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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05화 (206/261)

205화

* * *

점심시간.

오스카의 집무실에서, 나는 팔찌를 계속 쳐다보았다.

‘황제의 친위대! 성기사 아저씨의 종속 마법을 풀려면?’

3months

‘역시, 다 되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난 확실히 깨달았다.

‘성물 때문이야.’

원작과 달리,

그때의 내게는 없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있는 것.

운명을 재단할 수 있는 성물.

사도의 심장이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아쉽지만 힘의 섭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친위대에게 걸린 세뇌는 그 섭리를 무시하고 내가 풀 수 있다.

왜냐?

그들은 주인공들의 승리를 위해 무고하게 죽는 목숨이니까.

다시 말해, 운명을 바꿀 수 있도록 성물이 허락한 범위 안에 드는 것이다.

‘그러면, 어쩌면….’

나는 마지막 순간, 황제에게 세뇌당할 아빠를 떠올렸다.

“완전 거지꼴이네.”

그때, 창밖을 내다보던 오스카가 말했다.

“누가요?”

난 쪼르르 그의 옆으로 가 밖을 보았다.

“아아!”

모아르테 제도 정복 기념 축제.

그 완벽한 피날레는,

범죄자의 인과응보!

‘꼴좋구만!’

중년의 귀족이 맨발에 거지꼴로 제도를 순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젠킨스 백작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또 반사적으로 원작이 떠올라서, 나는 고개를 털어 생각을 떨쳐냈다.

끔찍함 그 자체였던 리코의 에피소드.

“에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리코가 최대한 잔인하게 보내버렸으면 좋겠다.

“웬 한숨. 불쌍하냐?”

“전혀요? 저 아저씨가 지금까지 한 나쁜 짓 생각하다가 나온 한숨이에요.”

“이야, 그게 다야? 아무 생각도 안 들어? 네가 저 인간 저렇게 만든 거잖아?”

“네. 그래서요?”

나는 뻔뻔히 턱을 세웠다.

젠킨스 백작은 죽어서도 모르겠지. 자기가 지금 저 꼴이 된 게, 바로 내가 사주한 일이었다는 걸.

곧 죽겠지만 하나도 안 불쌍했다.

“나쁜 짓 할 때는, 당연히 나중에 지옥 불에서 샤워할 생각도 해야 하는 법.”

* * *

<붉은 매>의 길드원, 리첼.

그녀는 오닉스 후작가의 첩자로, 어린 시절 학대당했던 체시어 리브르의 탈출을 도왔던 적이 있다.

리첼이 유독 체시어에게 측은함을 느꼈던 이유는, 그의 삶이 제 보스인 리코와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리코.”

“왜.”

리첼은 오랜만에 길드를 찾았다.

“입지가 어마어마해졌던데. 루빈슈타인 공작.”

<붉은 매>와 함께하는 귀족, 에녹 루빈슈타인은 강하고 정의로웠다.

그리고 <붉은 매>는 꽤 오랫동안 그를 도왔으니, 리첼은.

“젠킨스 백작 말인데, 공작에게 한번 부탁해 보지 그래?”

한 번쯤 사적인 부탁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무슨 부탁.”

“네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은 놈 아니야? 그놈은 계속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복수도 못 하면 억울해서 눈 어떻게 감을래?”

“…….”

“공작은 도와줄 수 있잖아.”

리코는 침묵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 살려 달라며 울부짖던 어머니의 절규를 떠올렸다.

하녀를 건드리는 귀족은 많다.

그러니까 리코의 사연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부탁해 봐. 지금 그 사람한테는 젠킨스 백작 정도 치워내는 건 일도 아니잖아.”

“백작이 죄라도 지었나?”

리코는 소파에 파묻히듯 누워, 피식 웃었다.

“내 여동생은 불구가 될 뻔했고 어머니는 임신한 채로 맞아 죽었어. 그 이후로도 종종, 백작의 집에서는 시체가 실려 나오지. 숨길 생각도 없어. 왜냐하면, 죄가 아니니까.”

“…….”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를 벌하지? 명분 없이 젠킨스 백작을 죽일 수가 있나?”

그렇다고 에녹에게, 몰래 백작을 죽여 달라고 부탁할 수 있겠는가?

에녹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는데?

“명분 같은 거 만들어 버리면 그만 아냐? 루빈슈타인 공작은 가능하잖아.”

“맞아. 네 말대로야. 만약에 내가 복수하고 싶다고 하면, 공작은 없는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백작을 잡아다 줄 사람이지만.”

리코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내 사적인 복수가 그 사람이 가는 길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되니까.”

“답답하네. 애초에 네가 이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뭔데?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싶어서였잖아?”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때 난 어렸으니까. 끝내 성공을 위해 내 복수심 정도는 버릴 수 있을 만큼 자랐지.”

리코가 일어나며 냉정하게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어린애처럼 공작에게 떼쓰고 싶지 않다. 너도 괜히 허튼짓하지 마라.”

“하, 너 진짜.”

그때였다.

“오빠, 오빠, 오빠!”

“리코, 있나?”

로브를 쓴 두 길드원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루빈슈타인 공작가의 하녀, 제티.

제도의 맥줏집 사장, 빌리.

둘의 본업은 각각 길드 <붉은 매>의 첩자, 그리고 행동대장이다.

“무슨 일이야?”

“지금 밖에 쇼 타임!”

제티가 로브를 걷으며 씩 웃었다.

