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 * *
체시어가 돌아간 후.
“…어떠시던가요?”
보좌관, 라몬이 조심스레 물었다.
황제는 웃었다.
“생각했던 대로였지.”
“얘기가 잘되셨나 봅니다.”
“그래. 이보다 더 잘될 수 없었을 정도야.”
“에녹 경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침략 전쟁에 거부감은 없던가요?”
“아아, 그거.”
체시어의 친부, 오닉스 후작은.
“체시어에게 루빈슈타인 부녀는 가족과도 비슷합니다. 에녹 루빈슈타인은 쭉 체시어의 스승이었고 그 딸은 남매처럼 같이 자라왔으니까요.”
그 점을 걱정했지만, 니콜라스는 상관없다고 여겼다.
체시어는 분명 에녹에게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에녹이 미처 주입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가치관.
“다음 달에 있을 출정 말인데. 회의 중에 또 둘이 잡음을 빚었다지?”
“아? 예. 체시어 경이 전략 회의 중에 또 에녹 경의 뜻에 반발하고 나섰지요. 아무래도 머리가 크고 경험이 많아지다 보니 요즘 들어 자주 에녹 경에게 대드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그럴 만도 하지.”
니콜라스는 웃으며 제국군의 전황 보고서를 뒤적였다.
[835회 공식 출정 기록
사령관: 에녹 루빈슈타인
민간인 사상자: 0명
제국군 사상자: 12명]
[838회 공식 출정 기록
사령관: 체시어 리브르
민간인 사상자: 8명
제국군 사상자: 1명]
[839회 공식 출정 기록
사령관: 에녹 루빈슈타인
민간인 사상자: 0명
제국군 사상자: 7명]
[841회 공식 출정 기록
사령관: 체시어 리브르
민간인 사상자: 9명
제국군 사상자: 0명]
에녹은 민간인들을 지키는 비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취하는 사령관이었다.
마수들을 민가로부터 최대한 떨어뜨리고 전투하기 때문에, 유인하는 과정에서 제국군은 불리한 그림을 종종 맞닥뜨렸다.
“나는, 고루한 에녹의 방식보다는 체시어 경의 전투 스타일이 훨씬 맘에 들어.”
하지만, 체시어는 아니었다.
군대의 안전과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극히 효율적인 전투 방식.
“목숨이라고 다 같나? 당연히, 각각 다른 값어치가 있는 법이지.”
체시어는 그걸 알고 있다.
비능력자보다 능력자의 목숨이 훨씬 값지다는 것.
어느 한쪽이 희생해야 한다면 귀중한 능력자가 아닌, 버러지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체시어 리브르를 선택한 건, 바로 그 이유야.”
체시어는 침략 전쟁이 무고한 피를 보는 싸움이 아닌, 제국의 위상을 드높일 명예로운 전투임을 잘 아는 이였다.
그것이 바로, 에녹 루빈슈타인이 끝내 체시어 리브르에게 가르치지 못한 자신의 ‘신념’이었고.
“음.”
벽에 걸린 지도를 향해 다가간 니콜라스의 손끝이, 몇몇 왕국들의 이름을 스쳤다.
대륙 통일.
“내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쭉 바라왔던 염원이야. 나는 꼭, 해내야 한다.”
에녹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번번이 좌절만 하던 차.
니콜라스의 손에 들어온 검.
체시어 리브르.
그는 신에게 배신당한 니콜라스를 위해, 선조들이 보낸 선물이었다.
“내게 충성하게 만들 것이다.”
“……그 딸은 남매처럼 같이 자라왔으니까요.”
체시어가 리리스 때문에 눈이 뒤집혀 황궁에 난입했을 때, 당시에는 무척 놀랐지만.
‘반대로 내가, 체시어 리브르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면 어떨까.’
생각할수록 니콜라스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제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빨까지 드러낼 수 있는, 충직한 짐승이라는 반증이었으므로.
* * *
늦은 오후, 마탑.
일주일에 한 번 리리스가 쉬는 날이면 오스카는 할 일이 없었다.
남은 시간이나마 인생을 즐겨 볼까 해서 일은 반의반으로 줄였지만, 정작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이게 맞아?’
정말 맞나?
애 없으면 재미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놀 것도 없는 게?
언제부터 인생이 애 중심이었지?
그럼 내 삶에 애가 없어지면 아무것도 안 남나?
“마탑주….”
그때, 귓가에 불어오는 숨.
“으악!”
오스카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날렸다. 뒤에 선 괴한이 “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뭐, 뭐, 뭐, 뭐야!!!”
소름 돋은 귀를 잡고 돌아보니, 에녹.
“커헉! 큭…. 어억, 나 죽네.”
다짜고짜 가격당한 명치를 붙잡고 무너져서는 엄살 부리는 꼴에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놀랐잖아요!”
“아니,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야? 이제 나 정도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겠는걸?”
“…….”
“무력까지 이렇게 부족함 없다니 분하다…. 최고의 마탑주…. 지덕체 완벽한 이 시대 최고의 남자….”
“…….”
오스카가 무심한 표정으로 에녹을 바라봤다.
어째 똑같은 말을 하는 걸 보니 딸에게 지령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스승님 칭찬하라고.
“왜 왔어요?”
“할 말 있어서.”
역시 조금의 타격도 없었던 모양인지 에녹은 순식간에 멀끔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집무실에 없길래 보좌관한테 물어봤더니 밖에 나갔다더라. 여기서 혼자 청승맞게 산책 중이었어?”
“들어가죠.”
“아냐. 같이 걸으면서 얘기하자.”
