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 * *
이튿날.
나는 무려 한 달하고도 2주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훌쩍 자라버린 사실을 숨기려고 머물렀던 악시온 집 말고, 진짜 내 집, 루빈슈타인 공작저에!
“꼬맹이이이!”
“리리스!”
들어가자마자 시커먼 남정네 둘이 달려들었다.
누구지? 분명 쌍둥이였는데….
“오, 오라버니들. 이게 무슨, 어부부붑! 잠깐만!”
“야, 레온! 하지 마! 다쳐!”
대뜸 나를 낚아채서 뺨을 비비적대는 레온을, 테오가 말렸다.
“대체 뭐 하고 살았던 건데! 놀러 가도 만나 주지도 않고!”
“미, 미안해. 그런데 오빠, 왜….”
나는 어린 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두 금발 미남을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왜 이렇게 컸어?!”
“어, 오빠 컸지! 키 3cm나 더 컸어!”
“키 말고! 완전 어른 됐잖아!”
열여섯, 한창 성장기라 그런 걸까?
고작 한 달하고 보름 안 봤을 뿐인데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면 나 괜히 숨어 있었나?’
쌍둥이에 비하면 내가 훌쩍 자란 건 티도 안 났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머니랑 아버지도 너 볼 겸, 곧 저녁 먹으러 오신다고 했어. 그리고 우린 당분간 여기 있으려고.”
테오가 레온의 품에서 나를 홀랑 빼앗아 바닥에 내려주며 말했다.
“왜?”
“왜긴? 한 달이나 못 봤는데 너랑 같이 놀려고 그러지.”
테오는 섭섭한 얼굴로 말하다가 금세 방긋 웃었다.
“내일 말 타러 갈래? 요즘 날씨 좋은데. 놀고 나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날씨가 좋긴 뭐가 좋냐? 더워서 쪄 죽겠더만. 그러지 말고 계곡 가서 거미나 잡자.”
“아, 근데….”
뺨을 긁적이며 머뭇거리는데 아빠가 불쑥 끼어들었다.
“너희들, 못 들었어? 공주 며칠 전부터 마탑 들어가서 낮에는 공부하러 가야 해.”
“듣긴 했는데. 하루 종일이요?”
“으음, 거의 그렇지? 여섯 시에 끝나니까.”
쌍둥이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재빨리 둘을 달랬다.
“오라버니들,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날 있어. 내일은 아니지만. 그때 놀자!”
그래도 둘은 서운한 것 같았지만, 별수 있나.
“엇, 할아버지이이!”
그때, 뒤늦게 1층으로 내려온 할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반갑게 달려가 안겼다.
“녀석, 잘 지내다 왔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었고?”
“네! 할아버지는요?”
“나야 뭐, 똑같이 지냈지.”
“헤헤! 보고 싶었어요. 오늘 할아버지 옆에 앉아서 저녁 먹을래요!”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흐음.’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는 쌍둥이 오빠들과 달리 할아버지는 그새 조금 야윈 것 같아서, 나는 걱정됐다.
* * *
“너, 뭘 하고 다니는 게냐.”
부친, 노르딕이 불러 놓고 대뜸 꺼낸 말에 에녹은 딴청 피웠다.
“뭘 하고 다니다니요? 사업하고 있죠?”
“이놈이 말장난을. 내 말을 이해 못 한 게야, 못 하는 척하는 게야?”
노르딕이 쯧쯧, 혀를 찼다.
“애를 데리고 나가서 불편하게 남의 집에 맡겨 두고, 얼굴도 못 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갑자기 마탑에 애를 보내질 않나.”
“…….”
“네가 이리 이상하게 구는데, 내가 못 본 척할까?”
“아버지.”
“너 하고 싶은 거 안 말린다. 한데 너 하는 일에 애까지 휘말리게 하면, 내 그 꼴은 두고 못 보겠다.”
“…….”
“사실대로 말을 해. 애 데리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게야?”
에녹이 한숨을 삼켰다.
아이를 휘말리게 한다는 노르딕의 말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제가 공주 위험할 일을 하겠습니까.”
“위험하든, 위험하지 않든.”
노르딕이 목소리에 매섭게 힘을 주며 덧붙였다.
“네가 지금 숨기고 있는 걸 말해 보란 말이다.”
“…….”
에녹은 답답해하는 노르딕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다 부친을 위해서였다.
리리스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매일 전전긍긍하지 않나.
오스카도, 체시어도.
만약 노르딕까지 알게 된다면….
“숨기는 거 없습니다. 그리고 있다 한들, 공주 위험할 일은 없게 할 거고요.”
“이놈이 그래도!”
“다 아버지를 위해서예요.”
에녹은 단호히 돌아섰다.
“그냥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 * *
이튿날.
오스카는 마탑에 온 의외의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에녹의 부친, 노르딕이었다.
“바쁠 텐데 이리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네.”
“아뇨, 괜찮습니다.”
노르딕이 찻잔을 기울였다.
오스카는 앉아 있는 자세하며 손짓 하나하나에서 흐르는 노르딕의 귀족다운 기품이 신기했다.
아들 에녹과 무서우리만치 닮았는데도 분위기는 정반대랄까.
“내, 마탑주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왔네.”
“어떤 게 궁금하시죠?”
