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에녹은 허탈하게 선 오스카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시신을 수습하다가 품에서 발견했어. 아마 당신 말고는 못 읽을 것 같더라.”
“…….”
종이 한 장 가득, 빽빽이 채워진 고대어.
그마저도 일부러 잘못 쓴 문자에 순서와 배열이 뒤죽박죽 얽혀 암호처럼 적혀 있었다.
“당신한테 전해 주길 바랐을 거야, 맞지?”
“그래 보이네요.”
글로써 천기누설하는 것도 당연히 금제가 적용된다.
그래서일까.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끔 써 놓은 편지에는, 어떻게든 뭔가 전하려는 조부의 의지가 엿보였다.
“마탑주.”
에녹이 무거운 목소리로 불렀다.
“…미안해.”
“…….”
“정말, 미안….”
“미안할 것까지야.”
오스카는 피식 웃었다.
“다 내 선택이었는데요, 뭐.”
소멸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지만, 충격은 잠시였다.
그는 같은 상황이 와도 또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최후가 죽음이든, 그보다 더 비참한 삶이든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애나 꼭, 살려요.”
끝내 아이만 무사할 수 있다면.
* * *
회귀의 대가를 알았어도, 어째선지 오스카에게는 심경 변화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스승님.”
단지,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줄 알고 매일같이 쫓기듯 일에 매달렸던 그는….
“푸하하하학!”
…일을 안 했다.
죽는 것은 아니니, 이제 촉박하게 고생할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스승님!”
“아! 웃겨 뒤지겠다, 진짜.”
오스카는 팔자 좋게 내 무릎에 누워 눈물까지 흘리며 책을 읽었다.
“뭐 이렇게 웃긴 책이 다 있냐?”
“진심이세요?”
“뭐가?”
“정말 그 책이 웃겨요?”
[사영기하학의 역사와 입체도형의 원리 - 게릭 공식 원론 2]
암만 봐도 웃음 나올 구석은 없는 책 제목이었다.
“어, 웃긴데?”
“네에.”
아무래도 심경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고….
‘그냥 멘탈이 나갔구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혼자만 웃긴 책을 한참 탐독하던 오스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네.”
“한스랑 잘 지내고 있어?”
“갑자기요?”
마탑 영재반.
매일 함께 공부하며 다들 친해졌지만, 첫 만남부터 나에게 삐딱했던 한스는 여전히 좀 불편했다.
“잘 지내. 똑똑한 애니까.”
오스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음? 스승님이 괜히 이런 말을 할 리는 없는데.’
콕 집어 한스를 말하는 오스카가 이상해서, 머리에 힘을 줘 봤다.
‘한스가 혹시 원작에 나온 적 있는 애였나?’
제임스 브라운만큼이나 엑스트라 같은 이름.
기억 속 어디에도 없었다.
“나 같은 천재도 못 만드는 마법식이 있거든.”
“그게 뭔데요?”
“으음, 글쎄다.”
오스카는 큭큭 웃기만 하더니 다시 벌렁,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책을 펼쳤다.
“으하하학!”
그리고 또 웃기지도 않은 수학 공식 원론을 읽으며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았다.
* * *
한스는 다른 애들이 수학 문제를 풀 때 혼자 끙끙 앓으며 마법식을 연구했다.
“있지, 한스. 너 맨날 만들고 있는 그 마법식… 뭐야?”
난 조심히 물어보았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역시나 한스는 앙칼진 새끼 고양이처럼 경계했다.
“에이,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살짝 알려 주면 안 돼?”
“네가 대신 완성해서 마탑주님께 칭찬 들으려고?”
“나 그런 애 아니거든? 뭔가 척척 만드니까 대단해 보여서 물어본 거야.”
한스가 코웃음 쳤다.
“알려 줘 봤자 너는 못 만들어. 이거, 마나를 증폭하는 마법식이거든.”
“엥?”
