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형, 혹시… 어디서부터 봤어?”
레온이, 황급히 제 곁으로 다가온 체시어를 멍하니 바라보며 리리스 흉내를 냈다.
“얼굴 보여 줘잉….”
“아.”
“…부터 봤다. 왜.”
다 봤네.
“못 본 거로 해 줄 수 있을까.”
“뭐? 이미 다 봤구만 뭘 못 본 거로 해?!”
레온이 무작정 체시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너, 이 자식….”
어엿한 아가씨가 됐지만, 여전히 레온의 눈에는 어린아이 같은 귀한 여동생, 리리스.
좀 자랐다고 시커먼 사내놈들이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것을 일일이 다 쳐내느라 요즘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있는가?
그런데?
결국 채 갔다?
그것도, 제일 친한 동생 녀석이?
이런 걸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하나?
“말 못 한 건 미안해, 형.”
흔들리는 체시어의 눈.
그걸 보며 레온은 혼란스러웠다.
“와, 진짜.”
물론, 언제고 리리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억지로 떼 놓을 맘은 없었다.
상대가 누가 됐든 성에 차진 않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하.”
고만고만한 녀석과 눈 맞은 여동생을 보며 속앓이하느니 체시어가 최고의 선택이긴 했다.
그래, 그건 맞는데….
“얼마나 됐어.”
체시어의 멱살 잡은 손을 힘없이 푼 레온이 물었다.
“…한 달.”
“한 다알?!”
무려 한 달 동안 몰랐다고?
아니, 그보다 요즘 토벌 준비로 한창 바쁜 와중에 대체 어떻게?
“잠깐! 한 달 전이면, 너 설마….”
레온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날…?”
* * *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황실, 마검사단 연무장.
곧 있을 토벌전을 대비해 능력자들은 밤낮없이 황실에서 훈련 중이었다.
“또 왜 왔어?”
“오빠 걱정돼서. 훈련하다 다치기라도 할까 봐. 어디 아픈 데는 없지? 괜찮지?”
레온은, 리리스가 요즘 들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탑에서 퇴근하면 칼같이 집에 가야 할 여동생은 왜인지 꼭 황실에 들렀다.
딱히 용건은 없었다.
“내가 왜 다쳐? 너 그만 좀 와, 그만 좀!”
그저 오라버니의 상태를 이리저리 확인하고 돌아갈 뿐.
“그만 오라니. 서운하게 왜 그래. 설마 나 귀찮아…?”
“그게 아니라!”
사실, 귀찮은 거 맞다.
정확히 말하자면 리리스가 귀찮은 게 아니라….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전 콰르토 마검사단 소속, 라이드 펠튼…… 어억!”
그래, 이런 상황이 귀찮다!
레온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이 옳다구나 달려드는 기사 한 놈의 뒷덜미를 기다렸다는 듯 잡아 내팽개쳤다.
“엄마야!”
과격한 행동에 리리스가 놀랐다.
레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보인 채 벌러덩 넘어진 그 앞에 태연하게 무릎을 굽혀 앉았다.
“라이드 펠튼. 미쳤냐.”
“부, 부단장님….”
“감히 절차를 무시해?”
레온은 라이드의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바스락, 만져지는 것이 있어 꺼내니 분홍색 편지 봉투.
“압수.”
레온은 가차 없이 그것을 제 품에 집어넣었다.
“안 됩니다! 돌려주십시오!”
“뭐가 안 돼, 뭐가. 기사도는 얻다 팔아먹었냐? 누가 레이디에게 이런 식으로 무섭게 달려들라고 했어? 편지 주고 싶으면 검수관들 거치라고 했지? 통과하면 어련히 알아서 줄까?”
리리스에게 연서를 전하려면 먼저 거쳐야 할 검수관들이 있었다.
사촌 오빠 레온.
아버지 에녹.
고모부 알렉세이.
“와, 이러다 우리 공주 마음 놓고 외출도 못 하겠어. 매형, 그리고 레온. 도움 좀 받읍시다.”
