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 * *
깊은 밤.
작은 펍 지하에 세 명의 사내가 은밀히 모여 있었다.
이는, 반란군의 긴급회의.
체시어와 8황녀의 혼담을 추진하려는 황제의 계략 때문이었다.
“아, 조제프. 왔나.”
“예. 일이 복잡하게 되었군요.”
마지막으로 도착한 책사, 조제프 뤼트먼이 눌러 썼던 로브를 걷으며 에녹에게 눈인사했다.
“대충 전해 들었지? 이거, 내 선에서 혼담을 거절해도 되겠나?”
악시온이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아뇨. 악시온 경께서는 절대 개입하셔선 안 됩니다.”
조제프가, 묘한 표정으로 침묵하는 체시어를 보며 말했다.
“체시어 경이 명분 없이 혼담을 거절해서도 안 되고요. 그럼 황제는 양부인 악시온 경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래. 그러면 안 되겠지.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체시어가 나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니.”
“맞습니다. 두 분은 체시어 경과 적당한 거리를 둬 주셔야 합니다. 지금 저희가 그리는 그림, 다들 알고 계시지요?”
황제는 체시어를 원했다.
“체시어 경은 무조건, 황제의 신임을 얻으셔야 합니다.”
조제프의 계략은, 황제의 뜻대로 일이 술술 풀려가는 듯이 보이게 하는 것.
황제가 체시어를 손에 넣고 침략 전쟁을 준비하는 데에 정신이 팔린 동안.
“3년.”
반란군이, 가장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적기였다.
“제도의 중간층 핵심 인사들 대다수와 마탑까지 손에 넣은 지금. 저는 3년을 봅니다.”
조제프가 체시어를 보았다.
“체시어 경은 황제의 검이 되어 모두가 마지막 준비를 마칠 3년의 시간을 벌어 주셔야 합니다.”
“한데.”
에녹이 끼어들자, 조제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 혼담. 아무래도 황제는 신중하게 굴고 싶은 모양이지요. 체시어 경을 완전히 손에 넣으려면, 그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으니까요.”
“곤란하네.”
“미치겠군.”
에녹과 악시온이 한숨 쉬었다.
“우리 계획이 성공하려면 체시어 경은 황제의 뜻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만, 그렇다고 황녀와의 혼담을 그대로 진행해 황실과 이보다 깊은 유착 관계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 말하며, 조제프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체시어를 훔쳐보았다.
‘체시어 리브르. 무뎌 보이지만, 아니다. 누구보다 감정적이야.’
대신전에 쳐들어가 성물인 <심판자의 검>을 강탈하고 황궁에 난입한 일.
‘사실 혼담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저 감정적인 사내에게 괜히 변수를 만들 필요는 없지.’
그 일련의 상황들을 알게 된 조제프는, 체시어라는 인물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악시온이 답답한 듯 물었다.
조제프는 끙, 신음을 흘리며 관자놀이에 양쪽 검지를 올렸다.
“제가 어떻게든 혼담을 거절할 만한 명분을… 생각해 보지요….”
“…….”
“…….”
만만찮은 사태에 봉착한 조제프와 에녹, 그리고 악시온.
체시어는 한참 침묵하는 그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업하는 데 결혼을 써먹을 수도 있잖아.”
‘리리스 말이 맞구나.’
그는 이내 깨달았다.
권력을 전복시키기 위한 물밑의 수 싸움에는, 복잡한 거래들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수많은 권력자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순수하지 않은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는 것을.
“흠. 이 녀석이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배짱 한번 부려 볼 수 있을 텐데.”
“아마도 그렇겠지요. 연인이 있는데도 억지로 혼담을 진행하면 외려 독이 된다고, 황제도 생각할 테니….”
악시온이 말하자 조제프가 한숨 쉬며 받아쳤다.
“하지만 체시어가 가깝게 지내는 관계는 황제가 전부 파악하고 있어. 그런 명분을 들이밀어 봤자 변명이라고 여기겠지.”
에녹이 단호히 짚어내자 조제프와 악시온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조제프 씨.”
주고받는 말들을 묵묵히 듣고 있던 체시어가, 문득 끼어들었다.
“예, 체시어 경.”
황제의 확실한 신임을 얻는 것.
황녀와의 혼담을 피하는 것.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해내야 하는 체시어에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제가 황제를 만나서, 원하시는 바를 얻어오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체시어의 말에, 모두 놀랐다.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어요.”
* * *
이튿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체시어와 함께 마차를 타고 마탑에 출근하는 길이었다.
“끝나고 젬한테 가자고? 무슨 일인데?”
왜 왔나 했더니 오늘 젬을 만나 부탁할 게 있다고 했다.
젬이 꼭 들어줘야 하는 부탁인데 거절할 수도 있어서, 옆에서 같이 설득 좀 해 달라고.
“얘기하자면 길어. 그래서 너 아침 먹을 때 말하려고 했는데….”
“아하! 그래서 아침부터 온 거였구나. 미안해. 나 아침 식사도 마탑에서 한 지 좀 됐어.”
“괜찮아. 어차피 젬도 들어야 하는 얘기니까, 저녁에 만나서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말할게.”
