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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06화 (207/261)

206화

* * *

슈미트 공작가.

에녹은, 미려한 얼굴에 음울한 눈을 가진 사내, 앙드레 슈미트 공작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세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을 전장에서 모두 잃었다. 황제는 자식들의 희생을 치하하며 앙드레 슈미트에게 명예로운 은퇴를 명했다.

피 같은 자식들의 목숨과 맞바꾼 은퇴는, 과연 달가웠을까?

“공작 가문 중에 앙트라세와 리브르는 이미 동참하고 있고… 슈미트, 노바, 바그너 중의 하나는 필히 손에 넣으셔야 하는데….”

책사, 조제프는 걱정이 많았다.

포섭할 대상 모두가 제국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계급제의 수혜자.

오랫동안 굳어온 계급의 근간을 뒤흔들고자 하는 에녹의 계획에 쉬이 동참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간 공의 행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더 큰 뜻을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지요.”

그리 말하며, 앙드레 슈미트는 펜을 끼적였다. 피로 지장까지 새겨 넣은 서약서 한 장이 완성되었다.

“받으십시오.”

에녹은 잠시 멍해졌다.

[나의 형제, 에녹 루빈슈타인과 큰 뜻을 함께하고자 한 날을 기념하며.

제국력 1783년 9월.

앙드레 슈미트.]

이는, 증표였다.

기꺼이 반란에 동참한다는 약속은 물론, 이 판에 함께 발을 들였다는 명백한 ‘증거’로 작용할 것이다.

“포섭을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의 뜻을 내비쳐야 합니다만, 만에 하나 배신이라도 당한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 공들여 작업해야 합니다.”

조제프가 걱정하던 점.

배신.

그 여지를 아예 없애는 입장 표명이었다.

“이런 서약 정도는 남겨둬야 공도 마음을 놓으실 수 있겠지요.”

앙드레 슈미트는 작게 웃고 덧붙였다.

“두려운 것도 없는지 이리 과감하게 저를 찾아오실 줄은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라 큰 뜻을 품었겠구나, 싶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몰랐던 에녹이라면 결코 슈미트 공작 가문을 정공법으로 포섭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있지, 제라드 아빠는, 바로 도와준다고 할 거야. 어려워하지 않아도 돼.”

에녹에게는 리리스가 있었다.

“아빠보다 더 황제 폐하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오히려 아빠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꼬시려고 자꾸자꾸 만나고 오래오래 공들이고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런 최고 귀족 아저씨들이랑 자주 만나면, 괜히 황제 폐하의 의심만 살 거 아니야?”

딸의 도움은, 마치 답안지를 가지고서 문제를 푸는 것과도 같았다.

“고맙습니다, 슈미트 공.”

에녹은 앙드레 슈미트가 건네준 서약서를 품에 넣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앙드레 슈미트는 친절히 에녹을 배웅했다. 방을 나서자 복도 끝에서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다가왔다.

“공작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제 아버지와 꼭 닮은, 열다섯 살의 소년.

제라드 슈미트.

다가오는 아들을 깊어진 눈으로 바라보던 앙드레 슈미트가 말했다.

“내년에 기사 서임을 받을 생각에 들떠 있습니다. 얼른 소년병 생활이 끝났으면 하더군요. 나만 걱정이 많은 게지요.”

“실력이 좋습니다. 제가 가까이서 자주 들여다보고 잘 챙길 테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에녹의 말에, 앙드레 슈미트가 작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제게 딱 하나 남은 자식 녀석이라서요.”

“공작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아들에게 배웅을 마저 부탁하고, 앙드레 슈미트는 방으로 돌아갔다.

에녹은 제라드와 함께 공작저를 나섰다.

“곧 네 서임식이 있잖아. 아들 맡겨 놓고 걱정하실 텐데, 너 잘하고 있다고 말하러 왔다.”

칭찬하는 말에, 제라드가 얼굴을 붉혔다.

“공작님, 아니, 단장님. 서임 받고 나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에녹은 의지 만만한 어린 소년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며 말했다.

“열심히 안 해도 된다.”

