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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01화 (202/261)

201화

“대체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젬을 좋아했어?”

난 체시어에게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적어도 가장 먼저 내게 말해줄 줄 알았는데.

“젬. 내 말, 끊지 말고 들어 줘.”

하지만 체시어는 날 무시하고 젬을 설득하려 했다.

“리리스!”

무시당해서 충격받은 나를 보며 젬이 재빨리 소리쳤다.

“아냐! 우리 그런 거 진짜, 완전, 하나도 없었어! 야! 체시어 너 인마, 얼마 전에 나한테 리리스… 우부붑!”

갑자기 벌떡 일어난 체시어가 젬의 입을 손으로 막고 말했다.

“젬, 나 너 안 좋아해. 너를 여자로서 좋아하기 때문에 만나자는 게 아니야.”

“므으으읍?!”

이게 무슨 쓰레기 같은 발언이지?

체시어는 계속 젬의 입을 막은 채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랑… 만나는, 만나는 척을 좀… 해 줄 수 있을까.”

“……?”

만나는 척……?

* * *

돌아가는 길.

우리를 배웅하며, 젬은 체시어의 어깨에 기계적으로 팔을 둘렀다.

‘저게 뭐람.’

난 롬과 함께 뒤따라가며 어색한 젬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허, 허, 허.”

“젬, 고마운데.”

체시어가 속삭였다.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너랑 나랑 친한 거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그냥 입만 맞춰 놓으려고 한 거야.”

“그래?”

젬이 후다닥 팔을 떼어내며 질색했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야. 도와주는 대신, 알프레도 경, 알지?”

“걱정하지 마. 혹시 우리 사이가 그렇게 알려져도 오해하지 않게 잘 말해 둘게. 그리고.”

은밀한 거래.

“너희 용병단 출정할 때마다 알프레도 경이랑 같은 구역에 배치할게.”

제 권력을 이용해 젬에게 대가를 상납하는 체시어.

“진짜지? 약속했다?”

“응.”

썸남과의 피 튀기는 전쟁터 데이트를 약속받은 젬은 행복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우리를 보냈다.

난 마차에 타자마자 물었다.

“황제 폐하가 황녀님이랑 결혼하라고 했다고? 진짜야?”

“그렇게 될 일 없어.”

우리는 젬에게 복잡한 사정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갑작스러운 혼담을 피하고 싶으니 잠시 연인인 척 입만 맞춰 달라 부탁했고.

“여자 친구 있다는 말을 황제 폐하가 믿을까?”

“안 믿을 이유 있어?”

“그렇긴 하지. 젬이랑 친한 거 다 아니까. 그런데 왜 꼭 젬이야? 너랑 친하다고 알려진 사이라면… 으음, 나도 있지 않나…?”

“넌 안 돼.”

…차였다.

계약 여친이라고는 하지만, 1초 만에 차이니 어째 기분이 묘했다.

“응, 그래. 알았어.”

난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물었다.

“근데 왜 손 계속 잡고 있어? 이제 놔도 돼.”

체시어는 마차에 탈 때 잡아 줬던 손을 타고 나서도 놓지 않고 있었다.

“손잡는 거 싫어? 마탑주님이랑은 계속 잡고 있었잖아.”

“……?”

“황제는 내가 루빈슈타인 가문과 깊게 엮이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 그래. 너랑 연인이라고 하면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든 떨어뜨려 놓으려고 할걸.”

체시어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창밖을 보며 말을 돌렸다.

“아아!”

내가 계약 여친으로 적합하지 않은 이유.

‘그렇구나.’

황제는 체시어를 자기 입맛대로 써먹을 생각 만만이다.

한데, 사사건건 황제와는 노선을 달리하는 아빠가 혹 체시어의 장인이라도 되어 버리면….

“맞네. 듣고 보니 그렇네.”

“그리고 난 황제의 신임을 얻어야 해. 지금도 너랑, 그리고 루빈슈타인 가문이랑 너무 가까워서 위험한데 연인으로 엮이기까지 하면 믿음을 얻어내긴커녕 경계만 사겠지. 널 이용하려 들지도 모르고.”

