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싸우자더니, 에녹은 기세 좋게 뽑은 검을 내던졌다.
뭐지?
맨몸으로 달려드는 친구를 멍하니 바라보며 악시온은 생각했다.
설마 모아르테 제도의 악명 높은 마수가 에녹 루빈슈타인이었나?
‘과연… 그렇다면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게 설명이 되나.’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뇌가 마비된 모양이다.
“야, 너 어떻게…, 윽!”
퍼억!
에녹이 힘을 실어 주먹을 내지르자 악시온이 모래사장 위로 나가떨어졌다.
“허?”
입 안에 맴도는 알싸한 피 맛.
“너 이 새끼, 갑자기 무슨…!”
발끈한 악시온이 에녹을 올려다보고는 멈칫했다.
노려보는 시선이 매섭다. 원망하는 눈빛이 읽혀서, 악시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자 죽으려고 왔냐?”
“…….”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고 해 놓고? 너, 날 친구라고 생각하긴 해?”
악시온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일어나자 에녹이 그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남은 사람들은 생각도 안 해? 네 아들 잠도 못 자고 이틀 내내 너 찾아 돌아다닌 건 알아?”
“…….”
“너 없이 성공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 누군가 꼭 죽어야만 했다면 나는 시작도 안 했어. 전부 살아남을 생각으로 하는 거야.”
“알아, 그런데.”
옛날의 에녹이었다면, 악시온은 미친 척 같이 싸워줄 수 있겠냐 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에녹은….
“넌 지켜야 할 게 있잖아.”
“뭐?”
“네가 잘못되면 리리스는 어떡하냐. 네가 지켜 줘야지. 아빠니까.”
“…….”
“친구 맞아. 널 친구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 내게도 소중해. 네가 지켜야 할 것들, 해내야 할 것들.”
“…….”
“나도 지켜 주고 싶고, 같이… 해내려는 거야.”
악시온의 멱살을 틀어쥔 에녹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하.”
이내 말없이 뒤돈 에녹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다.
“…맞아. 나한테는 공주가, 제일 소중해. 내 목숨보다 더.”
“…….”
“그런데 너도야. 모든 게 다 끝이 났을 때, 네가 없으면 안 돼.”
에녹이 다시 돌아보았다.
아까와 달리 풀어진 눈빛.
“약속했잖아. 같이 살아남기로.”
악시온이 피식 웃자, 에녹이 그를 끌어안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의 온기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우정이었다.
“야, 그런데 말이다.”
“…….”
한참 만에, 악시온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럴 때가 아니거든.”
“뭐가.”
“여기서 같이 살아남기는 힘들 텐데. 튀든가, 역시 한 명이라도 사는 게 낫지 않겠냐.”
“…눈치 없긴.”
에녹이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그리고는 의아해하는 악시온을 향해 말했다.
“백날 기다려 봐라. 네가 마수들 머리털 하나 구경할 수 있나.”
* * *
“삼촌 옷 줬어? 저녁에 춥지?”
“응. 근데 여름이라 별로 안 추워.”
“먹을 거는 있어?”
“전투 식량 차고 넘쳐.”
난 악시온에게 다녀온 아빠 뒤를, 체시어와 함께 졸졸 따라다녔다.
“괴물들 하나도 없지? 확실히 안전하지? 아빠 갑옷은 왜 깨졌어?”
“공주 삼촌이 깨 먹었어. 그리고 괴물 없어. 무려 마탑주가 직접 감지 마법까지 써서 확인했는걸.”
“어휴, 다행이다.”
“아니, 근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네.”
아빠는 하나하나 대답해 주다가 갑자기 인상을 썼다.
“거기 마수들 잡은 건 난데 전공은 악시온 녀석이 가져간다? 그놈 지금 별 보면서 한가롭게 잠이나 자고 있는데? 심지어 닷새 푹 쉬다 오면 은퇴가 예약되어 있기까지?”
“에이, 억울해하지 마. 원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악서방이 받는 거야.”
“뭐라고오~?”
아빠가 발끈했다.
그때 듣고만 있던 체시어가 얼른 끼어들었다.
“공작님, 저도 아버지 무사하신지 직접 보고 싶은데….”
“맞아, 맞아. 체시어 삼촌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잤어. 이동 마법식 체시어한테도 알려 줘.”
아빠는 어쩐지 걱정이 한가득한 체시어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아랫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내 친구는 참 좋겠네. 전생에 무슨 공을 세운 거지?”
* * *
그로부터 닷새 후.
마탑, 오스카의 집무실.
“……그래서 오늘도 아침에 체시어랑 같이 삼촌한테 놀러 갔다 왔죠. 삼촌 잘 먹고 잘 자서 더 잘생겨졌어요.”
“그르냐.”
“오늘 삼촌 집에 오면 전역 파티할 거예요. 케이크 엄청나게 큰 걸로 주문해 놨어요. 오늘까지만 삼촌 집에서 신세 지기로 했으니까 밤새워 놀 건데 스승님도 오실래요?”
“됐다. 내가 거기 가서 뭐 해.”
“그런데 삼촌 장가들 생각 없나? 거기서 전공 세우고 돌아오면 이제 난리가 날 텐데? 완전 일등 신랑감 아니에요? 젊지, 잘생겼지, 강하지, 돈 많지, 아들도 다 키워 놔서 육아할 필요도 없죠?”
턱을 괸 채, 조잘거리는 나를 한참 구경하던 오스카가 웃었다.
“마탑주 집무실에 배 까고 드러누워서 디저트 먹으면서 수다 떠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야.”
소파에 누워 한가로이 쿠키를 집어 먹던 나는 흠칫했다.