찻잔을 내려놓은 노르딕이 눈을 맞춰 왔다. 기세가 매서웠다.
“지금 내 아들이 하는 일은… 거의 보고 받고 있지. 고맙게도 자네가 내 아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예, 그런데?”
“다만 아들이 말을 아끼는 부분이 있는데, 내 꼭 알아야겠어. 자네가 아는 것이 있다면 듣고 싶어 왔네.”
“흠, 아드님이 말을 아꼈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일 텐데요. 제가 아드님이 뭐 하고 다니는지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아니, 자네는 확실히 알 걸세. 내 손녀 얘기거든.”
오스카가 멈칫했다.
리리스?
“리리스가 갑자기 마탑에 들어간 이유가 뭔가?”
오스카는 그제야 깨달았다.
‘말을 아낀다는 부분이 애 얘기군.’
에녹은, 딸이 프리메라라는 사실을 노르딕에게는 알리지 않은 모양.
반란의 과정을 다 공유하는데 딸의 정체를 빼놓고 설명하면, 당연히 이가 빠진 듯 드문드문 이해가 안 되니 노르딕으로서는 의아할 터.
“나는 내 손녀를 잘 알고 있네. 분명 영리하지만, 한없이 아이답기도 하지. 공부보다는 제 오라비들,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해. 자의로 마탑에 간다고 했을 리가 없네.”
예리한 노르딕의 지적에 오스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곤란하네. 이 사람은 애 정체를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리리스의 정체를 알게 되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힘들다.
체시어가 이번에 크게 사고를 친 이유도 리리스 때문이었고, 아이의 걱정에 툭하면 악몽을 꾸는 자신도 마찬가지.
‘아드님이 당신 혈압 올라서 일찍 저세상 구경하러 갈까 봐 말 안 하는 거라고요.’
속으로 쯧쯧, 혀를 찬 오스카가 둘러댔다.
“손녀를 잘 모르셨나 보죠. 아이가 원해서 마탑에 들어온 게 맞습니다. 여기 들어오면 좋지, 뭐. 다들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인데.”
“하필, 지금?”
노르딕이 매섭게 덧붙였다.
“내 손녀는 병역을 지지 않으니 굳이 간절하게 마탑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네. 그래서 마탑주도 직접 찾아와서 가르치지 않았었나.”
“…….”
“한데 이 시점에 갑자기 아이를 마탑으로 들여보냈다면?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추측일세.”
오스카는 놀랐다.
‘눈치가 왜 이렇게 빨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과연 제국 제일 가문을 평생 이끈 수장다운 예리함이었다.
“나는 내 아들이 하는 일을 지지하지만, 손녀가 그에 이용되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아.”
“…….”
“진실을 말해 주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이길 바라네.”
진실은 노르딕이 추측하는 것이 맞다.
리리스의 마탑 입성.
반란군 세력인 악시온을 황제의 손아귀에서 떼어내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으니까.
‘흠, 그런데 눈 뒤집혀서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까 그것도 사실대로 말하면 큰일 나겠고….’
하는 수 없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오스카가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피식 웃으며 착, 다리를 꼬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래.”
“처음 본 순간부터 손녀 따님이 제 마음에 쏙 들었고,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서 꼬셔 왔습니다.”
“……?”
노르딕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결국, 꼬시는 데 성공해서 애가 넘어온 것뿐이죠.”
“…….”
“솔직히 아버지나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허락 안 해 줄 것 같아서.”
오스카의 말을 곱씹던 노르딕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맞죠? 안 해 줬을 거잖아.”
“그게, 그게 지금 무슨….”
“그래서 몰래 꼬셨다고요. 내가 너 자알 키워서, 내 옆자리에 한번 앉혀 보겠다…….”
“이런 파렴치한 같으니라고!”
“깜짝아.”
순간, 노르딕이 벌떡 일어났다.
어째선지 시뻘게진 얼굴에 화가 가득했다.
‘아니, 뭐 이렇게 커?’
오스카는 놀라서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노르딕을 올려다보았다.
흉흉한 기세.
나이가 무색하게 떡 벌어진 어깨며 날이 잔뜩 선 눈빛.
그를 마주하고 있자니 움츠러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머리 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시건방지게 구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를 악문 노르딕이 부들부들 떨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이따위로 경우 없는 짓거리를 하는 놈인지는 또 몰랐군.”
“…? 무슨.”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할 만큼 실수했나?
오스카는 되짚어보았다.
아니, 마탑주가 마탑의 부흥을 위해 인재를 꼬셔 데려오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이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말이 좀 심….”
한마디 하려던 오스카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기품 있게 노르딕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색의 지팡이가 이제는 흉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스카는 건방지게 꼬고 앉았던 다리를 슬며시 풀었다.
“…말로 하시죠.”
“말로 하길 원하나?”
그때.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스승니임! 저 왔어요! 스승님의 귀염둥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리리스.
노르딕이 아이를 돌아보았다.
“…하, 할아버지?!”
“…….”
하,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녀를 빤히 쳐다보던 노르딕의 눈이 다시금 매섭게 오스카를 노려보았다.
그 기세에, 오스카는.
“예, 말로. 말로 하시길 원합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항복하듯 양쪽 손을 들어 보였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