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난 호다닥 달려가 체시어의 멱살부터 끌어당겼다.
“…왜? 대체 왜?”
“…….”
“호, 혹시 오늘 출정이라도 나가? 단복은 왜 입었어? 하필 오늘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스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네?”
“…미안. 계속 아버지 찾다가, 너 끝나는 시간 맞춰서 바로 왔거든.”
“삼촌 찾는데 왜 옷을…?”
아, 하긴.
악시온을 찾으려면 협조를 구해야 하니, 긴말보다는 계급을 상징하는 망토 한 장 두르는 게 빨랐겠지.
어제 평상복 차림으로 여관마다 돌아다녔더니 의심하는 눈초리에 질문 공세 때문에 불편했었다.
“으응, 그래. 알았어….”
“아까… 애들은? 마탑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야?”
“응, 다 비능력자야. 귀족들 싫어하길래 나는 두루두루 잘 지낸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줬는데, 말 끝나자마자 공작 가문 도스 도련님이 마중을 나왔지 뭐야.”
말하며 마차에 오르자, 따라 타던 체시어가 멈칫하고는 한숨 쉬었다.
“내가 잘못했네.”
“아냐, 괜찮아.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근데 내일부터는 안 와도 돼. 마탑에도 마차 있단 말이야.”
“…….”
“체시어?”
“…저녁은 먹었어?”
대답을 피하는 걸 보니 꼬박꼬박 데리러 올 생각인 모양.
나는 한숨 쉬며 대답했다.
“응, 먹었어. 여기 밥 맛있더라. 넌?”
“난 아직. 집에 가서 먹으면 돼.”
“삼촌은 아직 못 찾았고?”
“응.”
체시어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찾을 수 있어. 집에 바로 가지 말고, 식당 들렀다 가자.”
“너 먹었다며. 나는 집에 가서 따로 먹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아냐. 삼촌 어디 있나 찾아볼 겸 겸사겸사 가는 거니까. 너 혹시 삭힌 청어 먹어 봤어?”
체시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마부석에 난 작은 창을 열고 말했다.
“<리코 식당>으로 가 주세요!”
* * *
정보 길드 <붉은 매>에서 거래를 요구하는 방법.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의 한쪽 면을, 조롱하듯 테이블 위로 처박으며―
“삭힌 청어 주세요!”
―삭힌 청어 주문하기.
* * *
<리코 식당>의 지하.
정보 길드 <붉은 매>의 본거지.
“재스민? 시나몬?”
검은 목폴라 티 차림의 리코가 찻잔을 꺼내며 물었다.
“오렌지 주스요!”
“어린이 입맛이군요.”
“어린이니까요…?”
어쩐지 피식 웃은 리코가 주스 잔을 내려놓으며 내 앞에 앉았다.
스물한 살의 리코는, 나이만 먹은 나와 달리 성실히 살아서 지금까지 길드의 세를 어마어마하게 불렸다.
“그런데 참, 이해할 수가 없네요. 큰일 하겠다는 분이 이리 쉽게 자기 목숨을 포기한다?”
리코가 쯧쯧 혀를 찼다.
난 사정을 설명한 다음 악시온의 거취를 알아봐 달라 부탁했고, 그 즉시 리코는 길드원들을 풀었다.
“그쪽 책사는 일 안 합니까? 아님 생각보다 멍청한가? 황제가 리브르 공작을 사지로 출정 보낼 건 예상했으면서, 살아남을 방법은 강구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에요. 우리 책사 아저씨 똑똑해요. 살아남을 방법도 알려줬어요. 삼촌더러 탈영하라고 했죠.”
“그럼요? 책사 말을 듣지 않았을까요? 아가씨는 왜, 리브르 공작이 탈영하지 않고 거기 죽으러 갈 거라 확신하십니까?”
“황제 폐하가 삼촌 탈영할 걸 예상 못 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분명히 협박을 더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협박이라…. 동료들의 목숨 정도 되려나. 그래도 전 이해되지 않습니다만.”
리코가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피를 흘리지 않고 성공할 수 없는 길입니다. 피할 수 없는 희생은 감수해야 하죠. 왜 냉정하게 굴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버립니까?”
“리코 말도 맞아요. 이 일 하려면 냉정해야 해요. 하지만 삼촌은 그런 사람이 못 되거든요.”
나는 악시온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삼촌은 지금 1분 1초가 지옥이겠지?’
* * *
지금으로부터 12시간 전.
악시온 리브르는 이미 모아르테 제도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집을 나온 이후 곧바로 황제에게 향했고, 당장 출정하겠다고 말한 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새벽 무렵 배에 올랐다.
출정을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출정지가 외부에 알려질 위험이 있었고….
또, 시간을 끌며 고민할수록 죽기 싫은 마음에 괴로웠을 테니까.
“살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탈영하라고 조언해 주지 않았었나?”
책사, 조제프 뤼트먼이 은밀하게 악시온에게만 남긴 말.
“한 가지 더,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몸만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황제가 시신이라도 수습하려 한다면 일이 복잡해지니까요. 이렇게 따로 말씀드리는 이유는, 전부 듣는 자리에서 하기에는 비윤리적이라….”
그래, 살 방법은 있었다.
