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도로 돌아온 에녹은 평민 거주 지역에서 일어난 화재 사실을 전해 듣고 바로 현장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그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랐다. 두 법사단에 마탑까지 지원을 와서 화재는 이미 진압되어 있었으니까.
‘어떻게 된 일이지?’
마탑은 그렇다고 쳐도, 고위 능력자들이 이리 신속하게 출동했다는 것은 놀라웠다.
황제가 순순히 지원을 허락했을 리는 없을 텐데….
“각하.”
그때, 로브 차림의 사내 하나가 다가와 에녹에게 인사하며 은밀히 쪽지를 주고 떠나갔다.
[테러 주동 세력의 실마리 확보. 방문 요망.]
짧은 글 아래에는 붉은 잉크로 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는 정보 길드 <붉은 매>의 수장, 리코의 연락이었다.
‘테러라니? 젠장,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주변의 지원 인력 하나를 붙잡고 자초지종을 물으려던 차.
현장에 도착한 악시온과 오스카가 보였다.
“악시온!”
“아, 왔냐.”
어째선지 악시온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는 에녹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애는 체시어랑 같이 집에 있다. 걱정하지 마.”
“뭐? 갑자기 애는 왜….”
“놔둬요, 놔둬.”
악시온을 뒤따르려던 에녹을, 오스카가 붙잡았다.
“마탑주, 대체 무슨 일이야?”
오스카는 난처한 듯 이마를 긁적이다가 이내 말했다.
“애는 무사해요.”
“공주 얘기는 자꾸 왜 나오는데?”
에녹의 얼굴은 불길함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사하니까… 음, 흥분하지 말고 들어요.”
* * *
“공주야!”
에녹이 돌아왔을 때.
리리스는 태연히 책상 앞에 앉아 뭔가 끼적이고 있었다.
“아빠 왔어?”
“너… 괜찮아?”
“응? 아, 응! 나 다친 데 하나도 없어. 황제 폐하가 구해주셨거든.”
난데없이 황제 앞에 끌려가 놀란 마음에 괜찮냐고 물은 것이었는데.
아이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체시어는?”
눈치를 보던 에녹이 조심히 묻자, 리리스가 돌아봤다.
“체시어한테 뭐라고 하지 마.”
“어? 아니, 아빤….”
“오늘 거기에 나 때문에 간 거야. 불이 날 줄은 몰랐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많이 죽을 줄은 알았거든.”
“…….”
“…혹시 사람들 많이 죽었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던 걸까.
떨리는 목소리를 눈치챈 에녹이 리리스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아니, 아무도 안 죽었어. 능력자 아저씨들이 다행히 빨리 와 줬거든. 다친 사람들은 있는데 걱정하지 마. 자드키엘 사제님이 있는 신전에서 다 치료받고 있어.”
“아,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은 리리스가 말했다.
“음, 그리고 아빠. 괴물 그만 잡고 제도에 있으면 안 돼? 아빠가 없으니까 너무 힘들고 무서웠어.”
“…….”
에녹이 멈칫했다.
아이 말이 맞았다. 자신이 제도를 비우지만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
“아빠.”
“응….”
“나, 있지….”
리리스가 힘없이 안겨 왔다.
“사람들 살려야 하는지는 아는데, 그렇다고 대신 죽고 싶지는 않아.”
“…….”
“생명력 조금 쓰는 건 하나도 안 아까운데, 그러다가 아빠나 삼촌이나 체시어가 위험해지는 건 싫어.”
“…그래, 응.”
“미안해…. 나는 아빠 딸이지만, 아빠처럼 용감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아서…. 그래서, 미안해. 전부 살리지는 못할 것 같아….”
“아니야, 공주야. 아빠가….”
에녹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는 평생, 자신을 보고 자랐다.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야.
아픈 사람들은 도와줘야 해.
가난한 사람들과는 나눠야 해.
아빠는 강하니까,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싸워야 해.
그 가르침들은 어느새 아이에게 강박이 되어 있었다.
귀족이고, 능력자이고, 프리메라인 자신이 뭔가 해야 한다고 여기도록 만들었다.
“아빠, 아빠가 미안….”
에녹이 떨리는 팔로 리리스를 꽉 끌어안았다.
