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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197화 (198/261)

197화

* * *

일주일에 하루 있는 마탑 휴일.

난 약속대로 이른 아침부터 쌍둥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뒷산에서 말을 탄 뒤 거미도 열 마리쯤 잡았다.

“리리스, 무슨 일 있어?”

마냥 신난 레온과 달리 테오는 다소 우울해 보이는 내 표정을 계속 신경 썼다.

“앗! 아니야, 오빠. 그냥 오랜만에 노니까 몸이 좀 힘든가 봐.”

“흐음, 그래?”

오스카를 떠올릴 때면 착잡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고민이었다.

“그럼 점심 먹고 집에 가서 쉬자. 체시어 오늘 시간 괜찮나? 점심 같이 먹을까?”

테오가 제안했다.

“오, 체시어! 정복 영웅의 아들이 우리를 만나 줄까?”

레온이 킬킬 웃었다.

나도 풉 웃고 말았다.

‘삼촌도 집에 있으려나?’

요즘 제도는 정말 시끄럽다.

내일부터 모아르테 제도, 새로운 제국령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 기간.

거리에는 정복 영웅, 악시온 리브르를 찬양하는 목소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모두 궁금해하며 주시하고 있었다.

황제가, 악시온에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공치사를 할지!

‘생명력 얼마 안 들 텐데, 황제가 삼촌 부탁 들어주겠지?’

나는 이때를 노리고 악시온에게 미리 말해둔 게 있었다.

뭐냐고?

‘리코, 기다려요!’

정보 길드 <붉은 매>의 수장, 우리 리코를 위해 ‘칼’을 준비했다는 말씀!

“삼촌, 있잖아요. 이번에 삼촌, 황제 폐하한테 땅이랑 금화랑 선물 많이 받을 때…….”

“제 친구 괴롭힌 진짜진짜 엄청 나쁜 귀족 아저씨가 있거든요……?”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이니까!’

나는 쿡쿡 웃었다.

‘적으로 적을 친다! 이것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달콤한 맛 아니겠어?’

이 부탁은 프리메라인 황제만이 들어줄 수 있었다.

* * *

그 시각.

“황제 폐하 만세!”

“정복 영웅, 악시온 리브르 공작 각하 만세!”

단신으로 사지를 토벌한 악시온의 영웅담은 연일 제도를 뒤흔들었다.

“악시온 리브르 공작 각하, 만세!”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

악시온은 민망한 헛기침을 하며 앞에 앉은 황제, 니콜라스를 보았다.

“악시온 경.”

“예, 폐하.”

이는 전공을 치하할 의무가 있는 황제와 정복 영웅이 대면하는 자리였다.

니콜라스는 며칠 사이 몰라보게 수척해진 얼굴로 말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해 보게.”

* * *

리브르 공작저.

“오라버니, 천천히 가!”

“야, 레온!”

레온은 우당탕 체시어의 방으로 올라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정복 영웅의 아들이여! 형님이 왔다!”

열자마자 보인 건, 옷 갈아입고 있던 체시어의 널찍한 등판.

“엄마야!”

훤히 드러난 체시어의 등을 무방비하게 엿보고야 만 나는 바로 뒤돌았다.

이럴 줄 알았지, 내가.

전에도 꼭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조심하려고 했는데.

“너 점심 아직이지?”

“레온, 대체 넌 왜 이렇게 매너가 없어?”

테오가 핀잔을 주건 말건 레온은 불쑥 들어가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뭔? 훈련할 때 서로 웃통 까고 흙바닥에서 구른 게 몇 년인데?”

“리리스도 같이 왔잖아!”

“괜찮아. 상관없어.”

세 남자가 조잘거렸다.

“나 다 입었어, 리리스.”

난 체시어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뒤돌았다.

“안녕, 체시어. 같이 점심 먹으러 가지 않을래?”

“아.”

체시어는 난처해했다.

“나 약속 있는데.”

“약속? 뭔 약속? 누구랑?”

“…….”

레온이 묻자, 체시어는 대답하길 망설이다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굽혀 귓속말했다.

“후작 만나러 가야 해.”

“아하!”

로저 오닉스 후작.

체시어의 친부.

…이자, 황제가 체시어를 꾀어낼 미끼로 쓰고 있다.

반란군의 책사, 조제프 아저씨의 부탁으로 체시어는 겉으로나마 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 중.

‘고생하네. 혁명이 뭐길래.’

어린 시절 자길 학대했던 친부와 주기적으로 얼굴 맞대며 하하호호 해야 한다니.

난 고생하는 체시어의 팔을 두드렸다.

“오라버니들, 체시어 약속 있대. 식사는 그냥 우리끼리 하러 가자.”

“약속 뭔데? 왜 리리스한테만 말해? 너 우리 사이에 비밀 만드냐?”

“오빠, 그런 거 아냐.”

난 서운해하는 레온을 달랬다.

그때.

리브르 가의 집사, 카론이 열린 문을 똑똑, 노크하며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저, 도련님.”

카론은 어쩐지 난처한 표정으로 체시어에게 말했다.

“좀 내려와 보셔야겠는데요.”

“무슨 일이에요?”

“서신을 열 통이나 넘게 보내더니 오늘은 직접 찾아왔네요. 젠킨스 백작 말이에요.”

체시어가 한숨을 쉬었고, 나는.

‘뭐, 뭐라고? 젠킨스 백작?’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 * *

나는 혼란스러움을 가득 안고, 2층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1층, 거실에는 딸과 함께 찾아온 젠킨스 백작이 체시어와 마주 앉아 있었다.

‘저 인간이 여기 왜 왔지? 딱히 체시어랑 엮인 적은 없을 텐데?’

젠킨스 백작.

