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괜찮아? 정신 차려!”
쓰러진 셀레나에게 달려간 에녹이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게, 아니….”
배를 붙든 채,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셀레나는 리리스를 쳐다보았다.
“…….”
리리스는 멍하니,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급한 에녹의 목소리도, 뒤늦게 달려온 기사들의 소란도.
* * *
황실, 별궁.
황제가 친히 체시어에게 하사한 궁내 집무실로 제라드가 찾아온 것은 늦은 오후께였다.
“루덴도르프 후작 아들이 이번에 출정한다는 게 사실이야?”
놀란 제라드의 물음에 체시어는 멈칫했다.
아직 연락받은 내용은 없지만, 체시어는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어.”
“아, 정말이구나. 오늘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이 단장님 찾아왔거든.”
“뭐? 왜?”
“아들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아들이 출정하는데 왜 공작님을 찾냐고.”
어째선지 날이 선 체시어의 반응에 제라드가 눈을 껌뻑였다.
“뭐, 당연히… 단장님이 뭐라도 해 주실 수 있을 테니까? 부탁하려고 온 게 아닐까?”
“…….”
“…리리스 엄마잖아.”
덧붙이는 말에, 체시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라드는, 리리스가 친모와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것까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 부탁할 만한 사이 아니야.”
“그래?”
제라드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안 좋긴 했어. 후작 부인이 막 울고 소리치고 난리도 아니었거든. 그 상황에서 눈 안 뒤집힐 부모가 어디 있겠냐만….”
“눈이 뒤집혔는데 공작님을 왜 찾아? 부탁하려 했다기보다는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제라드는 낮게 가라앉은 체시어의 목소리가 의아했다. 어쩐지 셀레나에 대한 감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음. 두 분은 사이가 안 좋은가? 아무래도 사이에 리리스가 있으니까, 가벼운 연락 정도는 하고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 여자는 한 번도 리리스 찾아온 적 없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제라드는 놀랐다.
물론 셀레나가, 에녹이 탈영한 동안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리리스는 자기 딸이 아닌가?
“왜지?”
“이해하려고 하지 마. 나도 이해 안 되니까.”
“이런. 그러면….”
제라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오늘 리리스가 그렇게 충격받아 보인 것도 이해가 된다. 자기 보러 온 적도 없는 엄마가 갑자기 아빠 찾아와서 소리치고 있으니….”
“뭐?”
순간, 책상 앞에 서서 무심히 서류철을 뒤적이던 체시어가 매섭게 돌아보았다.
“리리스가 거기에 있었어?”
험악하리만치 구겨진 표정에 제라드가 흠칫했다.
“어어, 응. 아마 단장님 보러 온 것 같았는데… 우연히….”
“하.”
체시어가 이를 갈며 신경질적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가 봐야겠다.”
체시어가 겉옷을 챙겨 들었다.
똑똑.
“저, 체시어 경?”
그때, 문밖에서 보좌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이십니다.”
체시어와 제라드의 눈이 마주쳤다.
“지금 체시어 경을 꼭 뵙고 싶으시다고….”
체시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셀레나가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유는 뻔했다.
그래, 애초에 아들을 위해 무언가 부탁을 하려 했다면 에녹이 아니라 이번 토벌전의 사령관인 자신이어야 했으니까.
“와, 아니.”
놀라 입을 막은 제라드가 창밖을 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쓰러진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일어나자마자 찾아오셨네. 진짜 아들 때문에 걱정이 많기는 하신가 보다….”
제라드의 중얼거림에, 체시어가 쓱 눈썹을 세웠다.
“…쓰러져?”
“어. 너 혹시, 후작 부인 임신한 건 알고 있었어?”
“아니.”
“흥분하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어. 배를 막 잡고 아파하시는 게, 엄청 심각해 보였는데. 단장님이 의무실로 급히 옮기긴 하셨지만.”
“그래?”
체시어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렇게 심각했는데 애는 이상이 없나? 반나절 만에 일어나서 여길 찾아올 수 있을 정도라고?”
“그러게. 나도 신기하네. 아이는 멀쩡하다는 거 들었어.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말하던 제라드는, 어째선지 피식 웃는 체시어를 보고 멈칫했다.
“야, 너….”
체시어는 비웃듯이 계속 웃음을 흘리다, 돌연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왜 그래?”
심상찮은 분위기에 제라드가 긴장했다.
체시어는 들고 있던 겉옷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자리에 털썩 앉아 보좌관에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 * *
마탑, 오스카의 집무실.
창밖으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반차를 반납하고 돌아와 오늘 있었던 일을 오스카에게 다 털어놓았다.
그리고 지금은….
퇴근을 미뤄두고, 급하게 <절대 실패하지 않는 레온 오빠 구출 계획> 보고서를 수정 중이었다.
“그래서, 진짜 그 여자가 안 불쌍하셨어요?”
오스카의 물음에, 나는 열심히 펜을 끼적이다 멈칫했다.
“왜 똑같은 걸 자꾸 물어보세요? 진짜 아니라니까요?”
“에이, 쓰러지기까지 했다면서. 또 마음 약해진 거 아니야?”
“그 반대인데요. 전 엄마가….”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
“네. 후작 부인이 너무하다고 생각했어요. 불쌍한 건 우리 아빠죠.”
“그래?”
“네.”
말하다 보니 또 울컥해져서, 나는 괜히 펜을 꽉 쥐었다.
“있죠, 스승님. 엄마가 저를 황제 폐하에게 데려간 건, 없던 일이 됐잖아요?”
“…….”
“그래서 대체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욕하고 따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이번 생에서의 엄마는 내가 프리메라라는 사실을 모른다.
