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 * *
마탑, 오스카의 집무실.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이며 공주풍 소파, 간이침대, 책상에 종류별로 꽂혀 있는 빗…….
분명 일하는 방인데, 언젠가부터 오스카는 이곳을 하나씩 내 맞춤형으로 꾸며줬다.
“후우.”
심호흡 한번 하고.
상상하며 능력을 쓰자,
10min/sec
“우와.”
곧바로 거울 안에 달라진 내가 비쳤다.
새빨간 입술 아래에 매혹적인 점.
입술만큼 붉은 머리칼이 탐스러운, 170cm 키의 늘씬한 미녀.
‘가슴 좀 더 키워 봐?’
미녀의 가슴이 조금 더 부풀었다. 대략 C컵에서 D컵 정도로?
“어머, 어머.”
난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슴 아래 손을 받쳐 보았다.
“……?”
그때, 거울 너머.
내 뒤로 오스카가 보였다.
“헉.”
놀라 돌아보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내 꼴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잽싸게 달려왔다.
“이게!”
내 머리를 쥐어박으려던 오스카의 손이, 닿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뭐야. 환각 계열이야?”
“네. 아예 겉모습을 바꾸는 것보다 환각으로 눈속임하는 게 가성비가 훨씬 좋더라구요?”
“얼마 드는데?”
“…초당 10분.”
순간 눈이 커진 오스카가 빽 소리쳤다.
“빨리 안 풀어?!!!”
마법을 풀자, 거울에는 다시 작달막한 키에 은발 머리를 한 내가 비쳤다.
물론, A컵이었다…….
“악!”
오스카는 기다렸다는 듯 내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왜 때려요!”
“허튼짓하니까 그렇지!”
“뭐가 허튼짓이에요? 스승님이 얼굴 바꾸라고 했으면서?”
“내가? 정말? 언제? 입술 벌겋게 칠하고 가슴 수박만 하게 키운 여자 행세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기왕 하는 건데 제 취향으로 할 거예요!”
“하아.”
지그시 눈을 감고 화를 삭인 오스카가 휙, 뒤돌았다.
난 그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방금 제 모습, 한 떨기 장미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름은 로잘린으로 하려구요. 성은 베르사체. 로잘린~ 베르사체~”
“지랄도 풍년이다.”
털썩, 의자에 앉은 오스카가 나를 노려봤다.
“간다고? 진짜로?”
“가야죠, 그럼. 레온 오빠 죽는 거 뻔히 아는데 놔둬요?”
대규모 마수 토벌전.
원작 2권에 나온 레온의 죽음이 한 달 뒤로 바짝 다가왔다.
오스카는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모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환각 마법 유지하는 데 초당 10분? 1분이면 10시간. 10분이면 4일 하고 4시간. 1시간이면 25일….”
“헉. 계산 빠른 거 봐.”
내 머리로는 빠르게 돌아가는 천재 마탑주의 계산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게 맞아? 하루 24시간만 그 꼴로 있어도 네 수명 1년 반이 넘게 사라져!”
“에이, 제가 바보예요? 계속 환각 유지하고 있을 건 아니에요. 레온 오빠 위험해졌을 때만 살짝 이 모습으로 도와주고, 바로 빠져나올게요.”
“…….”
“이이잉, 스승니임. 허락해 주셨잖아요오옹.”
“그냥 죽게 놔두면 안 되냐?”
“…진심이세요?”
“하아.”
오스카는 또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째려봤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 불러.”
“무슨 일 안 생겨요. 제가 <절대 실패하지 않는 레온 오빠 구출 계획> 보고서 10장으로 만들어서 제출했잖아요.”
“하, 요즘 왜 이렇게 말대꾸하지? 그냥 얌전히 대답하면 안 될까? 무슨 일 생기면, 부르라고, 말했다?”
“넵.”
“…….”
못마땅한 듯 나를 계속 노려보던 오스카의 표정이, 왠지 묘하게 바뀌었다.
“…왜요?”
“일로 와 봐. 얼굴. 가까이.”
손을 까딱거리는 오스카의 앞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내 입술을 살짝 문지른다.
입술에 발랐던 분홍색 립스틱이 그의 손에 묻어나왔다.
“화장했네?”
눈을 가늘게 뜬 오스카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할 수도 있죠…?”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
“…….”
오스카는 그 상태로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저도 이제 다 컸는걸요?!”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호다닥 고개를 돌렸다.
* * *
리브르 공작저.
레온 앙트라세는 직속상관, 마검사단장 체시어 리브르의 호출을 받고 그의 사저에 방문했다.
한 달 뒤 있을 대규모 마수 토벌 계획을 논하려 함이었다.
“휑하구먼.”
널찍한 테이블에 소파 두 개.
오랫동안 안 쓴 듯한 침대.
그게 전부인 방은 사람이 머무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1년 전. 황제로부터 따로 별궁을 하사받은 체시어인지라, 제 사저에 머무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 빨리 왔나?”
레온은 주인 없는 방의 소파에 털썩 앉아, 체시어를 떠올렸다.
형제처럼 자랐던 동생은 어느새 황제의 최측근으로 이 제국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올해로 19살.
머리가 큰 레온은, 이제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안다.
이를테면 삼촌, 에녹 루빈슈타인이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또 체시어가 그의 뜻을 이루는 데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같은 것들.
‘얼마 안 남았나.’
지금의 제도는,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였다.
머리 아픈 건 딱 질색인데.
