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 * *
황궁, 알현실 복도.
황제를 뒤로하고 나온 셀레나의 눈앞은 여전히 하얬다. 비틀거리던 걸음이 얼마 못 가 멎었다.
“아, 아….”
내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무서운 상상에 극한의 공포가 목을 옥죄었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흐윽….”
벽을 잡고 무너진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 *
마탑, 오스카의 집무실.
난 책 읽는 오스카의 어깨에 등을 붙이고 앉아 펜을 끼적이고 있었다.
‘오후 반차… 신청의 건….’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가 볼 데가 있었다.
아빠가 있는 성기사단 연무장.
정확히는 지금 거기에서 훈련 중인 제라드를 보러 갈 생각이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번 토벌 때, 제라드 때문에 레온 오빠가 죽었단 말이죠?”
“제라드? 아아, 그 여자처럼 생긴 애?”
난 잘생긴 제라드를 떠올렸다.
그가 연보랏빛 머리칼을 사르르 흩날리며 눈웃음칠 때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들 자지러졌다.
“맞아요. 엄청난 미소년! 이번에 살롱 인기투표에서 체시어 제치고 1등 했어요.”
“네 취향이야?”
“아뇨? 걔가 잘생기긴 했지만 저는, 음….”
난 체시어를 떠올렸다.
“좀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이 취향이에요.”
“그렇군.”
“아무튼, 제라드랑 체시어는 진짜 사이가 나빴어요. 그래서 제라드가 체시어 말 안 듣고 괴물 싹 다 잡고 간다고 해서 그 사달이 났거든요?”
예상보다 훨씬 난전이었던 상황에 후퇴를 명령했던 체시어.
그러나 체시어와 앙숙이었던 제라드가 명령에 불복하고 무리하며 군을 움직이다가….
‘애꿎은 레온 오라버니만 죽지.’
…참사가 벌어진다.
“그런데!”
하지만, 이 데드 플래그는 7년 전에 진작 뽑아버렸다.
“지금 체시어랑 제라드는 사이가 엄청 좋아요.”
둘은 양성소 시절부터 친해져서 지금은 서로 생일선물도 주고받는 사이다.
“그럼 걱정할 거 없잖아?”
“그런데, 아시잖아요? 그날 레온 오빠는 어떻게든 위험해질걸요.”
테오도 그랬다.
마력 충돌이라는 병 때문에 죽을 걸 알아서 고쳐 놨더니, 마수 발톱에 배가 뻥 뚫려 오지 않았나!
원래 죽어야 했을 바로 그날에!
“제라드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난 끼적이던 반차 신청서에 마침표를 찍고 오스카에게 건넸다.
“오늘 제라드 만나서 요즘 어떻게 지내나 물어보고, 점심도 같이 먹고 하려구요. 이거, 결재해 주세요.”
심드렁하게 내 결재 서류를 받은 오스카가, 나를 빤히 보다 뜬금없이 물었다.
“너 연애하지?”
“……?”
난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그런 생각을…?”
“예뻐서.”
“네?”
“요즘 너무 예뻐져서.”
오스카는 그렇게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책장을 팔랑, 넘겼다.
“그, 그런가?”
화장이 제법 잘 먹히는 모양이군.
조금 뿌듯해졌다.
“누구야?”
“아니에요. 연애 안 해요.”
난 곧바로 받아쳤다.
오스카는… 오스카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한테 다 걸려도 오스카만은 안 된다. 체시어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제가 설마 스승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연애를 하겠어요?”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나는 능청을 떨었다.
“내 허락? 너 내 허락 받고 연애할 거야?”
“당연하죠!”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그럼 안 만나야죠?”
“오, 그래? 그럼 헤어져. 어차피 어떤 놈이든 마음에 안 들 테니까.”
“…….”
순간 난 말문을 잃었다.
오스카가 킬킬거렸다.
“장난이야, 장난. 사귀는 놈은 있나 보네.”
“아, 아니라니까요?”
나, 왜 이렇게 말려들지?
역시 머리 좋은 사람이랑은 오래 말 섞으면 안 된다.
“에휴.”
오스카는 한숨을 쉬더니, 다시 바로 앉아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뽀뽀는 결혼하고 나서 해라. 연애할 때는 손까지만 잡아.”
“…네?”
뽀뽀 이미 했는디?
순간 주춤하자 오스카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뭐야? 너 뭐 했어?”
“뭐, 뭐, 뭘 해요? 아니,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남자친구도 없는데 무슨 뽀뽀예요?”
“죽는다, 진짜?”
눈을 희번덕이며 뒤집은 오스카가 내 얼굴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연애 안, 안 한다니까요….”
“…….”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본 오스카가 휙, 몸을 틀었다.
나는 콩콩 뛰는 심장을 무시하며 소파 구석으로 내팽개쳐진 내 반차 신청서를 소심하게 집어 들었다.
“마탑주님….”
그리고 오스카에게 건네며 말했다.
“결재 좀….”
* * *
황궁, 성기사단 연무장.
훈련 중이던 기사들은 전부 어리둥절했다. 그중에는 제라드 슈미트도 있었다.
‘왜 저러지?’
운 듯 붉어진 눈. 위태로운 걸음으로 연무장을 찾아온 여자.
