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대체… 어떻게?’
모아르테.
역대 황제들이 전부 탐냈으나 선뜻 손에 넣을 수 없었던 땅이다.
직접 정복하려던 선대 프리메라도 발길을 돌렸을 만큼 악명이 자자한 사지(死地).
‘말도 안 된다.’
악시온 리브르가 그렇게나 강한 능력자였나?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닷새 동안 홀로 섬에 갇혀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정복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자네가 모아르테의 마수들을 전부 토벌했다고?”
“운이 좋았습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마수의 수가 현저히 적어 가능했습니다.”
“이게 사실인가?”
당황한 니콜라스가 에녹을 향해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하시면 수습대를 꾸려 해가 진 이후의 점령지를 다시 확인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확실했다.
정말로 악시온이 그 사지를 정복했다는 말이다.
그것도 단신으로.
‘이게 무슨 일이지?’
니콜라스가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이는 제국의 경사요, 니콜라스는 황제로서 악시온의 전공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웃어야 하나?
아니면, 울어야 하나?
오랫동안 바라던 땅을 자신의 대에 손에 넣었음은 기쁜 일이다.
“새로운 제국령의 탄생을 경하드립니다, 폐하.”
하지만, 제거할 생각이었던 악시온 리브르가.
‘죽으라고 보냈건만….’
정복 영웅이 되어 돌아왔음은, 가히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 * *
악시온의 전역 파티가 있는 날.
나는 주문해 둔 케이크를 받으러 베이커리에 와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마탑 퇴근길에 마중 나온 체시어와 함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손님.”
“네!”
방긋,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주방 안으로 들어가는 낯익은 직원은 리코.
그는 여전히 연막용 직장인 베이커리 파티셰를 겸업 중이다.
“하던 얘기 계속해 줘.”
옆에 있던 체시어가 말했다.
“아! 내가 뭔 얘기 하고 있었지?”
“마탑주님이 너 한쪽 팔로 번쩍 들었다는 얘기.”
“맞다, 맞다.”
나는 오스카를 떠올리며 웃었다.
“번쩍까지는 아니지만, 혹시 못 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들리더라구. 운동 열심히 했나 봐.”
“…그랬구나. 그런데 너, 마탑에서 공부는 안 해?”
“응?”
“항상 다녀오면 하는 얘기가 마탑주님이랑 논 얘기뿐이라서. 둘이 하루 종일 같이 있어?”
뭐지? 지금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농땡이 피운다고 눈치 주는 건가?
난 내심 찔려서 발끈했다.
“고, 공부 하거든? 그런데 공부 얘기는 지루하잖아. 딱히 재밌지도 않은 얘기니까 안 하는 거지.”
고개를 끄덕인 체시어가 물었다.
“마탑주님은 너 들고 몇 분 버티셨어?”
“응? 스승님? 으음, 한 3….”
“3분?”
“…초.”
“그렇구나.”
정적이 흘렀다.
한참 만에 체시어가 말했다.
“나도 해 볼까.”
“뭘?”
체시어는 말없이 자기 팔을 눈짓했다.
“…날 들어 본다고?”
“응.”
“지금? 여기서? 굳이?”
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체시어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싫으면 말고.”
“앗! 아냐, 아냐.”
체시어가 뭔가 바라는 건 또 처음이라 거절하기도 뭣했다.
주춤주춤 체시어의 오른쪽 팔뚝을 잡고 무릎을 굽히니―
“히익!”
―단숨에 시야가 올라갔다.
“와.”
꼭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안정감!
체시어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안 무거워?”
“응. 하나도.”
어쩐지 체시어의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뿌듯한 기색이 비쳤다.
나도 새삼 뿌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꼴로 비쩍 말라 안쓰러웠던 체시어가 어느새….
“3초 한참 넘었다.”
그렇게 말하며, 체시어가 눈을 깔고 슬쩍 웃었다.
“풉! 너 설마 지금 스승님 이겨 보려고 했던 거야?”
유치하고 귀여워….
그런데 3초가 뭔가, 이 정도면 30분도 들고 있겠는걸.
“저, 주문하신 케이크가 나왔습니다만?”
“헉! 네!”
체시어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난 리코의 목소리에 허둥지둥 내려와 카운터로 다가갔다.
“음, 보기 좋네요.”
“아하핫!”
“하지만 여기는 업장이니까요.”
머쓱해진 내게 케이크를 건네준 리코가 이내 합장하듯 손을 모으며 방긋 웃었다.
“연애는 나가서 하실게요, 손님.”
“으악! 그런 거 아니에요!”
* * *
이른 저녁.
리브르 공작저 1층은 파티 준비로 시끄러웠다.
오늘의 주인공, 악시온을 데리고 내려가려던 에녹은 그의 방에서 급히 나오는 여인을 발견했다.
“마사?”
악시온이 슈나이더 후작가 삼남이었던 시절부터 그를 어머니처럼 돌봤던 유모, 마사.
그녀는 눈물범벅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 도련님. 우리 도련님. 끅. 안 돼요!”
“아니, 잠깐. 마사,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말을 해 봐요.”
“우리 도련님이 나쁜 생각을 하고 있다고요!”
“…악시온이? 그게 무슨?”
마사는 꾸깃꾸깃 접힌 편지 무더기를 내밀었다.
악시온의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찾은 모양인데….
[에녹에게.]
에녹은 황급히 제 이름이 적혀 있는 편지를 열었다.
[사랑하는 내 친구, 에녹.
양성소에서 처음 만나 우리가 서로 함께한 시간이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넌 내게 최고의 친구이자 가장 강한 동료고, 제일 믿음직한 전우야.