“흐아아암, 졸리네.”
하품한 레온이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체시어를 기다리며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 * *
오랜만에 찾은 사저.
문을 열고, 체시어가 들어섰다.
“체시어어.”
그의 뒤에 따라 들어온 리리스가 문을 닫고 물었다.
“화났어?”
“…….”
“화났구나.”
“아니야.”
고개를 저은 체시어가, 멈칫하며 한숨을 쉬었다.
화났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대답하는 제 모습이 우스워서.
“화 풀어어….”
“아론 경. 마음에 들었어?”
묻자, 리리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미쳤어?”
“그럼 그건 왜 받았는데.”
체시어가 리리스의 손에 들린 장미 꽃다발을 턱짓했다.
“이, 이건….”
리리스가 꽃다발을 잽싸게 바닥에 내던졌다.
“그, 그러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며.”
사건의 발단은 두 시간 전.
오랜만에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라 젬, 롬과 함께 리리스를 데리러 간 체시어는.
“공녀님, 진심입니다. 제발 저의 마음을 받아 주세요.”
올해 기사 서임을 받은 열여섯 살의 성기사, 아론 경이 마탑까지 찾아와 무릎 꿇고 리리스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물론 고백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리리스를 맘에 둔 녀석들은 마검사단에도 한둘이 아니니까.
“…….”
체시어는 리리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리리스는 예뻤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너무너무 예뻤다.
시커먼 사내놈들이 에녹 무서운 줄도 모르고 치근댈 각오를 할 만큼.
“아론 경, 그럼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고민이 끝나면 먼저 연락할 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고백받은 건 안 놀라웠는데, 리리스의 대답은 놀라웠다.
그때부터 체시어는 계속 화가 나 있었다.
그의 분노는 정당했다.
왜냐고?
리리스는 당연히, 고백을 거절해야 했으니까.
“고민해 본다고 하면…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는 안 찾아오겠지.”
“…? 그냥 거절하면 되잖아. 왜 여지를 주는데?”
변명하는 리리스에게 체시어는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사실 벌써 세 번이나 거절했어. 오늘이 네 번째 고백이었단 말이야.”
“뭐?”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너한테 말하면? 네가 가서 나한테 고백하지 말라고 혼내 줄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 사이 의심하잖아. 또, 마검사단장이 그런 뒤치다꺼리까지 하고 다니게?”
체시어가 한숨을 터뜨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공작님한테는 말했어?”
“응. 두 번째로 고백받았을 때. 그때 아빠가 잘 말해서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그다음 날 또 왔어. 또 거절했고.”
“그 자식 미친 건가?”
답지 않게 흥분한 체시어를 보고 리리스가 흠칫했다.
“너무 끈질겨서 나도 방법이 없었는걸. 그래서 못 오게 하려고, 미리 생각해 둔 대답을 했지. 고민해 보겠다고 하면 당분간은 안 찾아올 것 같아서.”
“…….”
“하지만 그걸 네가 볼 줄은 몰랐어. 미안해.”
지그시 눈을 감고 화를 삭인 체시어가 몸을 돌렸다.
“알았어. 넌 이제 신경 쓰지 마. 그 자식한테는, 내가 잘 알아듣게 말할 테니까.”
“으응.”
리리스가 소심하게 체시어의 손을 잡아당겼다.
“화 풀어라.”
“…화 안 났어.”
“거짓말.”
“그래. 화는 났는데, 너한테는 안 났어.”
체시어는 왜 이렇게까지 열 받은 걸까?
“얼굴 보여 줘.”
“…….”
이 남자가 리리스에게 이긴 적은 한 번도 없다. 결국, 체시어는 얼굴 보여 달란 소리에 다시 돌아보았다.
“키가 너무 커.”
“…….”
팔랑팔랑, 키를 맞춰 달라는 듯 손짓하는 리리스.
체시어는 살짝 고개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리리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쪽.
체시어의 뺨을 붙잡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
“…….”
놀란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리리스는 뺨을 붉힌 채 흠흠, 헛기침했다.
“바, 반응 뭐야. 별론가…?”
엉거주춤 허리 숙인 모습 그대로 굳은 체시어에, 리리스는 민망해하며 물러섰다.
“나, 나 삼촌이랑 좀 놀다가 집에 간다!”
“리리스.”
체시어가 방을 나가려는 리리스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왜?”
잠시 망설이던 체시어가 조심히 리리스를 끌어안았다. 리리스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그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둘 중 누구의 것인지 헷갈렸다.
그렇게 한참,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떨어졌을 때.
“히힛.”
“…….”
체시어의 표정은 언제 화가 났냐는 듯 풀려 있었다.
“나 간다아.”
“…응.”
리리스가 떠나고, 닫힌 문.
체시어는 입꼬리가 간지러웠다.
여전히 쿵쿵 뛰는 가슴도.
“하아.”
한숨 한 번 쉬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손으로 가린 채 뒤도는데.
“……?”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에, 누군가가 있었다.
“와….”
“…….”
널찍한 테이블 너머, 가려져 있던 소파에서 방금 일어난 듯한.
“혀, 형….”
레온이었다.
표정을 보니, 모든 상황을 목격한 모양.
“너, 너희… 와, 너희….”
“형. 그게, 그게 그러니까….”
“…사귀어? 대체, 언제부터…?”
“…….”
한계까지 입을 뜨악 벌린 레온이 중얼거렸다.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이건….”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