“정확히는 마나를 증폭한다기보다 가성비 좋게 마법식을 재구성하는 개념이지. 똑같은 마법을 적은 양의 마나로 쓸 수 있는 획기적인 마법식이야.”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런 게 만들어진다면 능력자 간의 격차를 메꿀 수도 있다.
이를테면….
원작, 혁명의 날.
평민들을 진압하겠답시고 3계급 셉티마군을 보내 학살을 자행했던 황제.
그들과 맞서며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던 6계급 디에즈 용병들이, 이번에는 당하기만 하진 않을 수도….
“너, 너 대단하다!”
나는 눈을 빛냈다.
“그런데 혼자 만들 수 있어? 마탑주님한테 이 좋은 아이디어를 알리고 도움받아 보는 건 어때?”
“마탑주님이 만들어 보라고 하신 거야.”
“응?”
“마탑주님이 못 만드니까, 나한테 만들어 보라고 하신 거라고.”
한스는 내게 일일이 말해 주기가 귀찮은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 덧붙였다.
“이 마법식을 만들려면 일단 기본적인 마나 통이 없다, 또는 작다는 개념을 느낄 수 있어야 해.”
“아?”
“마탑주님은 고위 능력자니까,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런 상태를 아예 경험할 수조차 없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 같은 천재도 못 만드는 마법식이 있거든.”
그런 뜻이었구나.
그리고 동시에, 오스카가 비능력자 아이들을 모으고 가르쳐 온 목적도 알게 됐다.
단순히 천재여서가 아니라,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였다.
혁명의 날을 위해.
최소한의 희생, 끝내 성공을 위해.
오스카는 혼자 나름대로 분투해 오고 있었다.
“그런 거였구나….”
나는 내심, 또 울컥해지고 말았다.
“이제 저리 가라. 나 바빠.”
“한스, 말해 줘서 고마워. 너 진짜 대단해.”
한스가 나를 노려봤다.
난 최대한 무해하게 웃어 보이며 양쪽 엄지를 세웠다.
“나, 너처럼 똑똑한 애는 처음 봤다? 너 같은 천재가 제국에 두 명은 없을걸?”
“…….”
추켜세워 주자 한스는 대꾸 없이 다시 펜을 잡았다.
여전히 표정은 퉁명했지만.
“천재! 강력한 차기 마탑주 후보!”
다행히, 아주 미세하게 씰룩이는 입꼬리가 보였다.
* * *
오스카는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암호처럼 쓰인 조부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완벽히 해석할 수는 없었다.
다만, 드문드문 눈에 드는 내용과 아는 사실을 엮어 추측하듯 읽어낼 뿐.
[이토록 잔인한 굴레에 알면서도 발을 들였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하거라.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찾고 바꾸려던 것이 있으면 바꾸고 살리려던 것이 있으면 살려라.
나는 실패하였지만, 너는 원하는 바를 끝내 손에 넣길 바란다.]
‘예, 할아버지. 안 그래도 그렇게 할 겁니다. 나는 실패 안 해요.’
꼭 살아 있는 조부와 얘기하는 듯한 기분.
무심코 피식, 웃는데.
“마~탑~주~니이임!!!”
“깜짝아! 귀청 떨어질 뻔했잖아! 너 뭐야?”
보좌관, 로벨이 오스카의 책상 위에 쌓인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가리키며 기함했다.
“지금 뭐 하세요? 설마 오늘 하루 종일 일 안 하고 노셨어요? 제가 오늘 아침에 가져다드린 보고서가 아직 결재도 못 맡고 그대로네요?”
“너 지금 나한테 일하라고 눈치 주냐?”
“눈치 주다뇨? 제발 하루라도 쉬어 달라고 애원하던 제가 기억 안 나시는지? 저 지금 너무 감격해서 놀란 거거든요?”
“알았으니까 가. 나 바빠.”
“뭐 하시는데요? 아니,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농땡이를 피우시는지 물어보면 안 될까요?”
