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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192화 (193/261)

192화

“미안하지만 말로는 안 되겠는데.”

들고 있던 지팡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둔 노르딕이, 팔목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었다.

시퍼렇게 핏줄이 선 우람한 주먹.

맞으면 최소 사망이다.

“…….”

오스카는 그걸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까지 내 손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노르딕의 손이 오스카의 멱살로 향하려던 순간.

“할아버지이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리리스가 호다닥 달려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 왜 그러세요?”

노르딕은 오스카의 앞을 보호하듯 막고 선 손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서, 설마 스승님을 때리시려는 건 아니죠?”

“너는 나가 있어라.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은 매가 약이야.”

“네에에?”

“아니, 늙어서 노망이 났나? 내가 왜 짐승입니까?”

방패를 획득해 얼어붙은 입이 겨우 풀린 오스카가, 리리스의 어깨를 잡고 뒤에 바짝 숨어 소리쳤다.

“짐승이 아니면 뭔가? 자네가 애를 처음 봤을 때라면 고작 일곱 살이었네!”

“아?”

“잘 키워서…, 옆자리에 뭐?”

오스카의 말을 곱씹으며, 노르딕은 이마에 핏줄을 세우고 이를 갈았다.

“이런 역겨운 놈이…. 그 손 당장 안 치워!”

“알겠다! 이제 알겠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노르딕의 기세에, 오스카가 일어나 잽싸게 두어 걸음 도망쳤다.

“잠깐, 잠깐. 진정하시고.”

잔뜩 화가 난 할아버지와 의아해하는 손녀딸.

둘을 번갈아 보다가, 오스카는 한숨 쉬며 머리를 짚었다.

“오햅니다, 오해.”

* * *

때아닌 오해 소동.

오스카와 나는 장장 두 시간에 걸쳐 할아버지에게 해명해야 했다.

우리가 불순하지 않고 담백한!

스승님과 제자 사이라는 것을!

“역시 나는 이해가 안 되는구나.”

“또, 또 뭐가요?”

가는 길을 배웅하던 나는, 또 우뚝 걸음을 멈춘 할아버지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정말로 괜찮단 말이냐? 네가 정말 원해서, 여기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거라고?”

“…….”

물론 아니다. 아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내 정체도, 아빠의 사업에 내가 연관된 일들도 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오늘 마탑까지 찾아와서 오스카를 잡아먹을 기세였던 것만 봐도, 할아버지는 몰라야 한다.

내 걱정에 이렇게나 눈이 뒤집히시는 분이니까.

“공부가 재밌지는 않아요. 그치만 저에게는 야망이 있어요, 할아버지.”

난 탐욕 어린 눈빛을 연기했다.

“전 열심히 해서 꼭, 이 마탑을 손에 넣을 거예요.”

열한 살 손녀의 야욕에 놀랐는지 할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진심이냐?”

“네, 할아버지. 여기에서 배우다 보면 사람들한테 필요한 마법도 많이 만들 수 있잖아요. 또!”

난 정의로운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처럼 말했다.

“마탑의 주인이 되어서, 마법들이 옳고 의롭게 쓰이도록 할 거예요! 나쁜 곳에 안 쓰이도록 지킬 거예요!”

“…….”

할아버지는 주먹을 불끈 쥔 나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그렇구나. 네 생각이 그러하다면 뜻대로 더 배워야겠지.”

“네, 할아버지. 열심히 할게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끝나면 늦지 않게 집에 오고.”

“네에!”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할아버지가 마차에 올랐다.

나는 떠나가는 마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다 힘없이 축, 어깨를 늘어뜨렸다.

“와….”

진이 다 빠지네.

* * *

돌아와 보니, 영혼이 쪽 빨린 듯한 오스카가 꼭 건어물처럼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스승님….”

“어어, 그래…. 네 할아버지는 갔냐…?”

“네.”

“하아.”

오스카가 손을 들어 얼굴을 벅벅 쓸었다.

“죄송해요….”

“됐다. 네 할아버지가 극성인 걸 누굴 탓해.”

“흠흠. 그러니까 할아버지 오해 안 하게 말 좀 분명하게 하시지….”

소심하게 말하자 오스카가 인상을 확 찌푸리고 날 노려봤다.

“내 탓?”

“아아니이. 그렇잖아요. 제가 맘에 쏙 들었네, 그래서 꼬셨네 이러는데 어떻게 오해를 안 해요?”

“야, 난 네 할아버지랑 분명히 너 마탑에 오네 마네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고. 그럼 당연히 마탑에 데려가려고 꼬셨다는 말이지. 대체 그걸 왜 오해하는 거야?”

쯧쯧 혀를 찬 오스카가 계속 구시렁거리며 주섬주섬 겉옷을 걸쳤다.

“아주, 길 가는 개미도 수컷이면 경계하시겠어. 대단하다, 대단해.”

“스승님, 어디 가요?”

“황궁에.”

“왜요? 황제 폐하 보러?”

“어.”

탁상시계를 힐끗 쳐다본 오스카가 킥킥 웃었다.

“알현 신청은 내가 했는데 한 시간이나 늦었네.”

“……?”

난 입을 떡 벌렸다.

“뭐, 뭔 말이에요? 설마 그럼 지금 스승님이 먼저 약속 잡아 놓고 황제 폐하를 한 시간 동안 기다리게 하고 있는 거예요?”

“어.”

이게 무슨 패기지?