콧수염이 상당히 야비해 보이는 남성으로, 그냥 엑스트라라고 하기엔 누가 봐도 악당스러운 외모였다.

악당 맞다.

내가 이번에 악시온에게 부탁해서 황제의 손으로 치워버리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

‘우리 리코의 과거 회상으로만 잠깐 등장하고 조용히 저세상 가면 되실 분이 여긴 왜?’

[리코는 칼을 쥐기로 결심한 그 날을 떠올렸다.

젠킨스 백작가의 하인으로 살던 어린 시절.

비가 내리던 밤.

그는, 어린 두 남매를 홀로 키워내던 어머니의 처절한 비명을 들으며……]

난 원작을 복기하다 말고 고개를 힘껏 저었다.

‘됐다, 됐어. 이건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굳이 떠올릴 필요 없어. 하지 말자.’

평민을 학대하는 귀족의 만행이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제일 읽기 힘들었던 부분이다.

리코가 능력자들을 혐오하게 되고, 이 나라를 뒤엎겠다고 결심하는 ‘계기’.

바로 저 남자, 젠킨스 백작이 심어 준 깊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원작에서 아빠가 황제한테 머리 조아리면서 리코가 직접 저 인간 모가지 딸 수 있게 해 줬겠어?’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은 관대한 편이었다. 갱생의 여지가 보이면 품어 줬다.

하지만, 젠킨스 백작은.

그런 아빠마저 처절하게 응징하려 했던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

“혼담을 추진하려고 서신을 벌써 열세 통이나 보내 왔어요. 거절했는데도 포기 못 하고 오늘은 찾아오기까지 했네요.”

집사, 카론이 쪼르륵 모여 선 나와 쌍둥이의 뒤에서 속삭였다.

“미친놈이에요, 진짜.”

나는 이내 깨닫고, 놀라서 다시 아래를 봤다.

‘그, 그러니까 저 애를 체시어랑 결혼시키려고 한다는 말이지?’

젠킨스 백작의 딸.

비싼 옷을 입고, 백작의 옆에 앉아 지루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인 내 또래의 여자애.

“그런데 미친놈이라고 할 것까지 있을까?”

카론의 언사가 거슬렸는지 테오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 번 거절당했다고 깔끔히 포기하는 가문들 몇 없어. 그래서 우리 부모님도 요즘, 우리한테 들어온 혼담 일일이 만나서 거절하느라 고생하시는걸.”

“오! 아닙니다, 공자님. 저 인간은 미친 거 맞아요. 왜냐면….”

카론이 뭔가 더 말하려는데 아래층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부재중이시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시죠.”

“그렇군요. 그러시다면야. 한데, 우리 미카엘라가 공자님의 마음에 드시는지도 궁금하군요.”

젠킨스 백작은 히죽 웃으며 딸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제 생각이 중요한가요.”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

“전 아버지 뜻에 따를 뿐입니다. 아버지가 이 혼담을 받아들이시면 저도 불만 없습니다.”

“그러십니까?”

난 입을 떡 벌렸다.

진짜야, 체시어?

“아버지가 응하시면 성사될 혼담이니 저와는 더 얘기하실 필요 없습니다.”

악시온의 허락만 받으면 결혼하겠다고?

충격받은 내 입은 더 벌어졌다.

결혼에는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 않나?

악시온까지 갈 필요도 없이, 체시어가 자기 선에서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대답한다면….

‘승낙이나 다름없잖아! 쟤가 맘에 들었나?’

난 백작의 딸, 미카엘라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억지로 앉아 있는 티가 팍팍 나지만, 무척 예쁘장한 얼굴이긴 했다.

‘그, 그래도 안 돼.’

말려야 한다.

왜냐면, 젠킨스 백작은 곧 죽을 나쁜 사람이니까.

그가 체시어의 장인이 되는 참사만은 막아야 했다.

“오, 오라버니들. 있잖아….”

옆을 보니, 왜인지 쌍둥이는 나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리리스, 얼굴이 창백해.”

“꼬맹이, 충격받았어? 체시어가 결혼한다니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저기요? 공자님들?”

어째선지 카론이 멋쩍게 웃으며 우리 대화에 끼어들려 했지만―

“있어 봐!”

―레온이 더 빨랐다.

그는 내 머리를 푹 누르더니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체시어!”

“…형?”

체시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앉은 레온이 말했다.

“내가 낄 자리는 아니지만, 보고 있기만 하려니 좀 답답해서.”

“오, 혹시 앙트라세 공자님 아니십니까?”

젠킨스 백작은 레온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네, 맞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체시어, 너.”

레온은 과감했다.

“여기서 딱 말해. 네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아버지 의견이 왜 필요해?”

“뭐?”

“마음에 들면 든다, 아니면 아니다. 이 자리에서 혼담을 거절할지 말지 딱 정하라는 말이야.”

“…….”

멈칫한 체시어가 2층에 있는 나를 휙 올려다봤다.

“아니야, 형.”

그리고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버지에게 들어온 혼담이야. 내가 아니라.”

“……?”

그 말에, 일동 침묵.

몇 초 뒤 우리는 모두 경악했다.

“뭐, 뭐, 뭐, 뭐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레온이 입을 떡 벌리며 젠킨스 백작과 그 딸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잠깐. 그러니까….’

요즘 제도에서 제일 핫한 정복 영웅, 악시온 리브르.

계급, 도스.

초대(初代) 리브르 공작.

성기사단 부단장.

우월한 스펙에 이번에 사지까지 정복하고 돌아온 그는 ‘미혼남’으로, 귀족들 결혼 시장에서 두말할 것도 없는 인기를 자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따, 딸이 내 나인데? 아빠랑 내 나이 차인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와 테오의 뒤에서, 카론이 속삭였다.

“제가 미친놈이라고 했잖아요.”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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