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레온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백작의 딸을 가리켰다.
“따님 나이가?”
“열한 살입니다.”
“그럼, 리브르 공작님 나이는 아십니까?”
“예, 올해로 서른하나 되시지 않습니까?”
“…아시네.”
레온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옆을 돌아봤다. 체시어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기, 백작님. 제 삼촌이 리브르 공작님과 같은 나이이십니다. 그건 아시는지?”
“루빈슈타인 공작 각하 말씀이십니까? 예, 알지요.”
레온이 눈치 주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젠킨스 백작은 권력가 도련님과 말 섞는 것이 그저 좋은 얼굴이었다.
“허어. 삼촌 딸이… 그러니까 리리스가, 제 사촌 동생이… 어어, 지금 따님이랑 같은 열한 살인데…?”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아빠와 딸뻘이라는 지적을, 레온은 힘들게도 돌려 말했다.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제 딸이 많이 어리지요?”
젠킨스 백작은 다정하게 딸을 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금세 큰답니다. 이만하면 제도에서 손꼽는 미인으로 자라겠죠. 공자님들이야 아직 나이가 어려 잘 모르시겠지만.”
백작은 싱긋 웃었다.
“리브르 공작 각하는 아실 겁니다. 무릇 여자란, 어릴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곧 영글면….”
“와아악!”
열한 살 딸을 팔러 온 아버지의 말에 소름이 돋는지, 레온이 대놓고 자기 팔을 막 쓰다듬으며 소리쳤다.
“지, 집사.”
위에서 듣고 있던 테오가 황당한 표정으로 카론을 돌아보며, 소리 죽여 물었다.
“이번에 부단장님이 세운 전공 때문에 그래? 아무리 그래도, 리브르 가문에는 체시어도 있는데? 나이는 아들 쪽이 더 맞잖아?”
“젠킨스 백작은 옥타바예요. 작위로도, 계급으로도 저희 가문에 혼담 넣을 위치가 안 됩니다.”
카론이 속삭였다.
“체시어 도련님께 혼담 넣는 가문들은, 전부 제도에서 한가락씩 하는 고위 계급들이고요.”
아, 나는 깨달았다.
그러니까 체시어 쪽에 혼담 넣기에는 경쟁력이 없고.
“주인님은 잘나가시지만, 어쨌든 혼기를 놓치셨으니까요.”
그나마 딸의 ‘어린 나이’를 내세울 수 있는 악시온 쪽을 노렸다는 뜻.
‘와, 그냥 죽자. 죽어도 싸다.’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백작을 내려다봤다.
과연, 차마 말로 나열하기도 힘든 역겨운 짓들로 업보를 쌓고 원작에서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악당.
캐릭터 한번 확고했다.
* * *
젠킨스 백작을 보내고 나오는 길.
“어떻게 사람이 그러냐? 테오 넌, 그 미친 콧수염 아저씨 이해가 돼?”
“아니, 전혀. 나도 미친놈이라고 생각해.”
질색하며 주고받는 쌍둥이를 앞세우고 따라 걷는데 체시어가 물었다.
“혹시 오해했어?”
“응? 뭘? 아아, 잠깐 했지. 설마 상대가 삼촌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당연히 너인 줄?”
난 웃으며 체시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래서 네가 삼촌 허락만 있으면 결혼한다길래 놀랐다구.”
“그럴 리가 없잖아.”
“응?”
오해한 나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체시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내가 오해한 게 이상해? 넌 인기도 많고, 결혼까진 아니어도 약혼 정도는 생각할 나이니까.”
“…….”
“맘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지금이라도 결혼할 수 있지, 뭐.”
체시어는 뭔가 받아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별로였다.
“아, 물론….”
난 눈치 보다가 둘러댔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거나 그런 말을 나한테 해 준 적이 없어서, 아까 그 애랑 뭔가 있다고는 생각 안 했어. 그냥… 혹시, 음, 울 아빠 사업 때문에 저러나? 했지.”
“사업 때문이라니?”
