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떠나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에녹이, 체시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다. 연기 좋은데.”
“…….”
에녹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체시어가,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연기, 아닙니다.”
“응?”
“제가 공작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체시어는 에녹과 검을 맞대야 할 제 모습을 수십, 수백 번 머릿속에 그려 왔다.
그러나 가상의 전투에서 자신은 단 한 번도 에녹을 이긴 적 없었다.
“이겨야지.”
“공작님보다 강해진 저를 상상할 수가 없어서요.”
최후의 날.
황제는 체시어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나서야, 그가 성력이 없어 프리메라에게 지배받지 않는 능력자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순간.
생존이라도 하기 위하여 황제가 선택할 방법은 딱 한 가지.
체시어에게 대적할 수 있을 만한 유일한 능력자, 에녹을 조종하는 것.
끝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프리메라의 능력을 빼앗아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수명을 전부 소모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니 에녹과 체시어가 서로 검을 맞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3년 안에 제가 공작님께 닿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그래도 미룰 수는 없다. 알지?”
“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항상 쫓기는 기분으로 서둘렀다.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프리메라인 리리스의 정체를 숨겨가며 싸워야 하는 그들에게는, 일분일초가 살얼음판 같았으므로.
“내가 항상 했던 얘기, 기억하지?”
“…….”
“정 나를 제압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망설이지 마라. 그때는….”
“공작님.”
체시어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괜히 약한 소리를 해서 걱정하시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어느새 저만큼 자란 체시어의 눈이 빛났다. 에녹은 작게 웃었다.
“무조건, 해내겠습니다.”
* * *
모아르테 제도 정복 기념 축제가 끝난, 9월의 어느 날.
‘이상하다, 이상해.’
난 마탑에 출근할 준비를 하며 창밖을 힐끔힐끔 내다보았다.
‘시위대를 잡아가긴 한 모양인데.’
치안을 보장해 달라며 황제에게 목청 높이던 평민 시위대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축제 때문에 형 집행을 미뤘나 보지? 아직 살아있을까?’
원작에서, 황제는 제도 한복판에 시위대들의 잘린 목을 내걸었다.
‘감히 기어오르면 이렇게 된다’라고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곧 그 끔찍한 광경이 펼쳐질 예정이라 매일매일 우울했는데….
“공주, 마탑 안 가? 뭐 해?”
“어어, 아빠!”
난 곧바로 물었다.
“밖에서 시위하던 사람들 어떻게 됐는지 알아? 없어졌어!”
“아아, 없어진 게 아니라 시위를 그만뒀지. 황제 폐하가 요구한 걸 다 들어줬거든.”
“……?”
난 아빠의 말을 곱씹다가 입을 떡 벌렸다.
“그, 그게 정말이야?”
황제가? 왜?
설마 갑자기 착해졌나?
놀란 내 표정을 보며 씩 웃은 아빠가,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춰 왔다.
“실은 아빠가, 폐하랑 협상하고 왔어. 그때 불났던 거, 황제 폐하가 그랬다는 증거를 잡았거든. 정확히는 아빠가 아니라 리코가 구해서, 아빠한테 넘겨줬지.”
“…? 세상에! 정말?”
“응, 정말.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보다는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황제 폐하에게도 싸게 먹히는 일이니까.”
“와!”
미쳤다, 리코리코!
역시 엄청난 수완가!
“리코 대단해! 대체 어떻게 증거를 잡았대?”
“공주 덕분이래.”
“응?”
아빠가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공주가 리코한테 시위 준비하는 사람들 미리 알아봐 달라고 했잖아.”
“응! 그게 왜?”
“그거 알아보는 도중에 우연히 잡은 증거래. 그러니까, 다 우리 공주 덕분.”
“우와! 나, 나 지금….”
난 벅차서 뺨을 붙잡았다.
“너무 행복해!”
너무너무 기쁜 나머지, 만세!
“아빠 최고야! 역시, 아빠는 영웅이야!”
사실, 아빠가 빠른 혁명을 위해 시위대의 죽음을 모른 척하려는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데.
