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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182화 (183/261)

182화

“이야, 그런데 여기 경치 죽이네. 마수들 정리하고 관광지로 삼으면 딱 좋겠는걸.”

“…….”

오스카가 멍해 있건 말건 에녹은 한가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들어가서 살아 나온 이가 없다는 악명과는 사뭇 다른 풍경.

“아니, 그런데 마수는 대체 어디 있어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오스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살아 나오기 전혀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소문이랑 달리 아무것도 없었던 거 아냐? 그래 놓고 토벌한 척 허세 부렸던 거 아니에요?”

“아하하! 그랬을지도?”

장난스럽게 웃던 에녹이 검을 들어, 반쯤 해가 넘어간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 나올 거야. 밤눈 밝은 마수들이랑 달리 능력자들은 시야가 어두운 채로 싸워야 하니 절대적으로 불리하지.”

“아하, 그래서 살아 나온 사람이 없었군.”

“아마도. 그런데 마탑주, 정말 괜찮겠어? 여기가 괜히 사지가 아닌데 혹시 잘못되면 어쩌려고?”

“내가요? 참, 나.”

“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은 있고?”

“…지금 나 무시해요?”

“아니이, 평생 제도에서 살았는데 괴물 머리털 하나 봤겠어? 놀랄까 봐 그러지.”

“봤어요, 봤어!”

“진짜? 언제? 어디서?”

…책에서 봤다. 마수들의 종류나 생김새는.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오스카는 말을 돌렸다.

“내 한 몸 지키는 건 문제없으니 걱정 말고, 댁이나 알아서 잘 살아남아요. 뒤에서 엄호하면 되죠?”

“완벽해.”

에녹이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 * *

“아, 맞다!”

황제를 만나고 돌아온 나는, 혼자 한참 실실거리다가.

“삼촌한테 말해 줘야지!”

호다닥 악시온의 방으로 향했다.

들어가기도 전에 안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아! 체시어?”

어째서인지 악시온의 방에서 나온 건 다급한 표정의 체시어.

“공작님 집에 계시지?”

“갑자기 아빠? 아빠 지금 집에 없어. 한 시간 전쯤 나갔는데?”

“아…. 이런.”

체시어가 곤란해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손에는 웬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인데?”

“…….”

체시어는 내게 말없이 편지를 넘겼다.

[밖에서 출정 준비를 할 생각이다.

돌아와서 보자.]

단 두 줄.

악시온의 필체였다.

“헐.”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악시온은 출정 전까지 숨어 지낼 생각인 게 분명했다. 출정지도, 출정 날짜도 비밀에 부치려고.

“리리스, 이건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아버지가 이번에 출정 명령을 받은 곳이 북부가 아닌 것 같아.”

“…….”

“갑자기 따로 출정 준비를 한다는 게 이상해. 이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가신 것도.”

체시어는 초조해하며 말했다.

“얼른 아버지를 찾아야 해. 위험한 곳이라면 내가 함께 가야 하니까.”

“아! 그래서 삼촌 찾으러 가려고 아빠 집에 있나 물어봤구나!”

날 혼자 둘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체시어. 일단 진정하고 내 말 들어 봐.”

악시온이 걱정되는지 하얗게 질린 체시어의 얼굴이 보였다.

아름다운 부자지간….

새삼 코가 찡해졌다.

“네 말대로 삼촌 이번에 북부 안 가. 확실해.”

황제를 만나고 온 뒤, 나는 확신했다.

‘내가 마탑에 가면 악시온을 은퇴시켜 주겠다고? 황제가 그렇게 손해 보는 짓을 하겠어?’

악시온의 출정지는 사지(死地)가 분명했다.

어차피 이번에 죽는다.

그렇기에 황제는 내게… 악시온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 의미 없는 백지수표를 던진 것이다.

“아마 북부가 아니라 동쪽 섬나라일걸.”

“섬나라? 거기가 어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하던 체시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모아르테 제도.

표정을 보니, 체시어도 그곳의 악명은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럼 내가 거길 가야….”

말하면서도 체시어는 고뇌했다.

출정지가 모아르테라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아무리 체시어라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니 망설여질 수밖에.

“걱정하지 마. 아빠가 갔거든.”

“뭐?”

“지금 아빠가 거기로 괴물 잡으러 갔어. 나중에 삼촌이 가도 위험할 일 없게, 싹 다 잡아 두고 오겠대.”

체시어는 안도했다가, 금세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거기는 아무리 공작님이라고 해도 위험해. 설마 혼자 가신 건 아니지?”

“혼자 갔어. 그치만 아빠는 무사할 거야. 왜냐면 회귀 전에도 아빠는 혼자 거기 괴물 다 잡고 돌아왔거든.”

“…….”

체시어는 드물게 놀랐다. 커다래진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완전히 안도했다.

“역시… 대단하네.”

“네 반응 보니까 거기 진짜 위험하긴 한가 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숨긴 거야.”

체시어가 악시온의 편지를 꽉 쥐며 덧붙였다.

“출정지를 알리면, 나나 공작님이 함께 가려 할 테니까. 그런데 나도 공작님도 살 수 있을지 어떨지… 전혀 모르는 곳이야.”

그러니 황제는 걱정 없이 출정을 명했을 테다.

악시온에게는 도와줄 아빠도 체시어도 있지만, 그런 둘도 선뜻 나설 결심을 하지 못할 만큼….

모아르테는 위험한 곳이었으니까.

“공주, 아빠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기도해 줘?”

답지 않게 걱정하던 목소리.

나 혼자 남겨 두고 죽는 게 무섭다던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체시어도 이렇게 망설일 정돈데, 새삼 나….’