“그, 그러니까 사업하는 데 결혼을 써먹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너 혼자 마음대로 결정 안 하고, 삼촌 허락받으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어.”
“…….”
체시어는 내 말을 이해하려는지 미간을 좁힌 채로 한참 침묵했다.
‘아직 체시어에게는 이런 말이 좀 어려우려나?’
난 원작에서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과 책사, 조제프 뤼트먼의 의견 충돌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조제프는 반란 세력을 하나하나 모으는 과정에서 ‘결혼’을 좋은 패로 쓰려 했다.
‘확실히 우리 편으로 만들고 싶은 가문이 있다면, 계약 결혼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조제프는 ‘가주’인 아빠가 강력한 가문과 재혼했을 때 황제의 경계가 심해질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아빠보다는 양자인 체시어를 결혼 장사에 쓰려 했지.’
아빠는 군말 없이 따를 체시어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기 선에서 조제프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솔직히 원작에서 결혼 얘기 나오니까, 계약 결혼으로 싹트는 로맨스? 그런 거 아주 잠깐 기대했었다….’
아쉽게도 원작에 기대한 로맨스는 없었다.
하지만, 아쉬워도 별수 있나?
양자였지만, 친아들처럼 체시어를 아끼고 사랑했던 아빠가 그를 한낱 패로 써먹었다면….
그야말로 캐릭터 붕괴!
‘캐붕도 그런 캐붕이 없었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체시어가 말했다.
“그런 것까지 해야 해?”
“응?”
“원래 내가… 그러니까….”
어째선지 체시어는 초조한 눈으로 덧붙였다.
“…미래에, 혹시 내가, 사업에 도움 된다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랑 결혼이라도 해?”
“아아! 아니? 아니야. 안 그래.”
“그럼 왜 그런 말을 해? 조제프 씨가 뭐라고 했어? 나한테도 알려 줘. 혹시 너한테, 사업에 필요하면 결혼이라도 하라고 한 거야?”
체시어가 답지 않게 흥분해서는 따발총처럼 쏘아붙였다.
“잠깐만, 체시어. 왜 이렇게 흥분했어? 천천히, 하나씩 좀….”
“이해가 안 되는데. 사업하는 데에 그런 희생까지 필요한가?”
“어?”
“결혼은 내 인생이 달라지는 문제잖아. 사업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 그렇구나?”
생각보다 체시어는 제 인생에 대한 애착이 꽤 큰 모양이었다.
그건 참 다행이지만.
“각자의 인생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사업을 우선하지 말자.”
“어어, 그래. 그런데 사업 때문에 꼬박꼬박 후작 아저씨까지 만나는 네가 이런 말 하니까 좀 이상하긴 하다….”
“그 사람 만나서 연기하는 건 백 번이고 할 수 있어. 딱히 내가 손해 보는 일 아니니까.”
“그래? 그럼 넌, 사업 때문에 손해 보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전에 황제 폐하 방에 쳐들어온 건 뭐야? 네 목숨은 손해 봐도 돼?”
“그건 사업 때문이 아닌데.”
“사업의… 최종 목표가 황제 폐하, 응, 그건데?”
사업의 종착점이 황제를 죽이는 건데? 그때 황제를 죽였으면 바로 사업 성공이었는데?
“너 때문이지.”
“응?”
“그땐 네 목숨이 달려있었으니까. 네가 잘못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체시어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이런 말 들으면… 네가 나한테 실망할 수도 있지만.”
“…….”
“내 우선순위는 황제를 죽여서 너를 안전히 만드는 거지, 사업을 성공시키는 게 아니야.”
체시어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황제를 죽이는 것. 내가 너를 위해 하려는 일이, 그냥 사업의 최종 목표와 같을 뿐이야.”
“으응, 그건 고마운데 목소리 좀 낮춰 줄래? 아무도 없긴 하지만….”
난 입술에 검지를 붙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제를 죽이느니 어쩌니 이렇게 대놓고 말할 거면, 반란 대신 사업이라는 말은 왜 써!