‘주인공은 다 생각이 있구나!’
감히 정의로운 에녹 루빈슈타인의 뜻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아빠가 사람들 살려 줬어!”
“음, 아니야.”
아빠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영웅은, 우리 공주야.”
“…….”
“아빠는 공주가 쉽게 쉽게 터 주는 길로 가고 있을 뿐인걸.”
아빠가 깊어진 눈을 맞춰 왔다.
“우리 공주가 바로 영웅이야. 이번에는, 그래.”
…이번에는.
그래.
원작에서는 빌런에 지나지 않았던 내가, 지금은 뭔가를 해 내고 있다.
새삼 뿌듯해져서 코끝이 시큰했다.
“라라 공주! 알지?”
“응!”
요술봉을 휘두르며 악당들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 제국 최고의 인기 동화 주인공!
라라 공주!
“울 딸이 바로 주인공, 라라지!”
“엣헴, 맞아! 나 라라 공주야! 아빤 용사 루이!”
“아니? 루이는 체시어 시켜주자. 루이가 남자 주인공이니까.”
“엥. 그럼 아빠는 뭐 할래?”
“아빠는… 코코 할까? 우리 공주 지켜주게?”
“으응?”
코코는 라라가 데리고 다니는 마수, 슬라임이다.
라라가 위험할 때마다 집채만큼 커져서 대신 싸워 주는 말 잘 듣는 친구인데….
“코코는 죽잖아.”
마지막 화에서 최종 보스인 마왕에게 조종당해 주인도 못 알아보고 라라를 공격하다가, 용사 루이의 칼에 썰리고 만다.
“에이, 누가 뭘 하든 그게 뭐가 중요해.”
아빠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 공주가 주인공인 거야. 아빠한테는 그게….”
“…….”
“…그게 가장 중요해.”
* * *
마탑, 영재교육실.
공부는 재미없다. 나는 심드렁하게 펜을 굴리며 한스를 가르치는 오스카를 구경했다.
그는 제법 다정했다.
“…π/6부터 π/3까지 정적분해서 tan x 마이너스 cot x 값을 구할 수 있지? 그럼 여기서….”
물론… 10살짜리에게 가르치는 수업 내용은 다정하지 않았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에휴, 그나저나 아빤 왜 그렇게 재수 없는 소릴 해서….’
난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코코 역할을 맡겠다는 아빠 말에, 문득 걱정이 든 탓이다.
‘체시어가 아빠 이길 수 있겠지?’
최후의 날.
체시어는 황제의 종속 마법에 걸릴 아빠를, 무사히 제압해야만 한다.
어쩌면 황제의 목을 베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겠지.
원작대로만 간다면 걱정할 필요 없지만.
‘반란이 얼마나 빨라지려나?’
변수가 생긴다면, 원작이 얼마나 앞당겨지느냐― 하는 것.
‘하아, 내가 그 종속 마법이라도 풀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난 정말 쓸모가 없다.
프리메라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섭리 때문에 황제의 능력을 뚫을 수 없는 몸.
‘정말 짜증 나. 그런 바보 같은 제약만 없어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야?’
황제에게 종속당해 있는 다섯 명의 능력자, 친위대도 문득 떠올랐다.
죽을 때까지 황제를 위해 싸워야 하는 그들은, 칼 들고 달려오는 체시어의 앞을 막아서지만.
‘전부 죽지.’
당연히 상대가 안 됐다.
평생 황제를 지키는 꼭두각시로 살다가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썰리는 운명.
역시 엑스트라 복지라고는 없는 세계관이다.
‘친위대에게 걸린 세뇌 푸는 데에 생명력이 얼마나 들려나.’
4년 전 성수 사태 때, 나를 전쟁터로 끌고 갔던 친위대 마검사.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무심코 팔찌를 보려던 난―
‘에휴, 나 바보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팔찌는 능력 사용이 가능한 경우만 보여주니까, 당연히 작대기나 뜨겠….’
3months
“뚜와이씨!”
나는 깜짝 놀라, 작살 맞은 생선처럼 자리에서 펄떡 뛰고 말았다.