이는 리리스에게 몰아치는 고백 사태에 에녹이 내린 결단이었다.
“안 전해 주시잖습니까! 통과한 녀석들이 있기는 해요? 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건 아니고요?”
라이드의 절규에 레온이 뜨끔했다.
“그래! 전달된 건 없지만, 아무도 우리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을 뿐이야!”
갈수록 치솟던 여동생의 인기는 올해로 정점을 찍었다.
그럴 수밖에.
제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루빈슈타인 공작 가문의 금지옥엽!
눈부신 미모에 상냥한 성격!
거기에!
‘마탑만 안 들어갔어도 이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았겠지?’
그래, 미혼의 마탑주가 애지중지 아끼는 제자.
후계자가 없는 마탑의 차기 마탑주가 이미 리리스로 내정되었다는 공공연한 소문은, 그녀의 인기에 아주 쐐기를 박았다.
“그러지 말고 너랑 같은 콰르토 만나. 너 외동이라 가문 물려받아야 하잖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부모님은 저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아오, 씨.”
딱 하나 있는 흠이라면 리리스의 계급이 옥타바라는 사실이지만, 그도 문제 될 게 없었다.
마탑의 주인이 될 몸이신데?
그렇다면 비전투계급이라 오히려 좋아!
하여, 리리스가 이보다 어릴 땐 그나마 눈치라도 보던 고위 귀족 가문 가주들까지 그야말로 ‘개떼처럼’ 몰려들어 혼담을 넣는 요즘.
아버지 에녹은 그들을 상대하느라 날이 갈수록 핼쑥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때.
소란을 발견한 체시어가 다가왔다.
“뭐야. 웬일이야?”
레온은 놀랐다. 바쁘신 몸이라 얼굴 비치는 일이 거의 없는 단장님이 등장했으니까.
“큽.”
“……?”
그런데, 체시어의 눈치라도 볼 줄 알았던 라이드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만나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제 마음이 어떤지 전하, 끅, 전하고만 싶었을 뿐인데….”
“와.”
레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라이드 펠튼은 이번에 서임을 받은 열여섯 살의 어린 기사였다.
‘아니,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리리스 보는 앞에서? 저렇게 울다 고추라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저러지?
하지만, 질질 짜는 사내놈이 한심하게만 보이는 레온과 달리.
“라, 라이드 경!”
뜻밖의 눈물 공세가, 마음 여린 리리스에게는 어느 정도 먹힌 모양이었다.
“울지 마세요. 그리고 편지 써 주셔서 고마워요. 집에 가서, 꼭 읽어 볼게요.”
“…네? 정말요?”
“네. 오라버니, 편지 줘.”
리리스는 당황한 레온의 품에서 라이드의 편지를 빼 갔다.
“가, 감사합니다. 공녀님!”
“아니에요. 훈련 수고하시고, 몸조심하세요. 다치면 안 돼요?”
“아….”
상냥하게 걱정해 주는 천사에게 또 한 번 반해버리고야 만 소년.
체시어는 그 모든 광경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가, 돌아가는 리리스를 바래다주려고 함께 나섰다.
그게 그날 일의 전부였는데….
* * *
“리리스가 라이드 녀석 편지 받아갔던 날!”
레온의 말에, 체시어가 흠칫했다.
“그날 맞지?”
티를 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만약 체시어가 리리스에게 그렇고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그날 다른 사내놈의 연서를 친히 읽어 주겠다고 한 리리스 때문에, 분명 초조한 마음이 들었겠지?
“…맞아.”
레온의 추리는 다 맞았다.
“와!”
그러니까 아마, 리리스를 데려다주면서 모종의 상황이 발생했을 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체시어가….
“네가 고백했지?!”
빛보다 빠르게, 먹이를 노리는 매의 발톱보다 날카롭게!
“어, 그것도 맞아.”
리리스를 채간 것이 틀림없었다!
“이, 이, 이….”
삼촌, 그리고 아버지!