물론 알았으면 원작대로 난 황제 손에 넘겨졌을 테지만, 다행히 이제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니 엄마가 한 행동은….
탈영병을 고발한 것.
그뿐이었고, 그건 나와 아빠에게나 섭섭한 일이지― 지극히 합법적이라 딱히 누가 돌을 던질 일도 아니었다.
엄마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제도로 돌아와야 하기도 했고.
“그런데… 엄마가 무슨 마음으로 아빠를 고발했는지 직접 들으니까 너무 화가 나요. 이제 당당히 엄마 찾아가서 따질 수 있어요.”
멀리서 엄마를 발견한 순간 바로 능력을 썼기 때문에, 사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의 처음부터 들었다.
“엄마는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예상하고, 황제 폐하랑 거래했나 보더라구요.”
“…….”
“제가 당연히 도스일 테니까. 저 대신 아빠가 칼을 잡아줄 테니까.”
“…….”
“황제 폐하가 전쟁 나가라고 할 것도… 알고 있었고. 아빠가 그런 전쟁 싫어하는 것도 다 알았는데….”
나는 너무 억울하고 아빠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아빠만 눈 딱 감고 희생해 주길 바랐나 봐요.”
“야, 짜지 마.”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오스카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던졌다.
난 테이블 위로 날아온 손수건을 들고 코를 흥, 풀었다.
“엄마는 아빠한테 아무런 마음이 없었나…? 아빠는 죄 없는 사람들 죽이면서 슬프고 괴로워해도 괜찮은 거예요?”
“…….”
“아빠가 강하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다 아빠를 괴롭히고 이용하려고만 해요. 황제 폐하만 해도 지긋지긋했는데 엄마까지 아빠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너무 속상해요.”
“…….”
“아파서 쓰러진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오늘은 그냥 돌아왔지만… 아빠한테 뭐라고 한 거 그냥 두면 너무 억울하니까, 깨어나면 찾아가서 얼굴 보고 따질 거예요.”
“무섭네.”
오스카는 킬킬거리며 덧붙였다.
“그럼 그 여자는 밉다 치고, 그 여자 아들은? 너 팔아 몸 편히 지내다가 이제 군인 됐는데. 속이 시원하겠네?”
“그건 아니죠. 엄마랑 똑같은 말 하시네. 대체 왜 아빠랑 제가 속이 시원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요?”
“그럼? 마음이 불편해?”
“불편하죠, 당연히. 경험도 없는 어린애가 전쟁터에 간다는데. 걔가 아니라 누구라도 불편했을 거예요.”
난 마침 나온 내 이부동생, 카일 얘기에 다시 펜을 잡았다.
안 그래도, 카일이 이번에 출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레온 구출 계획>을 수정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남자친구한테 부탁해 보면 되나? 지금 황제 설득할 수 있는 건 그놈뿐이니까.”
체시어?
난 수정하고 있는 계획을 찬찬히 살피며 고개 저었다.
“아뇨. 저한테 다 생각이 있어요. 체시어가 대뜸 알지도 못하는 애 출정 빼 달라고 황제 폐하 설득하는 건 말도 안 되고….”
나는 말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오스카가 뭐라고 말했더라?
“……남자친구한테 부탁해 보면 되나?”
“스, 스, 스승님….”
낚였다.
진지한 분위기, 질질 짜고 있는 와중에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말 시켜서 낚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 진짜 치사하게….”
“푸하하하하!”
오스카는 배를 잡고 막 웃다가 싹 얼굴을 굳혔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살려 주세요…. 제발요….”
“뭐래. 내가 뭐, 그놈 죽이기라도 한대? 대체 왜 숨기는 거야?”
“…….”
난 오스카의 눈치를 보았다.
곧바로 질문 공세가 시작될 줄 알았는데….
왜인지 그는 그냥 잠깐 구시렁거리다가 책상 뒤로 돌아가더니 서랍을 열고 뭔가 꺼냈다.
가위……?
“애는 무사하고?”
“네?”
“그 여자 쓰러졌다며. 아이는 괜찮냐고.”
“아….”
“너 왜 아파서 쓰러졌다고만 하고 그 여자 임신한 건 쏙 빼고 말하냐? 나 전에 봤었는데. 그 여자, 애 가진 거.”
…엄마 배 속의 아기 상태를 묻는 거였구나.
“네, 네!”
난 순간 당황했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빨리 의무실로 데려가서 확인했어요. 아기는 무사한가 보더라구요. 그건, 음, 다행이죠.”
“…….”
가위를 들고 다가온 오스카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왜요?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음, 엄마가 미운 건 미운 거고… 아기는 아무 잘못 없는데…. 다행인 거 맞지 않, 나…?”
“그래. 그건 맞지.”
오스카는 의자를 끌어오더니 내 앞에 앉았다.
“애는 잘못 없지, 그래.”
“…….”
그가 내 앞머리에 가위를 들이밀었다.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사각, 사각.
머리카락 잘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쫄지 마. 그렇게 티 안 나니까. 그런데 앞머리는 좀.”
가위질을 마친 오스카가, 잘린 머리 한 줌을 들어 살피며 말했다.
“이 정도면 한, 3개월 썼냐? 배 속의 애 살리는 데.”
“…….”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피식 웃은 오스카가 내 뺨을 툭 건드리고는, 테이블 위로 가위를 던졌다.
“하.”
이내 의자를 돌려 몸을 튼 그가 피곤한 듯 고개를 젖혔다.
“정말이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 오스카가 괴롭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애 인생에 한 번도 도움 된 적이 없네, 그 여자는.”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