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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185화 (186/261)

185화

“아, 네에….”

“너희들도 같이 풀어볼래? 어차피 지금 배우는 부분이니까.”

“네! 할래요!”

“저도요, 저도!”

오스카가 말하자, 아이들은 전부 삐약삐약 흥분했다.

학구열 무슨 일이야?

“마지막 세 문항은 틀려도 좋다. 왜냐하면, 틀리라고 낸 거거든.”

오스카는 똑같은 시험지를 아이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고 내게 말했다.

“그런데 넌 틀리면 안 돼. 넌 만점 아니면 통과 안 시켜줄 거야.”

“…….”

나는 문제를 쓱 훑었다.

마지막 세 문항 빼고, 전부 삼각함수.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대략 고등학교 2학년 언저리의 교육 과정일 것이다.

‘얘네가 지금 삼각함수를 풀어?’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아이들을 살펴봤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내 또래들이다.

‘설마? 거짓말이지?’

충격에 빠져 선뜻 펜을 들지 않는 나를 보며, 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비웃었다.

“얘들아, 가려!”

아이들은 내가 커닝이라도 할까 걱정되는지 전부 팔로 시험지를 철통 방어하며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해? 너도 얼른 앉아서 풀어.”

오스카가 의자를 턱짓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리고 휘황찬란한 황제의 선물은 멀찍이 밀어놓고,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아무 펜이나 집어 들었다.

“다 풀고 앉을게요….”

“……?”

전부 열 문항.

1번부터 7번까지는 삼각함수였고, 나머지 세 문제는 미적분과 도함수였다.

나는 최대한 느릿느릿, 흠 잡힐 일 없게 풀이 과정을 꼼꼼히 써 가며 시험지를 채웠다.

“…다 풀었어요.”

내 말에, 놀랐는지 한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난 한숨을 쉬며 오스카에게 시험지를 제출했다.

“흐음.”

오스카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내 시험지를 쭉 훑다가, 이내 픽 웃으며 그걸 덮어놨다.

“너희는 아직 멀었어?”

“저도 다 했어요!”

“저도요!”

“확인해.”

오스카가 지시하자 로벨이 아이들의 점수를 매겨 줬다.

전부 70점.

나는 놀라서 말문을 잃었다.

아직 안 배운 듯한 세 문제를 빼면 만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삼각함수를 푸는 초등학생들이 있다?’

이 아이들은 ‘진짜’였다!

진짜 천재!

“쟨 몇 점이에요? 한 문제라도 풀긴 했나요?”

한스가 나를 경계하며 묻자, 오스카가 뒤집어 놨던 내 시험지를 한가운데로 쭉 밀며 말했다.

“만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스가 재빨리 내 시험지를 집어 가져갔다. 하나하나 확인해 보던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 이게….”

“항상 말하지만, 여기는 철저하게 실력을 증명하고 들어오는 곳이다. 너희는 증명해냈고 그래서 내 밑에 소속됐지. 이 나라에서 평민 신분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거머쥘 수 없는 부와 권력이 약속되어 있다.”

오스카는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멍청한 귀족들을 만났을 때 절대 쫄 필요 없다. 말로 패 준 다음에, 못 들어먹으면 정강이를 시원하게 까 버려라. 뒷일은 뭐, 내가 다 책임지니까.”

아니, 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

“다만 실력을 증명했다면, 귀족이라고 해도 인정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춰야겠지?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온 능력주의란 그런 거니까.”

오스카는 여전히 내 시험지에서 눈을 못 떼고 충격받은 한스를 보며 일어났다.

“이름은 리리스 루빈슈타인. 한스보다는 한 살 많고, 나머지랑은 동갑이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덧붙였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

* * *

영재들의 일과는 간단했다.

오전에는 쉴 새 없이 수학 문제를 풀었고, 오후에는 마법식을 제작하는 원리에 대해 배웠다.

들어 보니, 한스는 이미 간단한 마법식 몇 개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는 수준이라고.

“리리스!”

“응?”

그때 엘리가 책을 갖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가 오기 전 이 영재반의 유일한 여자애였다.