제라드는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셀레나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
또, 그녀가 루빈슈타인 공녀, 리리스의 친모라는 사실도 제라드를 비롯해 아는 이들은 다 알았다.
‘단장님을 보러 온 것 같은데….’
제라드는 생각하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는 재빨리 웅성거리는 기사들을 물렸다.
“다들 뭐 해? 훈련하러 가!”
그리고는 멀리서 둘을 지켜보았다.
에녹은 당황하고 있었다.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이가, 친히 자신을 찾아왔으니까.
“…당신은, 알고 있었어?”
셀레나는 왜인지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뭘 말이지?”
“내 아들, 이번에 출정하는 거.”
에녹이 미간을 찌푸렸다.
셀레나의 아들이라면….
황제의 암묵적인 허락하에 병역을 면제받은 아이였다.
‘그런데 왜?’
생각하던 에녹은, 이내 깨닫고는 한숨을 삼켰다. 황제의 변덕이야 놀랄 일도 아니었으니.
“몰랐다.”
에녹은 셀레나가 왜 자길 찾아왔는지도 짐작했다.
“한데 알았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 이번에 출정하지 않으니 아무런 권한도 없거든.”
“만족하니?”
“뭐?”
셀레나가 웃음을 흘렸다.
“7년 전에 당신을 넘겼던 벌. 지금 받는 것 같잖아. 만족하냐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당신 팔아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꼴, 보기 역겨웠잖아. 언제고 내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해 봤을 거 아냐?”
“이봐.”
에녹이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멀리서 둘을 힐끔대며 웅성거리는 기사들이 보였다.
“일단,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자리를 좀 옮기지. 보는 눈이….”
“대답해 봐. 이제 속이 시원해? 응? 만족해?”
셀레나가 미친 사람처럼 언성을 높였다. 에녹이 놀랐다.
“대체 왜 날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아니,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해 본 적도 없어.”
“널 팔아먹은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정말?”
“…그만.”
에녹의 시선이 부푼 셀레나의 배로 향했다. 위태로워 보였다.
“흥분하지 않는 게 좋겠어. 조금만 진정하고….”
“그런데, 애를 위해서 뭘 못 해? 네가 내 맘 제일 잘 알잖아.”
셀레나는 계속 웃었다. 웃는 얼굴과 달리 눈물 흘리는 모습이 기괴했다.
“하.”
에녹은 결국 한숨을 터뜨렸다.
셀레나가 왜 저에게 따지듯 소리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경험도 없을 어린 아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게 느껴질 출정 명령.
지금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게 없을 터다.
누구라도 붙잡고 탓하고 싶겠지.
“내가….”
셀레나가 다가왔다. 힘없이 떨리는 손이 에녹의 목깃을 붙잡았다.
“내가 너였으면….”
“…….”
“내가 너만큼 강했으면!”
셀레나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모른 척하던 주변의 시선이 다시 놀라 모여들었다.
“아이를 위해서 뭐든, 뭐든 했을 거야! 그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이든! 내 신념을 짓밟는 일이든!”
“진정해, 제발.”
에녹이 제 멱살을 틀어쥔 손목을 붙잡았다.
“흥분하지 마.”
“착한 척 그만해. 너도 나랑 똑같으니까.”
에녹이 멈칫했다.
묘해진 남자의 표정을 보며, 셀레나가 조롱하듯 덧붙였다.
“다시 여기 돌아오면서 각오했을 거 아냐? 애를 군인으로 키우기 싫어서 탈영까지 했던 사람이, 돌아오면 애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왜 왔겠어?”
“…….”
“애 대신 칼을 잡아주려고 온 거 맞잖아.”
에녹은 침묵했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그 옛날, 자신이 셀레나를 탓할 자격이 없다 여겼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 에녹 그 또한….
딸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한없이 이기적인 아버지였으므로.
“당신한텐 어렵지 않으니까.”
“…….”
“난, 하고 싶어도 못 해. 그런데 당신은, 해 줄 수 있는 게 있잖아.”
셀레나는 힘없이 흐느끼며 그 옛날 제 과오를 합리화했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랬던 거야. 당신한테는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래서… 그래서….”
“…….”
“좋겠다. 난 결국 아무것도 못 지켰는데. 너는… 네 딸도, 네 신념도 다 지켰잖아.”
네, 딸……?
에녹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리리스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
“아.”
……이었는데.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눈을 뜬 순간 에녹은, 셀레나의 뒤에 서 있는 딸을 발견했다.
“…리리스.”
“……?”
에녹의 중얼거림에 셀레나의 눈이 커졌다.
“공주야.”
놀란 에녹이 급히 딸을 향해 달려간 것과 셀레나가 벌벌 떨며 뒤를 돌아본 것은 동시였다.
“어, 어떻게 왔어? 연락도 없이. 그… 이건, 그러니까….”
“…….”
리리스의 시선은 셀레나에게 빤히 꽂혀 있었다. 원망하는 듯한 기색을 보니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아, 아니야….”
셀레나는 눈앞이 흐려진 채 중얼거렸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듣게 할 생각은, 정말, 정말 아니었는데….
“윽.”
순간, 후들거리는 걸음을 옮기려던 셀레나가 배를 잡고 무너졌다.
“하으….”
“이봐!”
놀란 에녹이 돌아보며 소리쳤고 리리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