“약속이 있었으면 아까 말을 했어야죠! 가 봐야 한다고!”

“네 할아버지 오해가 안 풀렸는데 어떻게 가!”

“그건! 제가 말해도 되고, 나중에 풀어도 될 문제구요!”

“됐어. 노인네 입장에선 얼마나 분통 터지겠냐. 오해가 있으면 빨리빨리 풀어 줘야지. 생때같은 손녀한테 내가 지금까지 뭔 짓을 했을지 이상한 상상 하느라 뒤지게 열 받을 텐데.”

오스카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 몇 장을 챙겼다.

“그래도….”

오스카는 정말이지, 나랑 엮여서 안 해도 되는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오늘도 할아버지에게 내 사정을 숨겨 주려다가 벌어진 소동이고….

“표정 왜 그러냐?”

나갈 채비를 마친 오스카가 내 앞에 와서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 폐하도… 저 때문에 보러 가시는 거죠?”

“너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를 긁적이던 오스카가 손에 쥔 서류 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황제 놈 딴소리 못 하게 이거 하나 던져 주고 주둥이 꿰매 놓으러 가는 거야.”

“그러니까 황제 폐하가 삼촌 은퇴시켜 주겠다고 저랑 한 약속, 지키게 하려고 가는 거잖아요.”

“…….”

어두워진 내 안색을 의아해하며 살피던 오스카가 인상을 썼다.

“그게 뭐?”

“죄송해요, 스승님.”

“갑자기?”

“그냥 새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스승님한테 너무 받기만 하니까.”

난 괜히 발끝을 꼼지락댔다.

“솔직히 스승님은 고생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위험한 거 알면서도 아빠랑 괴물 잡으러 가 주시고, 삼촌 은퇴하는 것도 도와주시고….”

“…….”

“오늘 할아버지도… 걱정 안 하게 두 시간이나 해명하고 제 얘기도 숨겨 주시고….”

그에게 느끼는 부채감은 이렇듯 문득문득 나를 괴롭게 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에 기꺼이 휘말려 줄 때면, 이미 그에게 많은 것을 받았음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나를 살렸고, 그 대가도 자신이 지고 있으면서.

“어, 그런데 저는, 스승님한테 당장…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요. 바보처럼,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두서없이 시작해 버린 말을 어찌 끝맺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랑 안 만났으면… 스승님, 이렇게까지 고생 안 했을 텐데….”

인정하면 너무 미안해질 것 같아 외면해 왔지만, 잔인한 사실이었다.

내가 그의 삶을 망쳤다는 것.

“제가, 음, 그니까 제가….”

그래 놓고도 그를 구할 방법 하나 찾지 못한 채, 도움만 받고 있다는 것.

“야.”

“…네.”

“땅에 뭐 있냐? 고개 안 들어?”

“…….”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오스카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춰 왔다.

“나 봐라.”

소심히 눈만 들자 그가 피식 웃었다.

“잘 알고 있네. 너 때문에 개고생하는 거 맞아.”

“죄송….”

“그런데 고생하는 거 별로 나쁘지 않아. 결국 널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

“지금까지 내가 한 선택에 네가 강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전부 내 의지였고 후회도 안 해. 만약 후회했으면 4년 전에 너 찾아가지도 않았겠지.”

내 어깨를 붙잡은 오스카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다시 시작해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네가 무사히 살아남고 남들처럼 자라는 걸 꼭 봐야겠으니까.”

“스승님….”

“널 만난 건 나에게는 행운이었어.”

…아.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뭔가 할 때마다 일일이 신경 쓰고 미안해하고 그러지 마. 난, 널 위해서 하는 개고생만큼 행복한 일이 없거든.”

…정말, 어떡하면 좋지.

바보처럼 또 눈물이 찔끔 나서, 나는 오스카에게 안겨 그의 어깨에 시린 눈을 쓱쓱 비볐다.

“저도, 저도예요. 스승님은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에요….”

“아, 뭘 또 울어!”

“눈물이 나는데 어떡해요. 스승님, 제가 스승님 엄청엄청 사랑하는 거 알죠…?”

“에에. 말로만.”

오스카가 나를 끌어안으며 금세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킁. 전 스승님이랑 달리 가진 게 없어서….”

코를 훌쩍거리다 문득, 전생의 내가 떠올랐다.

아빠처럼 날 키워 준 오스카에게 고작 뽀뽀 한 번을 안 해 주고 더럽게 비싸게 굴었던 기억….

“헤헷.”

난 흐르는 코를 킁, 삼키고 오스카의 뺨에 쪽 뽀뽀했다.

“…….”

그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하.”

이내 웃음을 터뜨린 오스카가 내 뺨을 다정하게 건드렸다.

“그래, 이건 좀 귀하네.”

* * *

황궁, 알현실.

무려 황제를 1시간이나 기다리게 만든 마탑주는 상당히 뻔뻔했다.

‘건방진 놈.’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눕다시피 앉은 채, 손톱을 살피며 말한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새로운 제국령의 탄생.

바깥에서는 황실을 추앙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정복 영웅, 악시온 리브르 공작 각하 만세!”

오스카는 들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설마 리브르 공작을 모아르테로 보내셨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뭡니까.”

“용건이 뭔가.”

오스카가 품 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법식.

황제의 눈이 커졌다.

눈이 뒤집힌 그가 다급히 손을 뻗은 순간―

“에헤이.”

―오스카가 눈앞에서 그것을 도로 낚아채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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