“뭐야?”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놀라서 팔찌에 시선을 고정한 나를.
“너 또 뭔 짓 했어.”
“아, 아녀. 암것도 아닙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지? 뭐지? 팔찌에 시간 뜬다는 건 내 능력이 먹힌다는 소린데? 대체 어떻게? 내가 어떻게 황제가 건 세뇌를 풀 수 있지?’
설마 힘의 섭리가 사라졌나?
‘그렇다면 황제 죽어!’
-
‘우쒸, 그건 아니네.’
대체 뭐지?
난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열심히 생각했다.
‘힘의 섭리는 여전한데, 왜 황제가 건 세뇌는 뚫을 수 있지?’
생각해라. 생각해.
‘헐, 잠깐만. 설마?’
* * *
황제, 니콜라스의 방.
“축제 기간에는 피 보기가 싫어 미뤄 뒀지만, 이제 슬슬 해결해야겠군.”
니콜라스가 보좌관, 라몬에게 손을 까딱하며 명령했다.
“젠킨스 백작이라는 자를 내 앞에 데려와라. 약속대로 박탈형을 집행하겠다.”
“지, 진심이십니까?”
라몬은 내키지 않았다.
많은 비능력자를 학대하고 죽인 귀족, 젠킨스 백작의 처벌.
이는 전쟁 영웅, 악시온이 직접 황제에게 한 요구였다.
“저, 폐하. 악시온 경이 왜 그런 요구를 했는지 아시지요? 폐하께서 직접 젠킨스 백작을 처벌하시면….”
“그래, 알아. 내가 바보인가? 그것들의 의도도 못 읽게?”
“…….”
“내 손으로 그자를 벌하는 순간 버러지들의 숨통이 트이겠지.”
황제가, 평민을 죽이고 학대했다는 죄목으로 귀족을 처벌한다면?
낮은 계급들을 함부로 대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 없던 귀족들은 전부, 경각심을 갖게 될 터.
그러니 젠킨스 백작을 황명으로 처벌해 달라는 악시온의 요구는 분명 에녹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다 들어줘야지, 별수 있나. 지금 에녹이 못 할 것은 없어.”
“……?”
뭐지? 라몬은 의아한 눈으로 니콜라스를 살폈다.
자꾸 에녹에게 휘둘려 이 굳건한 계급제에 금이 갈 짓만 하고 있는데, 왜인지 황제는 태연해 보였다.
“에녹의 딸이 목줄이 되어 주지 못한 순간부터, 다 예견된 일이었으니 말이지.”
거리낄 것 없는 에녹은 제 신념을 뿌리내리려는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녹이 멋대로 날뛸 수 있는 시간은 잠시뿐.
“오래 기다릴 생각은 없다.”
끝내 대륙 통일을 마치고 ‘정복왕’으로 역사에 첫 이름을 새기는 순간.
황제의 위상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치솟을 것이다. 또한, 이솔렘 왕국의 진귀한 마법과 능력자들을 전부 손에 쥘 수 있겠지.
“조금만, 더.”
능력자들의 육체가 가장 뛰어나게 무르익는 시기는, 대략 스무 살 전후.
“늦어도, 3년.”
새로운 검, 체시어의 성장을 상상하며 니콜라스는 웃었다.
“지금을 즐겨 둬라, 에녹.”
* * *
에녹 루빈슈타인은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반란의 명분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루빈슈타인을 제외한 제국의 5개 공작 가문 중 3개 이상은 뜻을 함께해야 합니다.”
가장 까다로운 이들을 포섭해야 하는 시점.
준비를 마친 사내는 냉정한 눈빛으로 주저 없이 방을 나섰다.
* * *
‘3년.’
황제는 모른다.
‘내 검이 네 목에 닿을 날이다.’
이 사내가 끝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 * *
‘3년.’
서로가, 각자의 야망을 피워 올릴 격전의 날을 향하여―
‘그간 마음껏 날뛰어 봐라, 에녹.’
시곗바늘은 흐르기 시작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