“있잖아, 여기에서 sin(x)가 2분의 루트 3일 때 값은 구했거든? 그런데 2분의 1일 때 값도 구해야 하나?”

“…….”

아니, 이게 맞아?

나는 엘리의 앳된 얼굴과 그녀가 내보인 삼각함수 문제의 괴리에 한숨 쉬었다.

그래도 물어보는데 안 가르쳐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안 구해도 돼. 이거 2분의 루트 3일 때랑 2분의 1일 때랑 어차피 답은 똑같이 나오거든? 그러니까 굳이 x값 다 구할 필요 없고….”

설명해 주자 엘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와, 대단하다! 한스나 로벨 선생님이 설명해 주실 때보다 훨씬 쉽게 이해돼! 너 진짜 천재 맞구나?”

“그, 그 정돈 아니고….”

철저한 실력주의를 세뇌당한 아이들은 내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척척 풀 때마다 순수하게 감탄했다.

천재 소리 들을 때마다 내 양심은 매우 아팠다.

‘천재는 이 나이에 삼각함수를 푸는 너희들이지, 등록금 벌려고 수학 과외 하던 대학원생인 내가 아니야!’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민망함에 뺨을 긁적이는데, 나를 노려보던 한스와 눈이 마주쳤다.

‘한스….’

아이들 모두 친해졌지만 한스는 여전히 날 못마땅해했다. 아무래도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 * *

‘미친 거 아니야?’

나는 통통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식당에서 나왔다.

‘너무 맛있잖아!’

마탑은 연구원들에게 삼시 세끼 최고급의 식사를 제공했다.

그뿐인가.

짱짱한 복지, 쾌적한 근무 환경을 자랑하는 최고의 직장!

과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여기 들어오려고 안달이 난 이유가 뭔지 알겠달까.

“이제 집에 가는 거야, 리리스?”

엘리가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수학 공식이 적힌 종이가 들려 있었는데, 저걸 식당에서도 안 놓더라.

다른 아이들도 전부.

“응. 나는 이제 집에 가. 너희들도 이제 공부 끝났으니까 쉬어도 되지?”

“응! 얼른 놀아야지!”

역시 애들은 애들이다.

일과가 끝나 기뻐 보이는 모습에 나는 흐뭇해졌다.

“난 산책하고 나서, 삼각함수의 활용 문제를 더 풀어보려고!”

“나는 오늘 배운 등차, 등비 복습해야지.”

“아, 맞아. 얼른 그 부분 넘어가야 로벨 선생님이 미적분 가르쳐 주신다고 했으니까. 같이 하자.”

…띠용?

“얘, 얘들아? 그게 어떻게 노는 거야? 그건 그냥 공부를 계속하는 거잖아!”

“…? 그게 그거지, 뭐.”

아냐! 달라!

다르다고!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데, 엘리가 수줍게 웃었다.

“오늘 반가웠어. 처음에 오해하고 너한테 틱틱거렸던 거 미안해. 사과할게.”

“맞아. 나도 미안.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귀족들은 다 성격 나쁜 줄 알았는데 너는 착하고 똑똑해서 정말 좋아.”

“흠흠, 그래?”

재스퍼라는 친구가 말하자,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리리스. 너도 귀족이니까 세 걸음 이상 절대 안 걸어 다니지? 요즘도 길 가다가 평민들한테 절 받는 건 변함없어? 마탑에 들어온 지 오래돼서 잘 모르겠네.”

제일 호기심 많아 보이는 로키가 물었다.

“무슨 말이야? 안 그래.”

난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다들 잘 걸어 다녀. 나도 그렇고. 그리고, 으음, 절 받는 건….”

“받는 건?”

“요즘도 그렇긴 한데 나는 아냐! 진짜 아냐! 그렇게 인사받는 건 도스들이고, 나는…. 너희도 아는지 모르지만 옥타바거든.”

아이들이 오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도스들은 잘 모르고 친한 사람도 몇 안 돼. 오히려 살롱에서 사귄 친구들이 더 많은데, 다들 낮은 계급이야. 착하고.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

“그렇구나?”