“탈영 전에, 대역을 마련해 죽은 것처럼 꾸며두십시오. 신원을 확인해 대역임이 발각될 수 있는 부분은 전부 훼손해 두셔야 합니다.”
과연 조제프가 민망해하며 말을 꺼낼 만큼 비윤리적인 방법이었다.
무고한 동료를 죽여, 그 얼굴을 갈아, 악시온 리브르가 확실히 죽었다는 ‘증거’를 남겨 놓으라는 것.
잔인하리만치 과감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완벽한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되겠냐고.’
수평선 위로 동트는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악시온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갑판 위에 나와 있는 동료들.
악시온과 함께 승선한 3계급 셉티마군 30인이었다.
북부로 출정하는 줄만 알고 있던 그들은, 당일 소집되어 황제의 명을 받고 충격에 빠졌다.
몇몇은 멍하니 죽음을 기다렸고, 다른 몇몇은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모아르테 제도로 향하는 세 시간.
배 위에는 절망에 찬 울음소리가 그득했다.
* * *
‘미친놈. 인사도 없이 죽으러 가?’
악시온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에녹은 화가 났다.
북부로 출정한다는 악시온의 거짓말을, 리리스가 곧장 의심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늦었을 것이다.
에녹은 아무것도 모른 채 친구를 잃을 뻔했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모아르테는 이제 안전했다.
그보다 더 안전할 수가 없었다.
함께 간 오스카가 최고급의 감지 마법―역시 미공개였던―으로 숨은 마수들까지 다 끄집어내 씨를 말려 놓고 왔으니까.
하지만 악시온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는 게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으려나?
“아, 진짜 생각할수록 열 받네.”
에녹은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날 친구라고 생각은 하는 건가?”
* * *
모아르테 제도.
들었던 대로,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다 내렸나?”
“예, 사령관님.”
전투 물자들을 전부 내린 부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시온은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로 배에서 내린 30인의 셉티마군을 향해 명령했다.
“그럼 너희들은 다시 승선해라.”
“예, 알겠습니… 예?”
부사령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죽을 거야? 아니잖아. 다시 타.”
픽 웃은 악시온이 배를 턱짓하며 덧붙였다.
“아는 놈들은 알겠지만, 모아르테 토벌은 나를 겨냥한 보복성의 출정 명령이었다. 그러니 나만 여기 남으면, 폐하께서는 따로 너희의 죄를 묻지 않으실 거다.”
“그, 그래도 그게….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령관님. 함께 싸우겠습니다.”
“너 혼자 그걸 결정하면 어떡해.”
악시온이 부사령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뒤에 선 이들을 가리켰다.
살 수 있나?
실낱같이 떠오른 희망에, 다 죽어가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던 몇몇이 민망해하며 고개 숙였다.
“이건 상관으로서 하는 명령이다.”
“사, 사령관님.”
“승선해.”
부사령관은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눈물 고인 눈으로 한참을 망설이다, 울컥하며 인사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빨리 가. 알았으니까.”
이내 승선한 셉티마군을 싣고, 배가 떠났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끝내 죽음 한 갈래로 결정지어진 순간이었다.
* * *
에녹은 악시온을 생각하다,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두 개의 군번줄을 꺼내 보았다.
[성기사단
69-17002412
악시온 슈나이더]
[성기사단
69-17002411
에녹 루빈슈타인]
하나씩 나눠 가진 군번줄을 보며 딸애가 악시온과 얼마나 친한 거냐 물었을 때, 에녹은 말했다.
“삼촌이랑 아빠? 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기로 약속했을 만큼 친하지!”
“…웃기시네.”
에녹이 구시렁거렸다.
“공주야, 삼촌은 아빠를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보다!”
어디 숨어서 청승 떨고 있을 악시온을 찾으러 가 볼까 계속 고민하던 에녹은, 그냥 벌러덩 드러누웠다.
괘씸하니까 그냥 두자.
“관광 자~알 하고 와라! 새끼야!”
* * *
[성기사단
69-17002411
에녹 루빈슈타인]
[성기사단
69-17002412
악시온 슈나이더]
같은 시각.
눈부신 모래사장 위에, 악시온은 에녹과 똑같은 자세로 두 개의 군번줄을 만지작거리며 누워 있었다.
“하아.”
노을이 져 가는 모아르테 제도는 아름다웠다.
곧 있으면 아비규환이 될 곳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이렇게 죽네.’
딱히 무섭진 않았다.
친구랑 아들에게 좀 미안할 뿐.
유서를 남기면 눈치챌까 싶어, 그냥 품 안에 넣고 왔다.
시신이 온전하길 바랄 뿐이다.
그럼 제 마지막 인사가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 테니까.
“미안하다.”
악시온은 한숨과 함께 가슴팍 안에 군번줄을 밀어 넣었다.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지금 죽을 일은 없었을까?
아니, 후회는 없다.
반란이 아니었더라도….
제국에서 능력자로 태어났으니, 항상 죽음은 각오하고 있지 않았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죽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
“…맞네. 그럼 같이 살아남자!”
친구와의 약속을 못 지킨 것만이 아쉬울 뿐.
악시온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죽기 딱 좋은 날씨네.”
그는 한가로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