죽을 때가 되니 후회되고 미안한 기억만 가득이다.
내가 4년 전에 널 제도로 데리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넌 여전히 네 딸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날 원망하고 싶었을 텐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더 단단해진 너를 보며 자랑스러웠다.
네가 그토록 아끼는 딸이 예쁘게 자라는 것을 함께 지켜보고 싶었어.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운 밤이다.
앞으로 네가 가는 길이 순탄하길.
사랑하는 이들과 끝내 행복할 수 있길 하늘에서 기도하마.
사랑한다, 친구야.]
“풉.”
에녹이 웃음을 터뜨렸다.
죽을 줄로만 알고 청승 떨며 썼을 악시온의 유서.
“푸하하하학!”
“아니, 왜 웃어요?”
마사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마사, 걱정하지 마요. 바보 같은 놈이 자기 죽을 줄 알고 미리 유서 써 놨나 본데,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까.”
에녹은 놀리듯 악시온의 유서를 한 번 더 읽고 이번에는 배를 잡고 눈물까지 흘렸다.
“아하하하! 아아, 웃겨 죽겠네.”
웃겨서 눈물까지 난 척했지만.
실은, 코끝이 진짜로 찡해져서 난 눈물이었다.
* * *
“전역 축하해요, 삼촌!”
난 악시온의 무릎에 앉아 직접 만든 고깔모자를 씌워줬다.
“아니, 이게….”
내가 마탑에 들어가는 대신 황제에게 잠정 은퇴를 약속받은 악시온.
“이게 진짜야?!”
그는 오늘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파티 때 깜짝 선물로 주려고 비밀로 해 놨거든.
“리리스!”
“네!”
“나는 정말 괜찮아. 굳이 네가 마탑 가서 고생할 필요 없어. 말이야 공부하러 가는 거지, 어린애가 종일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어떻게 버텨?”
“거기 사는 것도 아니고 출퇴근하는데요, 뭐. 마탑 복지 최고예요. 공부도 쉽고 식사도 맛있어요. 그리구요, 저는 삼촌을 위해서라면 하루에 수학 문제 500개도 풀 수 있는걸요.”
“…….”
멍하니 눈을 껌뻑이며 나를 보던 악시온이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치겠네, 진짜.”
“에헷.”
말은 그렇게 해도 전역이 기쁘지 않을 수 없겠지.
내가 마탑에 붙어 있는 한 황제는 악시온을 건드리고 싶어도 비겁한 출정 명령으로는 힘들 것이다.
물론 호락호락하지 않은 황제이니 다른 수를 생각해 보겠지만….
“고맙다. 네가 고생했네.”
“아니에요! 괴물들 싹 다 잡느라 삼촌이 더 고생했죠!”
“…….”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수를 잡은 게 악시온이 아닌 걸 이 자리의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크흠.”
“으항항!”
악시온은 웃으면서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자아! 케이크 도착했습니다!”
“와아!”
그때, 집사 카론이 케이크를 들고 테이블 위로 날랐다.
생크림 위에 귀엽게 그려진 악시온의 얼굴과 ‘전역 축하!’라는 문구.
리코의 솜씨는 최고였다.
“삼촌, 고생했어요!”
“아버지, 고생하셨습니다.”
“공작님, 축하드립니다!”
나와 체시어, 카론의 축하에 악시온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민망한 듯 웃었다.
“얼른 촛불 켜고 노래 부르자. 전역 축하합니다~! 알지, 체시어?”
“아직 공작님 안 오셨어.”
“아빠 뭐 한대?”
난 2층에서 늦장 부리는 아빠에게 소리쳤다.
“아빠! 뭐 해! 빨리 와! 지금 노래 부를 거란 말이야!”
“어어, 기다려!”
아빠가 우당탕탕 내려오더니 짐짓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케이크에 촛불 켜기 전에 편지 수여식이 있겠다.”
“엥?”
아빠는 손에 곱게 접힌 종이 석 장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공주 나와라.”
난 악시온의 무릎에서 내려가 아빠가 주는 편지를 받아서 바로 열어보았다.
“아?”
와, 이건….
“다음, 체시어.”
체시어는 의아해하며 악시온을 바라봤다. 악시온도 뭔지 짐작이 안 되는지, 어깨만 으쓱할 뿐.
“아.”
곧 아빠에게서 편지를 받고 열어 본 체시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나머지 하나는 내 거야. 이건 직접 낭독하도록 하지.”
“아빠, 그건 좀.”
난 말리려고 했지만,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청 높여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내 친구, 에녹.”
그래, 이건 악시온이 아마 죽을 결심을 하고 떠나기 전 써 놓았을 ‘유서’였다!
“양성소에서 처음 만나 우리가 서로 함께한 시간이 벌써….”
“야!!!”
이제야 아빠의 만행을 눈치챈 악시온이 시뻘게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20년이 훌쩍 넘었다. 넌 내게 최고의 친구이자 가장 강한….”
“이 미친놈아! 하지 마! 내놔! 읽지 마!”
“어억!”
달려든 악시온이 아빠의 편지를 빼앗으려고 난동을 피웠다. 뒤엉킨 둘이 한참 난투를 벌였다.
“리, 리리스! 너도 읽지 마라! 이리 줘!”
악시온은 아빠를 깔아뭉갠 모습 그대로 내게 간절히 손을 뻗었다.
“에휴.”
난 그 소란을 지켜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 자식이, 진짜!”
“어어억! 으하하학!”
남자들의 우정이란 참 유치해….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