에녹이 옆에 서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아쉽지만, 이제 마탑주 얼굴 보러 자주 못 올 것 같아. 고위 귀족들과 접촉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라서 몸 사려야 하거든. 잘 숨겨도 슬슬 내가 딴 맘 품고 있다는 거 황제도 알게 될 테니까.”
“아하. 하던 대로 마탑은 계속 중립 박으라 이거죠? 당신이랑 가까이 지내는 거 황제 귀에 안 들어가게?”
“그렇지. 그래서, 만나더라도 절차 밟고 마탑주와 공작으로나 봐야 할 것 같아.”
오스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의외의 반응에 에녹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야,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나 못 보니까 서운해?”
“…그럼, 애는요?”
아하!
리리스를 못 만날까 봐 걱정하는 안색이었던 모양.
“응, 그럼 그렇지.”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상관없지, 뭐. 애초에 애를 마탑에 보낸 게 황제 뜻이기도 했으니까. 마탑주가 영재 발굴에 혈안이 돼서 공주 아끼는 거야 모르는 사람 없고.”
“아, 다행이네.”
금세 표정을 풀고 안도하는 오스카를 보며, 섭섭해진 에녹이 입을 쭉 내밀었다.
“나 못 보는 건 안 서운해?”
“뭐래?”
오스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물렸다.
“대체 당신 얼굴 못 보는 게 나랑 뭔 상관이에요? 애초에 그 말 하러 온 거면 왜 왔지? 난 애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당신이 자주 못 오겠다는 말을 뭐 하러 여기까지 찾아와서 해요?”
“와, 너무한다…. 나 지금 상처 받았어….”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난 그동안 마탑주랑 공동 육아하면서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손을 휘휘 저은 오스카가, 사뭇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벌써 윗대가리들 포섭에 들어간다니, 일이 빠르게 진행되나 보네요?”
“어, 맞아. 3년.”
“……?”
대뜸 앞뒤를 잘라먹고 말한 에녹이었지만, 오스카는 금방 알아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예요?”
“응, 진짜.”
3년.
원래였다면 6년 후였을 최후의 날이 그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울 공주 덕분에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동참할 이들, 배신할 이들을 리리스가 미리 가려준 덕에 에녹은 세력을 규합하는 데 드는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이야, 잘됐네? 애가 엄청 좋아했겠어요?”
“아니, 마탑주. 이 얘기는 공주가 몰랐으면 좋겠어.”
“…? 왜지? 아빠 사업 빨라지면 좋겠다고 맨날 기대하는데?”
“이렇게까지 빨라질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게 뭐가 문제인데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 아냐?”
“황궁을 점거하고, 황제의 목을 베기 전에.”
에녹이 무겁게 덧붙였다.
“난 체시어와 검을 맞대야 해.”
…맞다.
오스카는 사라진 시간 속,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어떻게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황제의 생명력을 단숨에 소모시키려면 내가 조종당하는 방법밖에 없거든.”
그날도 같았다.
선택지가 죽음밖에 남지 않은 순간, 황제는 자신의 남은 수명을 전부 소모해 에녹을 복종시켰다.
“리리스는 체시어가 무사히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했지만….”
“그래요. 애가 아는 때랑은 상황이 좀 달라졌겠죠.”
그때 체시어의 나이는 스물하나.
완벽하게 성장한 육체가 정점을 찍은 상태였고 경험도 풍부했다.
심지어 마나의 격차를 줄여줄 수 있는 성물 <심판자의 검>까지 들고 싸웠다.
그럼에도 체시어는 고전했다.
끝내는 에녹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체시어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 부족해. 3년 동안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최후의 날이 앞당겨진 지금.
체시어가 에녹을 이길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시간이 줄어든 것.
그것이 가장 큰 변수가 되었다.
“나도 내 한계를 잘 모르겠고….”
에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지만, 오스카에게는 뭐랄까. 묘하게 재수 없게 들렸다.
“맞다! 내가 시간 나면 양성소 가서 당신 마나 측정 다시 한번 해 보라고 했었잖아요!”
“응, 갔었지.”
“원래 구형 마나포말이 백만까지 측정됐는데 이제 천만까지 되거든요. 체시어 걔가 이백만 정도였던가? 걔랑 당신이랑 얼마나 차이 나는지 대충 가늠해 보면….”
“…….”
말없이 방긋 웃는 에녹의 얼굴을 보며, 오스카가 말끝을 흐렸다.
“저기요? 설마?”
“그래, 설마가 맞아. 9가 일곱 자리 뜨더라고.”
9999999.
천만까지 확인할 수 있게 만들어 뒀던 마나포말로도 한계를 측정할 수 없단 뜻이다.
“…진짜 미친 인간이네.”
“솔직히 마탑의 기술력에 나 좀 실망했잖아.”
“인간아! 그게 왜 마탑의 기술력 문제야! 평균 규격이라고는 다 파괴하고 다니는 당신이 비정상이라는 생각은 안 해요?!”
대체 전생에서 체시어는 에녹을 어떻게 제압했던 걸까?
“리리스도 그 사실을 알 테니까, 일이 너무 빨라진다고 하면 분명히 걱정할 거야.”
“저기요. 만약에, 진짜 만약에.”
“체시어가 못 이기면?”
에녹은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날 죽여야지, 뭐.”
“아오, 좀!”
“난 체시어를 믿어.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오면, 날 제압하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훨씬 쉬워.”
“…….”
“죽는 건 나여야겠지. 내가 살아서 계속 황제에게 조종당한다면….”
에녹은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끔찍했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전례 없는 최고의 능력자가,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검을 휘두른다면?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라 담백하게 자책하는 말인데도, 왜일까?
오스카는 재수 없었다.
“지랄 났다, 지랄 났어….”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