가 자길 죽이러 왔다는 사실? 그러다가 반란군의 존재도 짐작해 버리면?’
생각하며 걷던 도중 휘청,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오스카가 거칠게 내 팔을 낚아챘다.
“야, 정신 차려.”
“아, 네….”
그때.
묵묵히 앞서 걷던 악시온이 뒤돌았다. 그리고 조용히 뒤따르던 체시어의 앞에 다가가 섰다.
“왜, 갔지?”
조용히 묻자, 체시어는 잠깐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생각하시는 이유입니다.”
“이 자식이!”
악시온이 달려들었다.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체시어의 멱살을 붙잡았다.
“삼촌!”
나는 악시온의 허리를 끌어안고 말렸다.
“그러지 마세요. 이건, 이건 제가….”
울지 않으려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태는 전부 내 잘못이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체시어는, 내 정체가 들통난 줄 알고….’
황제와 싸우러 왔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자신 또한 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뭘 한 거지?’
죽일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체시어를.
‘왜… 이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거야?’
체시어는 변했다.
혁명의 성공 따위가 아니라 오직 나의 생존만이 강박적인 목표가 되어 있었다.
아마 오래전부터, 황제와 함께 죽는 것을 각오했겠지.
“제가 잘못한 거예요….”
“…….”
이윽고 체시어를 붙든 악시온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지그시 눈을 감고 두어 번 숨을 고르던 악시온이 매섭게 등을 돌려 떠나갔다.
“에휴, 진짜.”
악시온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차던 오스카도 뒤따랐다.
이윽고 둘만 남았을 때.
체시어는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괜찮아?”
“…….”
그저 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옅은 웃음까지 어린 표정.
나는 그때야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시어….”
“…….”
“내, 내가… 내가 잘못했어.”
체시어만큼이나 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프리메라로 태어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뭔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었고….
아빠의 딸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정의를 위해 움직여야만 한다고 여겨 왔었다.
하지만?
결국 그 행동들이 번번이 이렇게 내 목을 옥죄어오면?
그러다 또, 체시어가 뛰어들면?
다수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정의는 나뿐 아니라 나의 사람들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나도 너랑 똑같아.”
그들의 무덤 위에 이룩한 평화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나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아니니까.
“얼굴도 모르는 백 명보다, 내가 아는 한 명이 더 중요해. 그런 상황이 오면 고민하지 않을 거야.”
나는 언젠가 체시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보다, 네가 더 중요해. 그러니까 이제 그냥… 모른 척할게. 약속해. 앞으로 나 때문에, 네가….”
“…….”
“…네가 이렇게….”
“아니야.”
체시어가 끝내 맺지 못한 내 말을 잘랐다.
“힘이 있는 사람은, 그 힘을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거야. 그렇게 배웠잖아. 넌 틀리지 않았어.”
“…….”
“나도 네가 정답인 걸 알아.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체시어의 눈빛은 평온했다.
이번 황제와의 대면이, 그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주지 않은 듯했다.
“뭘 하든, 넌 무사할 수 있어.”
오히려….
그토록 두려워했던 존재가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확인받은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내가 그렇게 할 거니까.”
* * *
“소,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라몬이 고개를 숙였다.
등을 내보이며 창가에 서 있던 황제, 니콜라스가 한숨 쉬었다.
“자유로이 입궁하도록 몇몇 예외를 뒀던 명을 거두겠다. 나를 알현하려는 자들은 철저히 절차를 거쳐 들여보내라.”
“분부 받잡겠습니다.”
라몬이 나가고, 니콜라스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태연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앞에 감춘 그의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뭐지?’
찰나에 마주했던 체시어의 눈빛.
그 맹수 같은 사나움.
니콜라스는 단 한 번도 아랫것들에게 그런 시선을 받아본 적 없었다.
당연했다. 도대체 누가 황제에게 이빨을 드러낼 수 있을까?
능력자들의 힘은 전부 프리메라인 자신에게 속해 있었다. 손짓 한 번에 체시어는 무릎 꿇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히 그가, 제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에녹과 같은 이유였다.
복종하게 만들기에는 너무 과한 능력치를 지녔기에, 프리메라라도 큰 부담을 감수해야 하니까.
“이런 건방진!”
새파랗게 어린 녀석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뜻대로 안 된다면 자신을 위협할 마음까지 먹고 찾아왔다.
분명히, 그런 눈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에 그리 화가 났고, 무엇을 바라고 왔는가?’
악시온은 재난 지역으로의 지원과 테러범들의 즉결 처분을 요구하러 찾아왔다고 했지만….
‘아니, 그럴 리 없다.’
니콜라스는 소년병 시절부터 체시어를 눈여겨보았다.
괜히 그를 새로운 검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그럴 만해서였다.
체시어는, 대의와 사명감으로 검을 잡는 에녹과는 확실히 다른 부류였으니까.
‘그렇다면 왜?’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 손을 쥐며, 니콜라스가 이를 갈았다.
지금, 신과도 같은 자신이….
한낱 능력자에게 떨고 있는가?
니콜라스가 잘근 입술을 물었다.
‘대체 뭘….’
체시어가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친부인 오닉스 후작을 통해 잘 구슬려오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뭘 놓친 거지?”
그 와중에 체시어를 분노케 한 것은, 도대체….
“아.”
순간, 니콜라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리리스 루빈슈타인…?”
아무 생각 없이, 마탑주를 붙잡아두기 위해 데려왔던 아이.
무심코 한 행동이었지만, 아이가 난데없이 사라진 사실에 가슴 철렁했을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다.
“하, 하하….”
하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분노할 일이었다고?
“재미있군.”
딱히 둘의 관계를 염두에 둔 적은 없었는데….
에녹의 딸인 리리스와 에녹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자란 체시어.
생각해 보면, 남매만큼이나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래, 네가….”
제국 최고의 능력자, 에녹 루빈슈타인이 제 목숨처럼 아끼는 딸.
마탑주, 오스카 마뉘엘이 답지 않게 혈안이 되어 집착하는 인재.
새로운 세대의 권력자, 체시어 리브르가 황제에게 이를 드러낼 만큼 가까이 여기는 존재.
“네가 아직까지….”
자신이 쉬이 휘두를 수 없는 능력자들의 목줄을 한 명이 쥐고 있었다.
“나에게 꽤 중요한 패였구나.”
낮게 읊조리며, 니콜라스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