* * *

리코는 눈을 의심했다.

항상 비싼 옷을 입고 비열하게 웃던 귀족은, 낡은 거적때기를 걸치고 한껏 부르튼 맨발로 군중 앞에 비참하게 서 있었다.

“박탈형이 뭐야?”

“비능력자로 만드는 거라던데?”

“쯧쯧.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폐하께서 그 정도로 노하셨담?”

리코는 멍하니, 주변에서 숙덕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박탈형(剝奪刑).

프리메라가 능력자의 코어를 도로 닫아 버리는 최고의 형벌.

코어를 열 때와 달리 닫을 때는 능력자의 능력치에 비례하는 생명력이 필요했다.

프리메라에게 부담이 되는 형벌이었기에 시행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리코도 실제로는 본 적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박탈형을 당한 귀족은 다름 아닌 젠킨스 백작.

그를 개처럼 끌며 제도 곳곳 순회하던 기사가, 둘둘 말린 칙서를 펼쳐 들었다.

이윽고 기사의 입에서는 백작의 죄가 낱낱이 울려 퍼졌다.

“이, 이런, 미친놈!”

“죽어라!”

“끔찍해!”

추악한 죄목에 분노한 군중들이, 백작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리코는 당황했다.

“뭐지? 백작의 죄목이 어떻게 황실 손에 들어갔지?”

기사에게 읽히고 있는 죄목들은 전부, <붉은 매>가 그동안 젠킨스 백작가에서 수집한 정보였다.

어디에도 유출된 적 없을.

아니, 없어야 했을.

“누구야.”

리코가 옆의 길드원들을 매섭게 돌아보았다.

리첼, 아니고.

빌리, 아니고.

“너야?”

제티가 멋쩍게 웃었다.

“미안, 오빠.”

“너, 미쳤어? 나한테 말도 없이 정보를 빼돌렸다고? 누구한테?”

“…우리 아가씨.”

리리스 루빈슈타인.

그 순간, 리코는 일전에 리리스가 찾아와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헤헤. 리코가 오랫동안 갖고 싶어 했던 거예요…….”

“……뭐 짐작 가는 거 없나~? 엄청 가지고 싶었을 텐데~?”

“솔직히 젠킨스 백작 정보를 달라 하시기에 좀 기대했거든. 아가씨가 오빠 사정 아는 것 같아서. 혹시 뭔가 도와주시려나 하고.”

제티가 소심히 덧붙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완벽한 선물일 줄은 생각도 못 했지 뭐야.”

“하.”

비능력자가 되면 자연히, 작위도 박탈당한다. 단숨에 이 탑의 최하위 진창으로 처박히는 것이다.

“아악! 그만 못 해?! 이 천한 것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네가 누군데! 이제 너도 우리랑 다를 바 없는 처지야!”

백작은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소리 질렀다.

“이, 이보시오! 호위가 자네뿐이오? 항구까지 가는 길에 혹시 칼이라도 맞으면 어쩌라고!”

공격적인 군중들의 태도에 겁을 먹었는지, 백작은 창백해진 얼굴로 기사에게 매달렸다.

“그것도 당신 운명이겠지!”

“이봐! 으아악!”

백작은 박탈형뿐 아니라 해외 추방 명령까지 받았다.

죄가 크니, 무사히 배를 타기 전에 누군가에게 죽더라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쯧쯧. 저렇게 되고도 살고 싶은가 보네.”

빌리가 혀를 찼다.

군중들은 전부 평민, 비능력자들인데도 백작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축복과도 같은 ‘능력’이 없으니까.

사자가 토끼를 쉽게 찢어 죽이듯.

토끼가 사자에게 덤빌 수 없듯.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간격은 그런 것이었다.

계급제가 없어져도, 마법을 쓰는 능력자는 계속 비능력자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리코는, 자신의 손으로 능력자인 백작을 찢어 죽이는 상상은 할 수가 없었다.

“잡아온다?”

빌리가 굵은 팔뚝을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그 옛날 언젠가, 어린이의 날 축제 때 에녹과 힘 대결을 하며 자랑했던 근육이 여전했다.

“리코?”

“하하, 하하하하….”

리코는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미안해, 아들…. 이런 세상에 너만 남겨두고 가서 미안해….”

어머니는 끝까지 안타까워했다.

두 남매를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을.

“다음 생에는 우리,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자….”

이제 그녀는 없지만, 리코는 보여 주고 싶었다.

더 이상 지옥이 아닌 곳에서, 끝내 평화로워진 나라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는 제 모습을.

‘그래서….’

그래서, 그것을 위해.

조금 더 큰 꿈을 위해.

결국 접어두겠노라 다짐했던 복수였는데.

복수심.

한없이 약했던 소년, 리코를.

지금의 거목으로 만든, 바로 그 감정.

비로소 자신의 손에 칼이 쥐여진 순간, 리코는 느꼈다.

그 감정이, 실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는 것을.

“잡아오는 거 맞지? 응?”

“…그래.”

리코는 멀리서, 싸늘한 시선으로 백작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십 년을 훌쩍 넘어 겨우 갚게 된 빚이었다.

‘아.’

문득, 리코는 급히 품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 보았다.

리리스가 남기고 갔던 쪽지.

리코는 한 번도 자신의 사연을 말한 적 없지만, 리리스는 다 알았을 것이다.

‘그랬구나.’

리코는 웃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이제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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