“제 수다 듣기 싫으세요?”
“아니, 감미롭다. 계속해.”
오스카가 놓아두었던 펜을 잡았다.
“…아직 점심시간이니까요. 끝나면 가서 공부할게요.”
난 뻔뻔하게 말하며 앞섶에 흘린 부스러기를 털었다.
뭔가 회장님을 아버지로 둔 재벌 3세가 농땡이 피우는 것 같다. 정작 회장님 오스카는 열심히 일하는데.
“흠흠.”
나는 눈치를 보며 일어나 앉았다.
부스럭대며 일어난 나를 느꼈는지 오스카가 서류에 눈을 둔 그대로 픽 웃었다.
“눈치 준 거 아니야. 보기 좋아서 한 말이지. 지금이 내가 딱 바라던 그림이거든.”
…재벌 3세 코스프레가?
아냐, 나도 눈치는 있다.
“아닙니다, 회장님.”
“뭐래.”
“흠흠! 그보다, 오늘 황제 폐하가 아빠를 부르셨대요. 왜일까요?”
“그래?”
연신 펜을 끼적이던 오스카가 탁상 달력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뻔하지.”
오늘은 악시온이 모아르테 제도로 떠난 지 5일째 되는 날.
“네 아버지더러 친구 시체 수습해 오라는 거 아니겠어?”
“이야, 그렇게 잔인할 수가….”
“안 그래도 네 아버지 이것저것 하려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을 텐데, 기세 죽여 놓기에는 제격이지.”
그렇다면 지금 신나 있을 황제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악시온을 보면 무슨 기분일까?
“푸흐흐.”
“왜 그렇게 웃냐?”
“삼촌 돌아왔을 때 황제 폐하 표정이 궁금해서요. 못 보는 게 너무 아쉽다.”
돌아온 악시온은 ‘모아르테 제도 단신 토벌’이라는 어마어마한 전공을 갖게 될 것이다.
제거하려던 악시온의 입지가 커질 것은 물론이요, 나와 한 약속 때문에 당분간은 그를 건들 수도 없으니….
“으항항!”
나는 웃으며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오스카도 그런 나를 보며 큭큭 웃었다.
“좋댄다, 아주.”
* * *
황제, 니콜라스의 집무실.
“닷새 전에 악시온 경이 모아르테 제도로 출정했는데, 알고 있나?”
“예?”
에녹의 눈이 커졌다.
순식간에 평정을 잃은 표정을 보며 니콜라스가 웃음을 삼켰다.
‘역시 에녹에게는 말 한마디 없이 갔었나 보군.’
어차피 악시온이 도움을 요청했더라도 에녹은 외면했을 것이다.
모아르테 제도는 에녹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곳. 아무리 악시온이 소중한 전우라도, 자기 목숨과 바꿀 만큼은 아닐 테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야. 내가 보냈네. 알고 있겠지만, 이번에 평민 거주 지역의 화재를 수습하면서 악시온 경이 내게 무척 불충하게 굴었거든.”
니콜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단, 성법사단까지 제멋대로 소집했더군. 위계로 따지면 그쪽 두 단장 모두 악시온 경의 아래인데 어찌 눈치를 안 볼 수 있었겠나?”
“…….”
“그도 모자라 황실에 난입해서 내게 화재 진압 명령을 내려 달라며 당당히 요구까지 했지.”
자리에서 일어난 니콜라스가 에녹의 앞에 다가가 섰다.
“어쨌든 뜻대로 들어주었네. 다만 위아래도 없이 군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그래도 모아르테, 제도는….”
“알아. 그만큼, 악시온 경의 죄가 컸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 악시온 경도 모르지 않았겠지.”
“…….”
“그런데도 그가 필사적으로 평민들의 터전을 구하려 한 이유가 뭘까.”
니콜라스가 뱀처럼 웃으며 에녹의 어깨를 꽉 쥐었다.
“자네가 거길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기껏 전공을 세우고 돌아와서 낸다는 안건이 죄다 그쪽 복지 법안이니.”
“전….”
“알량한 신념이야 자네만 가지고 있으면 되지, 왜 친구에게까지 세뇌하고 그래?”
이내 귓가에 속삭인다.
“악시온 경을 죽인 것은 자네야.”
에녹이 부들부들 떨었다.
크게 치뜬 푸른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니콜라스는 겨우 웃음을 참으며 계속 말했다.
“지켜야 할 게 많지 않나? 그러니 기어오르지 마, 에녹. 내가 견고히 만든 이 탑을, 무너뜨리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
“자네가 아무리 배짱을 부려봤자.”
좁은 거리에서, 둘의 눈이 매섭게 마주쳤다.
“무사히 챙길 수 있는 건, 네 목숨 하나. 딱 그것뿐이니까.”
이내 피식 웃은 니콜라스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며 뒷짐 졌다.
“전우의 시신은 직접 수습할 수 있게 해 주겠네. 이 정도의 자비는 보여 줘야지.”
에녹의 주먹이 벌벌 떨렸다.
분노하고 있지만, 제멋대로 날뛸 수는 없다.
이로써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주 잘 깨달았을 테니까.
“너무 무서운 표정 짓지 마. 혹시 아나? 악시온 경도 대단한 능력자니 멀쩡히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더 듣지 않고 돌아선 에녹이, 인사도 없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큭.”
건방진 태도에도 니콜라스는 그저 기쁠 뿐이었다.
그, 표정….
분노를 억누른 채 무력하게 벌벌 떨기만 하던 에녹의 표정이, 너무나 보기 좋아서.
“으, 으하!”
혼자 남은 니콜라스는 꼭 참았던 웃음을 기다렸다는 듯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