“예?”

“그것보다는, 살아남아.”

“…….”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게 널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위로 있던 두 형의 죽음.

하나 남은 자식인 저를 애지중지하는 부모.

에녹의 말을 이해한 제라드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 * *

늦은 밤.

집에 돌아오자, 잠들어 있던 리리스가 비몽사몽 일어나 눈을 비비며 반겼다.

“아빠, 고생했어. 제라드 아부지도 이렇게 빨리 아빠 사업에 데려오고. 정말 최고야.”

“에이, 아빠가 뭔 고생을 해. 우리 공주 때문에 다 날로 먹고 있구만. 아빠는 답안지 보고 문제 푸는 기분이다.”

“아냐. 원래 그 문제도 다 아빠가 푼 거였다구.”

졸린 눈으로 꼬물꼬물 안겨 오는 딸을 끌어안으며 에녹이 웃었다.

“이제 아빠 사업 금방 성공하겠다, 그치….”

“그러게.”

“아빠아.”

“응.”

“있잖아,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무슨 말?”

“나 혼자 오래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구 했던 거.”

“아아, 응.”

“난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똑같이 살다가 똑같이 늙고 똑같이 죽을래.”

“…그래.”

“또 어차피 아빠 사업 성공하기 전까지는 나, 프리메라라는 거 꼭꼭 숨겨야 하니까… 친구들이랑 똑같이 자라야 하잖아….”

“…….”

“그니까 어차피 써야 하는 시간, 아빠 도와주는 데에 열심히 쓸게.”

에녹은 먹먹한 기분으로 딸애를 품에서 떼어내고 바라봤다.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해 줘. 난 아빠를 위해서 뭐든지 할 거야.”

리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아빠 품을 파고들었다.

“…그래. 고마워, 우리 딸.”

“…….”

졸렸는지 리리스는 금세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

에녹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 공주, 내 보물.”

작았던 아이는 고맙게도, 어느새 이렇게 자라 주었다.

울고 아파할 일 없이, 앞으로도 행복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는데.

“아빠가 지켜 줄게.”

에녹은 매일 속으로 하는 다짐을 입 밖에 꺼내 보았다.

딸아, 공주야.

“우리 공주의 내일은 행복할 거야.”

네가 이 세상에 와서, 아빠에게 행복이라는 걸 알려 줬으니까.

아빠도.

“모레는 더 행복할 거야. 그다음 날은 더, 그다음 날은 더, 더.”

에녹은 웃으며, 잠든 아이의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아빠가 꼭, 그렇게 만들어 줄게.”

그리고 기도했다.

이 세상의 긴 밤이 끝나고 무사히 아침이 올 때까지.

이 아이가, 행복하게만 해 달라고.

‘앞으로 너에게 찾아올 시련은, 다 내가 짊어질 수 있기를.’

그날, 달은 유독 밝게 빛났다.

사랑하는 딸을 위한 아버지의 기도가 닿은 것처럼.

* * *

이른 아침.

창 너머 따사로운 봄 햇살이 들이쳤다.

“으으.”

에녹은 부신 눈을 찡그리며 익숙하게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아.”

딸은 없다.

따로 잔 지 꽤 됐는데도 에녹은 아직, 혼자 깨는 아침에 적응 못 하고 있었다.

“침대 한번 더럽게 크구만.”

벌렁, 일어난 에녹이 까치집 얹힌 머리를 긁적였다.

3달 전.

일어나 보니, 피 묻은 침대 시트 옆에서 당황하던 리리스.

에녹은 아침부터 피를 토한 딸을 보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죽을병이라도 걸린 줄 알고 비명을 내지르며 집안사람들을 전부 소환했다.

“집사!!! 롬! 공주가 피를 토했어! 당장 주치의 불러! 제티! 쥰! 어디 있는 거야?!!!”

“아, 아빠! 그런 거 아니야! 이거 입에서 나온 피 아니야! 거, 거기 서! 사람들 부르지 마! 멈춰! 아빠아아아!”

딸의 절규를 무시해 버렸던 날을 회상하며, 에녹은 한숨을 푹 쉬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엥.”

