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 *
악시온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마친 난, 종이와 펜을 빌렸다.
“리코가 삼촌 찾는 거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저도 뭐 하나 드릴게요!”
정보 길드 <붉은 매>의 철칙.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
나는 한 줄 끼적인 뒤에 리코에게 건넸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이게 뭐죠?”
그걸 읽은 리코가 의아해했다.
“헤헤. 리코가 오랫동안 갖고 싶어 했던 거예요. 그건 일단 보증서고, 악시온 삼촌이 이번 출정 마치고 오면 그때 드릴게요.”
“흐음, 글쎄요. 전 딱히 가지고 싶은 게 없는데.”
“아닐걸요? 뭐 짐작 가는 거 없나~? 엄청 가지고 싶었을 텐데~?”
리코가 피식 웃었다.
“뭐, 아가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죠. 그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뭐예요?”
뭐든 말해 보라고! 리코는 눈을 빛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얼른 돌아가 보시죠. 리브르 공작의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뭐지?
더 물으려다가, 나는 시간을 꽤 지체했음을 깨닫고 일어났다.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고마워요, 리코!”
* * *
반지하 창의 가림막을 열자,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떠나가는 리리스와 체시어가 보였다.
“삭힌 청어 어땠어, 체시어?”
“…별로 맛 없었어.”
“으항항!”
변함없이 천진한 웃음소리에 피식 웃은 리코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꼭, 살아남으십시오.”
* * *
며칠 전.
평민 거주 지역에서 일어난 화재 테러.
리코는 에녹에게, 테러의 배후를 파헤칠 수 있는 증거를 넘겼다.
“……큰 도움이 될 거야. 고마워. 그런데 대체 어떻게 미리 알고 테러범들을 조사하고 있었던 거지?”
“알고 조사했던 게 아닙니다. 다른 것을 조사하다 우연히 알아낸 거죠. 전부 공녀님 덕분입니다.”
“응? 리리스?”
“예.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공녀님이 저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셨던 게 있거든요.”
“뭘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시위를 준비하는 평민들이 있을 거라 하면서 그들의 신상을 요구하셨죠. 그런데 그런 간 큰 인간들은 없었고요. 애초에 시위의 움직임이 있었다면 제 귀에 가장 먼저 들어왔겠죠?”
“그렇겠지?”
“아무튼, 뭔가가 있어 부탁하셨을 테니 조사는 해 보았는데….”
“그러다 우연히 테러를 준비하는 정황을 알아냈다?”
“맞습니다. 공작님, 그런데.”
“……?”
“혹시 제가 공녀님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하면, 알려 주실 수 있는지?”
순간, 에녹이 멈칫했다.
그 모습에 리코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버지는 알고 있겠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지금 평민들 몇 명이 시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녀님의 말대로 된 거죠.”
에녹의 눈이 커졌다.
“왜 시위를 준비하느냐? 황제에게 평민 거주 지역에도 최소한의 치안, 그리고 방범을 약속해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
“언제부터 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했느냐? 그건 바로 이번 화재 사건 이후입니다. 테러범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말이죠.”
“…….”
“그러니까 이번 테러가, 이 시위의 계기입니다. 다시 말해 공녀님이 제게 조사를 부탁했던 시점에는 아예 시위를 준비하고 있지도 않았죠.”
“에고.”
리코의 말에, 에녹이 왜 리리스를 의심했는지 알겠다는 듯 웃었다.
“우리 공주가, 불이 난다는 사실은 모르고 시위가 일어난다는 사실만 알았나 보다.”
“미래를 아는 게 아니고서야….”
“맞아. 아는 거.”
순순한 대답에, 리코가 놀랐다.
“하하, 뭘 그렇게 놀라? 리코랑은 오래 일하기도 했고, 믿으니까. 궁금하면 알려 줘야지.”
에녹은 왜인지 씁쓸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우리 공주, 정체가 뭐 같아?”
“앞일을 다 내다보는 것처럼 굴지 않으십니까. 예지 능력이 있다? 아니면, 인생 2회차다… 그 정도?”
리코가 턱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공작님께서 눈에 불을 켜고 회귀 마법을 조사하고 있기도 하죠. 그 과정에서 제 도움도 많이 받으셨고.”
“음, 맞아. 그렇지.”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건 오스카를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지만.
“그 마법을 조사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었죠. 혹시, 실패했을 때 다시 시작하려고 준비해 두는 걸까? 그게 아니면….”
리코가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덧붙였다.
“이미 누군가가, 그 마법을 한 번 성공시켰거나?”
“이야.”
에녹이 혀를 내두르며 박수 쳤다.
“대단한데? 맞아. 내 딸은 미래를 기억하고 있어. 과거로 돌아온 거지. 정확히는 회귀 마법 때문에 나도, 내 딸도, 모두가 돌아왔다고 하는 게 맞지만, 기억을 가진 건….”
“공녀님뿐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에녹의 입으로 추측을 확인받자 리코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긴장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공작님.”
“묻고 싶은 거 있지?”
에녹이 킬킬거렸다.
“혹시, 실패했기 때문입니까? 그래서, 그래서 다시 시작한…?”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리코.
그래, 이걸 가장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리코뿐만 아니라 <붉은 매> 길드원들 전부, 사활을 건 혁명을 준비 중이니까.
“거짓말 아니고,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어. 실패 안 해. 실패해서 돌아온 게 아니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에녹의 말에 리코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다 곧 의문을 띠었다.
“그렇다면, 회귀 마법은 왜…?”
“리리스가 죽었기 때문이야.”
리코가 그대로 굳었다.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해 줘. 혹시 원망하더라도 들을게. 회귀 마법에 손을 댄 것도, 힘들게 성공한 모든 일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도… 나야.”