원작을 아니까 괜찮아~

주인공은 강하니까 괜찮아~

안 죽는 거 아니까~

그러면서 다른 사람은 걱정해도 아빠 걱정은 덜 하는 딸.

‘…불속성 효녀네.’

아마 전장에서는 심리적인 요인도 승패를 크게 좌우할 텐데.

죽음을 각오했던 원작과는 달리, 불안한 마음으로 검을 잡을 아빠가 신경 쓰였다.

‘미안해, 아빠.’

‘아빠는 안 죽는다’는 내 확신 하나 믿고, 엄호해 줄 사람 한 명 없이 사지로 떠난 제임스 브라운 씨….

‘스승님한테라도 아빠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볼걸.’

나는 한숨을 쉬었다.

* * *

그 시각, 모아르테 제도.

달이 뜨면 모습을 보일 마수들을 기다리며, 에녹과 오스카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탑주. 공주가 마탑에 가면, 당신은 황제에게 빚을 지는 셈이잖아. 그걸 빌미로 황제가 당신에게 뭔가 요구하겠지?”

“뻔하지, 뭐. 마법식 내놓으라고 할걸요.”

“공격 마법?”

“예. 대량 살상이 가능한 강력한 공격 마법.”

에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런 마법이 황제 손에 넘어간다면….

“순순히 줄 생각은 아니지?”

“걱정돼요?”

“당연하지. 그런 거 잘못 넘기면 사람들 다 죽어.”

공격 마법을 손에 넣으면, 황제는 입맛대로 부릴 수 있는 능력자들을 꾸려 당장 침공부터 명할 것이다.

“뭔가 주긴 해야 하니까 적당한 것만 넘기면 돼요. 지금 공개된 것들보다 위력은 더 세지만, 황제가 허튼짓할 수준까지는 아닌 정도?”

“아, 그래….”

“겁먹지 말아요. 애초에 나라 하나 통째로 날릴 수 있는 그런 강력한 공격 마법식은 만들지도 않았다고요. 만들 생각도 없고.”

“그렇다면 다행이고. 마탑주가 황제 편이었으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

픽 웃은 에녹이 일순 날카로워진 눈으로 일어났다.

어느새 해가 어둠에 먹혔다.

“슬슬 경계하자고. 어디에서 뭐가 나올지 전혀 모르….”

그때.

발을 딛고 있는 땅으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울림.

‘젠장, 하필 매복형 마수군.’

예민한 기감으로 즉시 눈치챈 에녹이 소리쳤다.

“마탑주! 잘 들어! 이거, 땅에서 솟아오르는….”

“으아아악!”

갸우뚱, 중심을 잃은 오스카의 발아래에서 불쑥.

징그럽도록 긴 마수의 팔다리가 쑥쑥 솟아났다. 흡사 거미와도 같은 생김새였다.

길고 강한 팔다리로 물리 공격을 퍼붓는 유형. 마법형 마수가 아니라 위험도는 낮지만….

‘수가 너무 많은데?’

에녹은 순간 당황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땅 전체에서 수백, 아니, 수천 마리가 솟아 나오고 있었다.

사아아악―!

근처 한 무리의 마수를 검기로 날린 에녹이 소리쳤다.

“마탑주! 당황하지 말고, 일단 실드 두르면 안전하니까 내 뒤에 있어! 여기서부터 쓸면서 안쪽으로 들어갈 거야!”

“젠장!!! 징그러워! 징그럽다고, 이런 미치이인!!!”

“아니, 마탑주? 안 죽으니까 진정 좀 하고…!”

그때였다.

마수들의 생김새에 질색하며 고래고래 소리치던 오스카가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다.

그와 동시에 진동 같은 울림이 일기 시작했고―

“끼야아아악!”

“끄아아아―!”

―강력한 마나가 땅을 타고 퍼져 나갔다.

순식간이었다.

오스카의 발아래에서부터 큰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가는 마나.

쾅, 쾅, 쾅, 쾅―!

움직임을 봉쇄당한 마수들이 석상처럼 굳어졌고, 가까이 있는 것들부터 차례차례 비명과 함께 부서져 나갔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에녹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수백 번의 출정 경험을 자랑하는 최고의 능력자, 에녹 루빈슈타인.

그는 주로 검을 썼지만, 마법에 능한 동료들과도 쉴 새 없이 전장을 누볐다.

그럼에도 에녹은 이런 마법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일대의, 아니.

시야에 들어오는 섬 전체의 땅을 일시에 통제했고, 튀어나온 마수들은 뭔가 해 보기도 전에 생명력을 빼앗겼다.

그야말로 파괴적인 공격 마법.

‘이런 공격력이라면….’

작은 나라 하나쯤, 우습지 않게 날려버릴 수 있을 터.

“후아, 후아, 후아.”

“…….”

“아니, 와. 미,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 징그럽게 생겼다고는 말 안 했잖아!”

오스카는 자기가 충동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질색했다.

“…….”

즉사한 마수의 잔해를 물끄러미 살피던 에녹이, 천천히 오스카를 돌아보았다.

“애초에 나라 하나 통째로 날릴 수 있는 그런 강력한 공격 마법식은 만들지도 않았다고요. 만들 생각도 없고.”

오스카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한 거짓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들지도 않았다고요.”

“만들지도 않았…….”

“만들지도…….”

황당해하는 에녹의 표정.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흘기던 오스카는, 이내 깨달았다.

‘아, 맞다.’

1분도 안 되어 제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하, 진짜. 어이가….”

“…….”

“어이가 없네….”

할 말이 없어진 오스카가 슬그머니 에녹의 눈을 피했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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