자고 일어나 흐트러진 매무새를 대충 다듬는데, 창밖으로 대기 중인 마차가 보였다.

“공주 아직 안 갔나 보다!”

웬일이야. 일찍 마탑으로 출근하는 리리스인지라, 아침에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은데.

에녹은 입을 귀에 건 채 후다닥 딸의 방으로 달려갔다.

“우리 공주, 아직 안 갔나~?”

대뜸 문을 열려다, 멈칫.

딸은 이제 많이 자랐다. 아빠가 돼서 매너 없이 굴 순 없지.

똑똑.

“방에 있어, 공주?”

“응, 아빠. 잠깐만. 곧 나가.”

문 앞에서 기다리려니 함께 자고 일어나던 날들이 그립다.

피를 본 그날.

리리스는 아빠에게 앞으로 함께 자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에녹이 조금 눈치 있게 굴었다면,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으면 눈치 빠르게 굴 수 있었겠지……?

그날, 딸의 피를 보고 눈앞이 새하얘진 에녹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모두 불러모으자―

“대체 무슨 일인 게야?!!!”

“아가씨가 피를 토하셨다니요?!”

“여기, 주치의 왔습니다! 아가씨, 어디 계십니까!!!”

집안의 큰 어르신인 부친 노르딕부터 주치의, 말단 하녀들까지 리리스의 방으로 달려왔다.

“아빠, 진짜 미워! 내가 쉿 하라고 했잖아! 멈추라고 했잖아! 그런 거 아니라고!”

“미안해, 공주야. 정말 미안해. 아빠가 진짜 미안해. 몰랐던 게 아닌데, 진짜 아닌데… 아빠 공부 많이 했는데… 그런데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이 안 났어….”

그렇게 에녹은….

눈치 없이 딸의 첫 달거리를 동네방네 소문낸 죄목으로,

‘각방 사용’,

‘2주 동안 뽀뽀 금지’,

‘일주일 동안 스킨십 금지’를 명 받고야 만 것이었다.

뽀뽀와 스킨십의 금제는 풀렸으나 앞으로 방은 영원히 따로 쓰게 될 테지.

이윽고 문이 열리고, 딸이 나왔다.

“아빠, 일찍 일어났네?”

허리까지 오는 은발에 헤어밴드.

흰 블라우스와 무릎 언저리에서 하늘거리는 잿빛 치마.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차림이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흠, 뭐지?”

눈을 가늘게 뜬 에녹이 리리스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왜, 왜?”

딸은 예뻤다.

아주아주 예뻤다.

눈처럼 하얀 은발에 잡티 하나 없는 피부, 보석처럼 푸른 동공이 반짝 빛나는 눈.

언젠가부터 기사단 녀석들이 에녹에게 대신 전해달라 부탁한 연애편지만 일주일에 수십 통이 넘어가고….

살롱부터 아직 데뷔도 안 한 사교계까지 소문 자자한 미모는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화장했네?”

옅은 화장기를 예리하게 잡아챈 에녹이 턱을 쓰다듬으며 “흐음.” 하고 의심스러운 소리를 냈다.

“어, 어?”

리리스의 푸른 눈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공주, 공부하러 가는데 왜 이렇게 이쁘게 꾸몄지? 수상한데?”

“에이. 뭐가 수상해, 또? 이제 나도 다 컸는데 화장 좀 할 수 있지.”

“…….”

리리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에녹이, 이내 방긋 웃었다.

“그래! 이쁘다, 우리 딸!”

“엣헴.”

“자아, 그럼 가기 전에 뽀뽀….”

“응, 나중에!”

들이민 에녹의 입술을 곧바로 쭉 밀어낸 리리스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빠!”

“아니, 공주야! 치사하게 왜 그래? 뽀뽀 한 번이 그렇게 힘들어?”

리리스는 뒤도 안 돌아봤다.

입술을 댓 발 내민 에녹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너무하네….”

리리스 루빈슈타인, 14살.

어느새 딸은, 아빠의 뽀뽀를 거부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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