“그렇구나.”

1초 만에 차였던 섭섭한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게다가 꼭 젬이어야만 하는 이유도 있어. 젬은 평민이니까.”

“젬이 평민인 게 왜?”

“만약 내 계획대로만 되어 준다면, 황제는 아마 젬을 가지고 나랑 협상하려고 할 거야.”

체시어는 나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협상 테이블에서 황제는 내게 빚을 지우겠지. 그리고 그 대가로 내게 요구할 거야. 침략군 사령관을 맡아 달라고.”

“아하! 와, 그렇구나.”

우리 반란군의 계획은 나도 대충 알고 있었다.

언더커버 작전.

체시어는 침략군 사령관을 맡으며 황제의 최측근이 될 예정이었다.

“이거 완전 한 번에 두 마리 토끼 잡으려는 거네?”

“맞아.”

“와아.”

난 새삼, 벌써 이렇게 커서 본격적으로 반란을 도모하는 체시어를 보며 심장이 뛰었다.

역시 주인공이다 싶고, 또….

성큼 다가온 ‘혁명의 날’이 비로소 실감 난달까.

“너 그런데 연기 잘할 수 있어?”

“무슨 연기?”

“황제 폐하한테 가서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거짓말해야 하잖아. 너 황제 폐하랑 단둘이서는 한 번도 안 만나 봤지?”

“응.”

“되게 눈치 빠르고 야비해. 너 연기 제대로 못 하면 바로 걸려.”

“연기 안 해. 그러니까 괜찮아.”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체시어는 말없이, 빤히 날 보다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굳이 연기할 필요 없어. 사실대로 말할 거니까.”

“뭔 소리냐니까?”

체시어는 끝내 대꾸를 안 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난 입을 삐죽 내밀었다.

* * *

며칠 후.

황제는 체시어를 불러들였다.

“이리 단둘이 보는 것은 처음이던가?”

“예.”

니콜라스가 손수 체시어의 찻잔을 채우며 말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고 있지?”

“아버지와 제 혼담을 나누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체시어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들었다니 얘기가 빠르겠군. 내 딸은 좋은 선택이 될 거야. 비전투계급 옥타바라 후계자를 낳아도 썩 좋은 능력치는 아닐 테지만.”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니콜라스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자식이야 뭐, 계급 높은 이에게서 따로 봐도 될 일이고. 내 딸은 출정하지 않고 가문 일에만 치중하면서 자네를 보필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지.”

“…….”

귀를 의심할 만한 발언.

체시어는 말문이 막혔다.

‘아내 말고 다른 여자와 자식을 보라는 말인가?’

적어도 제 딸을 보내며 할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자식도 예외 없이 그저 하나의 패일 뿐.

“황실과의 결합은 자네에게 날개를 달아 줄 수 있을 걸세.”

“죄송합니다. 따를 수 없습니다.”

“왜?”

니콜라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래?”

니콜라스가 피식 웃었다.

그는 이미 체시어의 주변 관계를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거짓이다.

예상 범주 안에 있던 변명이고.

“글쎄, 난 자네에게 만나는 이가 없는 줄로 알고 혼담을 추진하려 했던 건데.”

“아마 모르셨을 겁니다. 아버지께 폐가 될 일이라 누구에게도 알린 적 없으니까요.”

악시온에게 폐가 될 일?

무슨 말이지?

“혹여나 마음에 둔 이가 있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나? 자네 정도면 결혼 후에 정부 몇 두는 것쯤 흠도 아니야.”

“…….”

“내 딸이나 황실의 이미지를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아. 결혼은 거래고, 그 정도는 내 딸도 이해할 테니.”

“저는 결혼을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고, 사랑하는 한 사람과만 인연을 맺고 싶습니다.”

“아아, 그래.”

재미없는 발언에 니콜라스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고루하군. 아직 나이가 어려 뭘 몰라 그렇겠지.’