오스카는 로벨을 간단히 무시하고 편지를 마저 읽었다.
[그리고, 끝이 오면.
계속 살아가라.
어쩌면 네가 살기를 바라는 나의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죽음보다는 비참한 삶이 낫다.]
끝이라면, 6년 뒤.
결말이 죽음인 줄만 알았던 그날이 오면.
‘그럼 계속 살지, 죽나.’
오스카는 나름대로 최후의 날, 그 이후를 상상해 보았는데 썩 나쁘지 않았다.
리리스가 자신을 몰라본대도 딱히 외롭다거나,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괘씸한 공주님은 회귀하고 처음 만난 당시, 이미 자신을 싹 잊어먹고 몰라봤던 전적도 있지 않나.
“벌어 둔 돈 많으니까 근처에 집 한 채 얻어 살면 되지 않을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오스카의 혼잣말에 로벨이 착실히 대꾸했다.
“거기서 오며 가며 잘 사는지, 애 얼굴만 볼 수 있으면 되지, 뭐.”
“애요? 누구 애? 언제 저 몰래 애 만드셨어요?”
음, 나쁘지 않아.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이다,
[금제는 그전보다 심하게 너를 옥죌 것이다.]
다음 내용을 읽고는 조금 심각해졌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그 무엇도 타인이 너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게 해선 안 된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테니.]
멀리서 보기만 하려는데, 아무래도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
얼굴을 보면 말을 걸고 싶고, 나를 알아봐 줬으면 할 거고, 무심코 너무 가까이 다가갈지도 모른다.
조부는 그 모든 것을 예상했는지 퍽 냉정한 조언으로 끝을 맺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일이 없게, 너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
너를 아는 사람이 없고 또 너를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참, 나.”
오스카는 편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휙 내던졌다.
“뭐예요? 저 읽어 봐도 돼요?”
“읽을 수 있으면 읽어 봐라.”
심드렁하게 말하며 오스카가 소파 등받이에 힘없이 목을 걸쳤다.
‘확실히… 죽는 것보다 잔인하긴 해.’
차라리 죽고 나면 그만인데.
멀쩡히 살아 있으면 인간이기에 욕심이 생기겠지.
몰랐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고 난 후를 상상할 필요가 없었는데.
알고 난 지금부터는, 날 알아보지 못하는 너를 상상하면서 괴로워해야겠지.
“아, X발.”
순간, 울컥한 오스카가 손으로 눈을 덮었다.
“마탑주님?”
로벨이 심상찮은 오스카의 분위기를 느끼고 다가왔다.
“뭐, 뭐예요? 지금 우세요?”
“…….”
운다.
진짜 운다.
진귀한 광경을 눈에 넣은 로벨이었지만, 장난칠 생각은 쏙 들어갔다.
“하, 씨….”
“저, 저기요….”
쓸어넘긴 머리를 꽉 붙잡은 채,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흐느끼는 얼굴.
이토록 괴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로벨은 처음으로, 오스카가….
아주 어린, 스물한 살의 불쌍한 소년처럼 느껴졌다.
“내 인생 왜 이러냐, 진짜…. 뭐 많이 바란 것도 아닌데…. 얼굴도 못 보고 말도 걸지 말라는 게 맞냐….”
“어라?”
“너 없이 나 어떻게 사냐….”
…역시, 여자 문제였구나!
로벨은 잽싸게 오스카의 옆에 앉아, 오늘만큼은 형이 된 기분으로 그를 안고 토닥였다.
“그래, 시원하게 우세요. 울고 다 떨쳐내는 거예요. 세상에 여자는 많고 마탑주님은 괜찮은 남자잖아요?”
“…….”
“그러니까 충분히! 다른 여자 만날 수 있어요. 힘내 봅시다!”
이 등신은 또 무슨 개소리야.
오스카가 코를 훌쩍이며 로벨의 팔을 떨쳐냈다.
“꺼져, 좀!”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