긴장이 풀린 아이는 그제야 아빠 품에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 *
이튿날.
리리스 루빈슈타인, 멋지게 부활!
1. 우리 편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할 것.
2. 반란군의 실마리를 잡히지 않게 할 것.
3. …….
나는 노선을 바꾼 행동 강령을 쭉 정리해 둔 종이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걸리면 큰일 날 말들을 대놓고 적어 놓고도 걱정 없는 이유?
한글로 써 놔서다.
나 빼고는 아무도 못 읽는다.
“음, 주스 맛있다.”
고급 유리잔에 담긴 과일 주스를 마시며, 오스카를 기다리는 중.
여기는 마탑, 접견실이었다.
이윽고 문이 부서져라 들이닥친 오스카가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앉았다.
“뭐냐?”
“엥. 저 시간 많은데. 이렇게 안 달려오셔도 됐어요.”
“…달려온 거 아닌데?”
거짓말.
내가 먼저 마탑에 찾아온 건 처음이라 놀랐는지 헐레벌떡 달려온 게 뻔히 보였다.
“우선… 마탑주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
생소한 호칭이 의아했는지 잠시 눈을 굴리던 오스카가 이내 픽 웃으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진지하게 들으라는 거지?”
“네.”
“그런데 너, 표정 좋아 보인다? 며칠은 앓아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아픈 것도 아닌데요, 뭐. 그리고 앓아누울 시간이 어디 있어요.”
애도 아니고. 얼른 정신 차리고 사태를 수습해야지.
“스승님, 다름이 아니라!”
나는 허벅지에 손을 얹고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제가 황제 폐하를 한번 뵈어야 하는데 자리를 마련해 주십쇼!”
“…….”
오스카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자기 오른쪽 귀를 긁적였다.
“늙었는지 요즘 귀에 헛소리가 다 들리네. 다시 말해 봐.”
“넵. 제가 황제 폐하를 뵙고….”
“어떡하냐, 너.”
내 말을 자른 오스카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나가 버렸네. 하지만 이해한다.”
“…….”
“눈앞에서 불은 나지, 갑자기 황제 앞에 끌려갔지, 거기에 체시어 놈이 칼춤 추려고 찾아와서 간이 오그라들었을 테니까. 정신 나갈 만도 해.”
“정신 안 나갔고 정상이에요.”
“그래? 그럼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도 알겠네?”
“스승님, 전 이번에 깨달았어요. 제가 황제 폐하를 만나는 걸 무서워할 필요가 있어요? 제 이마에 프리메라라고 써 붙여진 것도 아닌데?”
“간이 커지다 못해 터졌네?”
“간 제대로 붙어 있어요. 전 꼭 스승님이랑 같이 황제 폐하를 보러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도와주세요.”
“그래. 어차피 안 도와줄 거지만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
오스카는 뭔 말을 해도 안 들어주겠다는 태도로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척, 다리를 꼬았다.
나는 챙겨온 종이를 읽었다.
“황제 폐하를 만나야 하는 이유, 첫 번째. 황제 폐하한테 제가, 말만 잘하면 쉽게 구슬릴 수 있는 아이인 걸 보여 주려구요.”
“뭐?”
“솔직히 제가 프리메라여 봤자 황제 폐하랑은 계급장 붙이고 싸워도 지고 떼고 싸워도 지잖아요.”
“…그래서.”
“그럼 차라리 황제 폐하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는 편이 나아요. 굳이 능력 써서 저를 휘두를 필요는 없겠구나, 생각하게요.”
“…….”
“미쳤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정말 황제 폐하를 만나는 게 무섭지 않아졌어요.”
“어, 안다니 다행이다. 너 미친 거 맞아.”
“생각해 보니까 이번 일로 이득 본 게 많더라구요. 황제 폐하는 이제 절대로, 쉽게 제 정체를 의심할 수 없어요.”
“뭔 개소리야?”
“어제 보셨죠? 황제 폐하가 저를 데려왔을 때 이상하다는 걸 하나도 못 느끼더라구요?”
항상 궁금했는데 나 혼자서는 절대 알아볼 수 없던 정보가 있었다.