“난 네 아버지처럼 정의롭지도 않고, 대의 같은 것도 잘 몰라.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기꺼이 희생하고 싶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체시어….”
“실망했으면 미안. 하지만, 아마 내 생각이 바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
“널 위해 살고 있어.”
“…와.”
“네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사업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체, 체시….”
“야! 너희 안 오고 거기서 뭐 해? 체시어, 너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 갈게.”
레온이 멀리서 소리치자, 체시어는 나를 힐끗 보곤 먼저 떠나갔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난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널 위해 살고 있어.”
엄청난 말을 들어버렸는걸….
* * *
그 시각.
“……오랜 사감이 있는 자가 있습니다만, 폐하의 권한으로 박탈형을 부탁드려도 될지.”
악시온은 긴장하며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왜지?’
황제는 악시온의 청을 두말하지 않고 승낙했다.
프리메라만이 내릴 수 있는 최고형을, 고민도 없이 약속해줬다.
[젠킨스 백작]
황제 앞에 놓인 서류에는 젠킨스 백작이라는 자가 13년간 저질러 온 역겨운 만행이 낱낱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챙겨 든 황제가 말했다.
“어렵지도 않은데 길게 끌 필요 있나. 곧 해결하도록 하지.”
“…예, 감사합니다.”
악시온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쉽다고?’
친구를 괴롭힌 나쁜 귀족이라며 황제의 권한으로 벌을 내리게 해 달라는 리리스의 부탁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젠킨스 백작은 비능력자들에게 입에 담기도 힘든 짓을 저질러 왔다.
한데, 이는 죄가 아니다.
귀족이 평민을 폭행하고 죽이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황명으로 젠킨스 백작을 벌한다면?
‘지금까지의 황제와는 전혀 다른 행보다. 황제가 비능력자들을 함부로 대했다는 죄목으로 젠킨스 백작을 벌하면….’
귀족들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평민들을 막 대할 수 없을 터.
에녹도 이 거래가 무사히 성사되기만 한다면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다니 뭔가 이상한걸. 모아르테 정복이 큰 전공인 것은 맞지만….’
공치사를 위해 황제가 이리 손해 보는 일을 쉽사리 결정하다니?
‘속을 모르겠네. 설마 하루아침에 황제가 생각을 고쳐먹었나? 황제의 가죽만 뒤집어쓴 다른 놈 아냐?’
황제의 속내를 읽어내려는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폐하, 8황녀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그래. 어서 들라 하게.”
황제가 반갑게 맞았다.
‘지금? 나 있는데?’
악시온은 멈칫했다.
단둘이 알현 중인 자리에 찾아온 딸을, 왜 물리지 않고 들이는 걸까?
“이리 와서 인사해라, 이본느.”
“예, 폐하.”
굽이치는 블론드 머리칼.
에메랄드빛 눈동자.
아비인 황제와 소름 돋을 만큼 닮은 8황녀, 이본느의 나이는 악시온이 알기로 열일곱.
“악시온 경, 모아르테를 정복하여 제국의 위상을 드높인 경의 활약에 진심으로 탄복하였습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찾아온 황녀.
“…부족한 전공을 치하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황녀 전하.”
도도하게 내민 이본느의 손등에 입 맞춘 악시온은, 동시에 깨달았다.
이미 짜인 판이었구나.
황제는, 결코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완성하려고 안달이 나 있을 테지.
“지금 대륙 통일을 위해 황제가 가장 손에 넣고 싶어 할 인재. 바로 리브르 공작 각하의 양자인 체시어 경입니다.”
책사, 조제프의 말이 떠올랐다.
황제는 딸을 옆에 앉히고 다정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올해 자네 아들의 나이가 어찌 되지? 열다섯이던가?”
황녀를 데려와 체시어의 얘기를 꺼내는 황제의 의도는 빤했다.
혼약을 종용하려는 것이다.
‘하, 젠장. 그럼 그렇지.’
악시온은 억지로 웃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