우리가 그렇게 철통 방어를 해 왔건만!
도둑놈이 집 안에 있었습니다!
“이 음흉한 자식아아아!!!”
레온이 절규했다.
* * *
대규모 마수 토벌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황궁, 알현실.
셀레나 루덴도르프는 황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이 새하얘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맞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혹시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걸까?
7년 전, 에녹 루빈슈타인을 배신했던 벌을?
“이봐, 셀레나.”
“…예, 폐하.”
“옛날에 우리가 뭘 주고받았는지 기억하나? 말해 봐.”
황제는 잔인하게도, 그날의 기억을 셀레나의 입으로 다시 말하게 했다.
“폐하께서 저와 제 아들의 병역을 면해주시는 대신… 제가, 제가 탈영병의 거취를….”
“아니야. 잘못 알고 있어.”
황제가 고개 저었다.
“그때 내가 받아야 했던 건, 에녹 경의 거취가 아니라 에녹, 그 자체였거든.”
그래, 맞다.
황제가 원한 건 에녹이 어디 숨어있느냐가 아니었다. 에녹을 찾아내 제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이었지.
“그런데 어떻게 됐지?”
셀레나는 눈을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뭐, 그래. 자네도 몰랐겠지. 딸이 옥타바일 줄은.”
셀레나는 딸인 리리스가 당연히 도스이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도스인 리리스가, 제 배로 낳은 딸이, 매일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군인이 되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제 팔아먹을 딸도 없는데.”
비수처럼 꽂혔던 마탑주의 말.
그건 오해였다. 셀레나는 제 딸을 전장에 밀어 넣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리리스는.
도스였어도 병역을 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왜냐면, 에녹이.
딱, 에녹 그 한 사람만 희생해 주면.
그가 제 신념을 버리고 황제의 뜻에 따라 검을 들어 준다면.
모두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도, 리리스도.
그리고 제 아들 카일까지도.
그래서, 탈영한 전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외면하고 선택한 거래였다.
“난 그 거래에서 얻은 게 없어. 딸애의 병역을 면해주면서 에녹과 협상을 해 보려 했는데, 전부 허사가 됐거든.”
단호한 황제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반면에 자네는 꽤 오랫동안 많은 것을 누려왔고 말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해 본들 황제는 뜻을 꺾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 마음 같아서는 그 배 속에 있는 애까지 끄집어내서 그간 내가 본 손해를 다 메꾸게 하고 싶은 심정이야.”
부푼 배를 감싼 셀레나의 팔이 벌벌 떨렸다. 황제는 쯧, 혀를 차고는 일어났다.
“자식 사랑 하나는 인정하지. 감히 내게 저 좋을 대로 약속을 지키라 요구하러 찾아온 꼴이라니.”
“폐하!”
셀레나가 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돌아선 황제의 발치에 주저 없이 무릎 꿇었다.
“아이가, 아이가 한 번도… 한 번도 경험이 없습니다. 이번… 이번 토벌만이라도, 이번만이라도…. 딱 한 번만… 제발, 딱 한 번만 선처해 주십시오….”
저항 없이 눈물이 흘렀다.
차라리 아들이 소년병으로 경험을 쌓은 능력자였다면 이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카일은.
제 생때같은 아들은.
출정 경험조차 없는, 열두 살의 어린아이였다.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소년병으로 일하도록 아이를 가르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딱 이번 한 번만….”
“…….”
“이번에는, 생각도 못 해서… 제가, 너무…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말?”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을 못 했어? 왜?”
엎드린 셀레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과감하게 에녹을 배신하고 나와 거래하러 왔을 때, 이미 예상했을 줄 알았는데.”
황제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누군가를 배신할 때는 말이야.”
그의 손이, 셀레나의 턱을 들어 올려 저와 눈을 맞추게 했다.
“언젠가….”
충격받은 셀레나의 동공 위로, 히죽 웃는 황제의 얼굴이 비쳤다.
“나도 배신당하겠다는 생각쯤은 하고 있었어야지.”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