바로 프리메라가 프리메라를 조종하는 데 얼마큼의 생명력이 드느냐, 하는 것.
“제가 옥타바인 줄 알고 능력을 썼잖아요? 생명력이 예상보다 더 많이 들었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낌새가 없었죠?”
“…….”
“그 말은, 프리메라를 다루는 데 생명력이 별로 안 든다는 뜻이에요. 옥타바 다루는 것만큼이나 쉽다는 거죠.”
슬픈 얘기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반란이라는 역사가 쓰이지 않았던 제국.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두 프리메라 사이에 힘의 섭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선대가 후대를 다루는 것이 까다로웠다면 한 번쯤 반항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는데.
‘반항은 무슨. 엄두도 못 냈던 거였어.’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다.
프리메라는 그 어떤 능력자보다 전능하지만, 반대로 같은 프리메라에게는 하릴없이 무력한 존재였다.
“저한테 능력을 직접 써 봤으니 오히려 다행이랄까? 생명력이 얼마 안 들었으니 옥타바라고 아주 땅땅, 증명한 셈이잖아요?”
“하, 이거 대책 없이 해맑네. 그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아. 그런데.”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냥 가만히 있으시지. 왜 황제가 널 휘두를 거라 지레짐작하고 먼저 아가리에 들어가겠다는 거야?”
“아, 그건.”
“불났을 때 널 데려왔던 거? 그건 너를 구하려고 했다는 명분이 있어. 황제가 이유도 없이 널 납치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아뇨. 그걸 걱정해서가 아니라, 제가 이번에 폐하의 표적이 됐다는 아주 강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난 지금까지 황제의 레이더에 안 걸리고 살아왔다.
계급이 옥타바이니 나를 이용해 아빠를 쉽게 휘두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때 그 체시어의 살기. 황제가 몰라봤을 리가 없거든.’
짐작하건대 황제는 체시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추측했을 테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유가 나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전 황제 폐하한테 딱히 쓸모가 없었단 말이죠? 그런데 인제 보니, 어라? 스승님이 절 엄청 아껴 주시기도 하고, 또….”
“그래.”
오스카가 한숨을 쉬었다.
“체시어, 그놈도. 황제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번에 그놈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겠지.”
바로 그거다.
황제가 탐내는 권력자들이 아주 줄줄이 소시지처럼 내게 엮여 있다.
이때, 내가 황제라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날 꾀어내서 써먹어야지.’
이번 일은 어쩌면,
전화위복(轉禍爲福).
황제는 나를 얻어야만 오스카도, 체시어도, 아빠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이용하려는 황제의 목줄을 쥔 셈이 아닌가?
이 협상 테이블에서 나는 결코 을이 아니었다.
“제가 황제 폐하를 만나야 하는 이유, 두 번째!”
나는 간절히 손을 모았다.
“악시온 삼촌 때문이에요.”
* * *
“흐음.”
시큰둥한 표정의 황제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손으로 천천히 훑었다.
그 대수롭지 않은 행동에도 회의장에 모인 몇몇 능력자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긴장했다.
“여기.”
이윽고, 황제의 손가락이 어느 곳을 짚었다.
[모아르테 제도]
회의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이내, 툭.
누군가가 놀라서 쥐고 있던 펜을 놓쳤다.
“악시온 경?”
“…예, 폐하.”
“여기 터를 잡은 마수들을 싹 다 밀어버리고 우리 제국 깃발을 꽂아 두고 오면 어떨까?”
“…….”
침묵하는 악시온을 보며 황제가 피식 웃었다.
“자네가 사령관을 맡게. 3군 능력자들을 자네 군대로 편성해 주지. 그리고….”
황제가 빙 둘러앉아 있던 이들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도스 계급의 능력자들 열 명.
아마… 황제는 잃어도 아깝지 않을 이들로만 추려 불렀을 것이다.
“여기에서 함께 갈 이들을 직접 골라 보게. 두 명 정도?”
누군가가 숨을 삼켰다.
혹시 자신이 지명당할까, 전부 하얗게 질린 채 떨고 있었다.
‘잔인하군.’
악시온은 속으로 웃었다.
이는, 함께 무덤에 묻힐 자들을 고를 선택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괜찮습니다.”
이윽고 악시온이 일어났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