“…….”
“내 딸을… 살려야 했기 때문에.”
미안해.
놀라서 말문을 잃은 리코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에녹은 고개 숙인 채로 말했다.
“모든 게 끝나도, 내 딸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고생한 모두에게는 성공이었겠지만, 그래서 정말 미안하지만….”
“…….”
“…내게는, 실패였거든.”
* * *
유능한 정보 길드 <붉은 매>는, 초저녁쯤 악시온의 충격적인 거취를 알아다 줬다.
“갔다 와, 아빠!”
“뭐 하러? 싫어.”
“아니이, 제바알!”
이미 오늘 새벽에 배를 탔단다!
“삼촌 걱정도 안 돼?”
“응, 안 돼. 아빠가 괴물 다 잡아 놨잖아. 삼촌은 거기서 푹 쉬다 오면 되지. 경치도 좋더라.”
“괴물 없는 거 삼촌은 모르잖아! 같이 갔던 사람들은 전부 돌아왔다는데 삼촌만 거기 혼자 남아서, 지금!”
나는 머리를 붙잡았다.
“해도 다 졌는데! 손톱 딱딱 물어뜯으면서 무서워하고 있을 삼촌이 머릿속에 안 그려져?”
“공주는 삼촌이 안 괘씸해? 우리랑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죽을 결심을 하고 갔는데?”
“삼촌이 괜히 그랬어? 우리 걱정시키기 싫으니까 그런 거잖아.”
“아빠가 삼촌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안 했어.”
아빠는 냉정하게 말했다.
“난 죽기 싫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니까 같이 머리 좀 맞대 봐라, 했을 거야.”
“…….”
“공주야, 모두 살아남지 못하면? 아빠 사업이 의미가 있어?”
“없지….”
“오늘 새벽에 이미 갔다는 말을 들으니까 더 괘씸해. 수습할 틈도 없이 죽으러 갔으니까. 만약 아빠가 한 발만 늦었어도 삼촌은 진짜 죽었어, 공주야.”
“…그것도 맞지.”
“그러니까 하루 정도는 지옥 문턱에서 덜덜 떨어 보라고 하자.”
아빠는 흥, 하더니 뒤돌아 누웠다.
악시온을 걱정하고는 있지만, 서운함이 더 큰 모양이었다.
‘에휴, 남자들의 우정이란 참 유치하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돌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팔찌 보는 시늉을 하며 타박타박 걸어가는데, 아빠가 우당탕 달려와 나를 낚아챘다.
“어허.”
“왜, 제임스 씨?”
“우리 공주, 뭐 하려고 그럴까? 불길하게 팔찌는 왜 보는 거야?”
“내가 가야지, 뭐. 삼촌 안심시켜 주고, 앞으로 며칠 동안 거기 있어야 하니까 새벽에 춥지 말라고 털 달린 옷도 가져다줄래.”
“후.”
아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나를 안은 채로 옷장 문을 열고 갑옷을 우르르 꺼냈다.
“오잉? 아빠가 가게?”
“삼촌은 참 좋겠다. 그치? 공주가 삼촌 은퇴시키려고 마탑에 가질 않나, 외투 가져다준다고 괴물 섬에 직접 가겠다고 하질 않나….”
아빠가 이를 갈며 방긋 웃었다.
“아주 아빠보다 삼촌을 더 사랑해요, 응?”
* * *
그 시각.
“…와라.”
어둠이 내려앉은 섬.
악시온 리브르는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쥐었다.
“…빨리 와라.”
해가 진 지는 한참이건만.
이 숨 막히는 기다림은 벌써 두 시간째.
“…언제 나오냐?”
단두대에서 좀처럼 칼날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죽음에 초연해진 것과는 별개로 이 기약 없는 기다림은 불쾌했다.
나올 거면 빨리 나와 덤비든가.
이대로라면 긴장과 공포를 계속 안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 대체 언제!”
그 순간.
못 참고 빽 내지르던 악시온이 묘한 마력의 뒤틀림을 느끼고 재빨리 뒤돌았다.
‘온다.’
모래사장 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커다란 마법진이 푸른 빛을 내며 새겨지고 있었다.
‘마법진이라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듣도 보도 못한 마수들이 나올 거라 예상은 했었다.
살아 나온 이가 없다면,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마법형 마수가 있을 거란 예상도 했다.
하지만.
인간인 능력자들처럼 정교한 마법식을 쓰는 마수라니?
그런 게 있었나?
저건 어떤 마법일까?
‘아니, 시간 없어.’
이것저것 고민할 틈은 없었다.
악시온은 재빨리 뒤로 몸을 물리면서 강한 검기를 실어 날렸다.
“아?”
마법진 위에 난데없이 뿅, 하고 낯익은 얼굴이 나타난 것과 검기가 날아간 것은 동시였다.
콰아앙―!
“어억!”
“……?”
뿌옇게 일어난 모래 먼지.
시야가 가려졌지만, 그 전 찰나에 봤던 얼굴은 분명.
“에녹?”
에녹이었던 것 같은데?
뿌연 먼지가 가라앉자, 과연.
가슴팍을 감싸 쥔 채, 3m쯤 뒤로 밀려나 있는 에녹이 보였다.
“무슨….”
가슴에 악시온의 검기를 정통으로 맞은 에녹의 흉갑이 반으로 갈라져 툭, 떨어졌다.
다행히 그 짧은 순간에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실드를 둘러 치명상은 피한 듯했다.
“하, 후아. 하.”
에녹이 제 가슴을 더듬으며 놀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다 악시온을 찾아내더니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어, 그래! 싸우자, 이 새끼야!”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