“그래, 뭐.”
난 창밖을 내다봤다.
마탑 출근길의 익숙한 풍경이 계속 스쳐 지나갔다.
“…밥이 맛있어서?”
한참 조용하던 체시어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낸 건, 마탑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뭔 소리야?”
“마탑에서 아침 식사까지 하는 이유 말이야.”
“아아!”
나 돼지 아니다!
“밥이 맛있긴 한데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스승님이랑 조금 더 많이 같이 있으려고.”
“…….”
“스승님 파업했거든. 요즘 일 안 하고 나랑 맨날 같이 있어 줘. 애들 공부도 직접 봐 주고 삼시 세끼 밥도 같이 먹고 산책도 해.”
나도 오스카도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그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최대한 많이 보고 있으려 했다.
서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사람들처럼.
“마탑에 내 방도 있는데….”
난 또 우울해져서 창밖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도 친구들처럼 그냥 마탑에서 계속 지내면서 출퇴근할까….”
“…….”
이내 마차가 섰다.
돌아보니, 체시어가 어째선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체시어? 나 갈게?”
“아, 응.”
젬한테 한다던 부탁 때문일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많아 보이는 체시어는,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했다.
“…이따 데리러 갈게.”
* * *
“그래서요, 아빠가 모아르테 섬이 관광지 되면 아빠랑 스승님이랑 저랑 셋이 여행 가자구….”
“…….”
오스카는 제 손을 잡고 쉴 새 없이 조잘거리며 걷는 리리스를 가만 바라보았다.
“…스승님?”
“…….”
조부의 시신을 인계받은 날 이후부터,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아이와 보냈다.
영재반 아이들을 직접 교육하며 옆에 붙어 있었고, 세 끼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물론.
“스승니임!”
“…….”
휴식 시간에는 이렇게 꼭 손을 잡고 산책까지 했다.
저녁을 먹고 아이를 배웅해 주는 지금이, 하루의 끝.
“안! 들려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남은 시간이나마 원 없이 함께하려는 마음이랄까.
“아, 미안.”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어. 이빨에 뭐 꼈어.”
“헉!”
리리스가 놀라서 허둥지둥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녀석, 아주 맛있는 식사를 했나 본데.”
“므므므… 머 꼈어요?”
큭큭 웃은 오스카가 떨어진 리리스의 손을 다시 가져와 잡았다.
“장난이야, 장난. 이 닦았으면서 그걸 속냐.”
“우쒸!”
계속 걷는데, 입구 쪽에 체시어가 보였다.
오스카가 혀를 내둘렀다.
“저 새끼는 뭐 저렇게 한가하냐? 아주 하루도 안 빼놓고 데리러 오네. 혹시 전생에 너 호위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거 아냐?”
“앗! 체시어 벌써 왔네? 오늘, 같이 친구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응, 안 물어봤어.”
어휴, 마음에 안 들어.
구시렁거리며 다가가는데, 가까워지는 체시어의 표정이 보였다.
왜인지 살짝 비껴간 묘한 시선.
리리스도 아니고, 오스카도 아니고 그 사이쯤 어딘가에 닿아 있었다.
‘어딜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오스카가 무심코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자―
‘얼씨구?’
서로 꽉 잡은 손이 보였다.
순간, 오스카는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참았다.
‘별꼴이세요, 진짜.’
사실, 요즘 들어 자길 경계하는 듯한 체시어를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리리스가 이제 제법 커서 그런지.
‘다들 난리네.’
함께 있으면 묘하게 보는 눈들이 자꾸 생긴다.
며칠 전 한바탕 마탑을 뒤집고 간 리리스의 조부, 노르딕도 그러지 않았나.
노르딕이야 아이의 할아버지니 그렇다 쳐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불순한 시선으로 오해하는 게….
오스카는 조금 괘씸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왔어, 체시어?”
“응. 수업 잘 받았어?”
“응응!”
체시어가 오스카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슬쩍 리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마치, 오스카와 잡은 손을 놓고 얼른 자기 손을 잡으라는 듯.
“스승님!”
그러나 내민 손을 미처 보지 못한 리리스가 뒤돌았다.
“엉.”
“저 갈게요. 내일 또 봐요. 내일도 아침 같이 먹는 거 알죠?”
“…….”
돌아선 리리스의 등에 대고, 내민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선 체시어.
그걸 본 오스카가 힘겹게 웃음을 참았다.
“그럼, 알지.”
“으항항! 그럼 오늘처럼 여덟 시 반에 식당 앞에서 봐요! 저는 친구 만나러 가야 해서, 이만!”
“오냐. 가라.”
잡은 오스카의 손을 이리저리 방방 흔든 리리스가 휙 뒤돌았다.
“…….”
그리고는, 들떴는지….
여전히 뻗어진 체시어의 손을 발견 못 하고 호다닥 마차로 달려가 버렸다.
참으로, 민망하게도.
“…….”
“…….”
남은 오스카와 체시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아.”
멋쩍게 손을 내린 체시어가 괜히 제 허벅지께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오스카는.
“풉!”
할 수 있는 최대한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