제 말을 안 믿는 듯한 니콜라스의 표정을 살피며, 체시어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너 그런데 연기 잘할 수 있어?”

걱정하던 리리스.

하지만, 그때도 말했듯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대상은 달랐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 자신의 진심을 그대로 말할 생각이니까.

“치기 어린 감정이 아닙니다. 호감이나 사랑 같은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제가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었을 때도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고, 그때부터 제게 삶이고 구원이었습니다.”

“…….”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해 봤습니다. 벌써 4년이나 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

니콜라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뭐지?’

한 자 한 자, 토해내듯.

차분한 것 같으면서도, 오래 묵은 감정이 격동적으로 느껴지는 고백.

바보가 아닌 이상 체시어가 진심임을 누구라도 느끼리라.

‘정말로 연인이 있나?’

미리 파악한 사실과 달랐다.

심지어, 이 정도라면….

혼담을 강요하는 것은 독이다.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어린 나이이기에, 더더욱.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어 둘 수는 없어도, 그 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옆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제 마음에 부끄럽지 않고, 또 그 친구를 존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눈을 가늘게 뜬 니콜라스가, 체시어의 말을 잘랐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어 둘 수는 없어도….”

마음은 있으나, 결혼을 할 수 없는 상대?

“…아버지께 폐가 될 일이라….”

고위 귀족, 양부인 악시온 리브르에게 폐가 되는 상황?

니콜라스는 바로 눈치챘다.

“평민이군.”

체시어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혼담을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아냐, 아냐. 죄송할 게 뭐 있나. 마음이라는 게 참, 멋대로 다룰 수 없는 노릇이지.”

니콜라스는,

‘오히려 일이 쉬워졌군.’

속으로 반색했다.

“맘고생이 심했겠는데. 왜, 아버지에게 말이라도 꺼내 보지 그랬나.”

“내키지 않아도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실 분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대로 굴었다간 저뿐 아니라 가문의 이름에도, 아버지의 명성에도 누가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니콜라스는 그 말에, 일어나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체시어의 친부, 오닉스 후작에게 받았던 보고.

“다행히 양부와 깊은 유대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양부를 절대 배신하지는 않을 아입니다. 자기를 거두어 주었다는 감사함과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부채감이 크더군요.”

그래, 체시어 리브르의 그런 점도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나.

빚만 지워 놓으면, 쉽게 충성시킬 수 있다는 점이!

은혜를 입으면, 그것을 갚을 때까지는 절대 배신하지 않을 성정!

“안타까워. 아직 어린 나이인데, 속으로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지.”

니콜라스는 일어나 체시어의 뒤로 다가갔다.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올린 그가 말했다.

“비능력자인가?”

“…디에즈입니다. 용병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아아!”

니콜라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알겠다. 누구인지.

이제야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졌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야. 마음에 둔 친구가 있는데 서로 섞일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

“그렇다고 포기하면 쓰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계급이야 나도 어찌 해결할 방법이 없지만….”

고개를 숙인 니콜라스가 체시어의 귀에 뱀처럼 속삭였다.

“…작위라도 하나 있으면 어떨까? 귀족들 눈총에서는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

법 위에 있는 황제, 니콜라스가 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하위 계급에게 귀족의 삶을 허락하는 것쯤이야.

“예?”

체시어가 전에 없이 놀란 눈으로 니콜라스를 휙 돌아보았다.

‘역시, 어리군.’

기대. 흥분.

어린 사내는 요동치는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폐하, 께서요….”

“그래, 그래. 내 충직한 신하를 위해 뭔들 못 해주겠나.”

“…….”

체시어의 숨이 대놓고 거칠어졌다.

“만약,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윽고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폐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을까요.”

“하하하하!”

니콜라스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무릇 주고받음이 마땅한 거래의 원칙까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어리고 감정적이지만.’

눈치도, 생각도 차고 넘쳤다.

다루기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검.

‘체시어 리브르.’

이 사내와 함께라면.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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