“응응! 그리고 나, 평민 친구들도 엄청 많다? 양성소 갔을 때 만난….”

“웃기시네.”

그때 뒤에서 수학 공식 외우는 데 여념 없던 한스가 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다 거짓말일걸. 쟤 아버지가 도스인데 도스들을 어떻게 몰라? 그리고 옥타바라도 다 같은 옥타바겠어?”

한스는 척, 팔짱을 끼고 덧붙였다.

“쟤 아버지 눈치 보느라 웬만한 귀족들도 함부로 못 대할걸? 쟤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이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야.”

“어어, 아니야.”

“뭐가 아닌데? 친해지려는 거야 괜찮지만, 굳이 거짓말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너보다 계급이 높다 해서, 네가 도스들을 무서워해? 아니잖아?”

한스는 안경을 슬쩍 세우며, 매우 논리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제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귀족 가문 아가씨인데, 낮은 계급에 평민 친구들과 어울린다? 글쎄? 도스들을 시종으로 부린다는 게 훨씬 더 신빙성 있겠는걸?”

“한스! 마탑주님이 다들 친하게 지내라고 했잖아. 왜 시비를 걸어?”

“맞아. 리리스가 나쁘게 군 것도 아닌데. 적당히 좀 해.”

엘리와 재스퍼가 내 편을 들어줬지만, 한스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내 말은, 가식 떨지 말라는 거야. 쟤는 사자잖아. 토끼들이랑 친구 못 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친한 척 말하는 게 웃기지 않아?”

“…….”

“마탑주님이 신분과 계급으로 사람 찍어 누르는 걸 싫어하고 철저한 능력주의를 지향하시는 분이니, 잘 보이려고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속 다 보여, 너.”

…아니, 뭔 열 살짜리가 말을 이리 잘해?

난 받아치려다가, 어린애랑 계속 입씨름하는 것도 우스워서 그냥 한숨 한 번 쉬고 말았다.

“그래, 한스.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 내 진심은 차차 보여줄게. 그런데 나 거짓말은 정말 안 했어. 친구들 많지만, 가려서 사귄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 그럴 거야. 그러니까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아 줘.”

이 정도면 깔끔하지.

뿌듯해하는데, 왜인지 아이들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내 뒤를 향해 있었다.

‘뭐지?’

불길한 마음에 휙, 돌아보니.

“……?”

언제 왔는지 내 뒤에 선 마차.

‘잠깐.’

거기서, 체시어가 내렸다.

‘이 타이밍 실화야?’

체시어는 검사단 복장이었다.

붉은 망토에 선명히 새겨진, ‘도스’ 계급을 상징하는 문양.

마차에는 ‘공작’ 가문만 달 수 있게 허락된 금색 인장.

계급으로도, 신분으로도 황제 빼고 누구에게든 고개 숙일 필요가 없는 남자가―

“데리러 왔어.”

―라는 대사로 날 마중 나왔다.

‘도스를 귀갓길 호위로 부려먹는 옥타바가 있다?’

나는 멍해졌다.

오만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왜? 오늘 출정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웬 풀 착장? 그것도 마침 이 타이밍에? 이건 일부러 날 엿 먹이려는 게 아니고서야….’

난 침을 꼴깍 삼켰다가, 아차 하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얘, 얘들….”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다섯 걸음 정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얘들아?!”

“리, 리리스! 집에 잘 들어가! 내일 보자!”

“조, 조심히 가!”

“안녀어엉!”

공작 가문 도스 도련님의 등장에 놀라버린 아이들은 잡을 새도 없이 도망쳤다.

“얘들아!”

아이들을 잡으려고 뻗었던 내 손은 비참하게 허공을 허우적대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스는.

“……도스들을 시종으로 부린다는 게 훨씬 더 신빙성 있겠는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보며 픽 비웃고 떠나갔다.

“와, 와.”

망했어. 나는 뺨을 쭉 잡아당기며 돌아봤다.

“야, 너. 와, 진짜. 와아.”

“…미안.”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체시어는 일단 사과부터 하고 말했다.

“나 뭐… 잘못한 거 맞지.”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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