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 * *
체시어는 셀레나와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벌벌 떨고 있을 뿐이지, 예상대로 셀레나의 안색은 좋아 보였다. 배 속의 아이도 무사할 것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평생. 아무것도….’
매정하게 외면했던 딸이 오늘, 제 배 속의 아이를 살렸다는 걸.
이번엔 몇 년의 목숨을 썼을까.
나의 바보 같은 천사는.
자길 따뜻하게 안아 준 적도,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준 적도 없는….
엄마 같지도 않은 엄마를 위해서.
“부탁해요….”
질끈 감은 셀레나의 눈에서 뚝, 눈물이 떨어졌다.
체시어는 웃음이 났다.
지독한 모성애다.
아들의 출정을 막아 보려고 딱히 안면도 없는 자신을 찾아와 이렇게 울 수도 있는 여자라니.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경은, 경이라면… 폐하께 한 번 정도는… 선처를 구해봐 줄 수 있지 않나요….”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냉정한 목소리에 셀레나가 굳었다.
묘한… 적의.
아마 셀레나는 체시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있잖아, 체시어. 이거 아빠도 모르는 건데 너한테만 솔직히 말해 줄게.”
체시어는 셀레나가 싫었다.
그녀가 리리스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딸로 대해 주지 않아서―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지금은 없는 일이 됐지만, 사실, 나 엄마 손 잡고 황제 폐하한테 갔었다?”
혼자만 알고, 혼자만 속앓이하는 것이 괴로워서.
리리스가 체시어에게만 털어놓은 진실.
충격이었다. 결국, ‘실패했던 시간’ 속 모든 비극은 이 여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드님은 지금껏 특혜를 받아왔을 뿐이고, 폐하께서 이제는 미뤄 뒀던 의무를 다하길 원하시니 뜻대로 따르십시오.”
“아니에요.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번 전투는….”
이번 대규모 토벌은 손에 꼽을 만큼 위험한 전투였다.
경험자도 목숨을 걱정하는 전장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마수의 생김새도 잘 모를 열두 살 어린아이를 밀어 넣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
그래, 인간이라면 누구든 처연하게 우는 이 여자를 안쓰러워하겠지.
그런 마음이 전혀 안 든다면, 나는 인간성이 부족한 건가?
생각하며, 체시어는 픽 웃고 일어났다.
“아드님이 상당한 인재라고, 폐하께서 기대가 많으십니다. 좋은 군인이 될 겁니다.”
“체시어 경…!”
돌아 나가려던 체시어가 멈췄다.
망설임 없이 제 발치에 무릎을 꿇은 셀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부디 제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
“제발….”
“딸을 위해서도 이렇게 무릎을 꿇어 줄 수 있습니까?”
셀레나가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무심한 체시어의 얼굴이 보였다.
“당신이 이 지옥에 밀어 넣으려 했던 그 딸을 위해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냐고요.”
“…….”
셀레나는 체시어의 적의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 또한, 황제와의 거래를 탓하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지금껏 셀레나에게 눈총을 던졌듯이.
“그때 난, 그 애의, 아버지가….”
“지켜 줄 아버지가 있으니까? 당신처럼, 황제와 거래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
“루빈슈타인 공작이, 자기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럼 당신 딸은 군인이 되었을 텐데요.”
“에녹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공작을 얼마나 잘 안다고 그렇게 확신합니까?”
체시어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황제와 거래한 그 시점에, 이미 당신은 그 애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대신 칼을 잡아 주든, 말든.”
셀레나가 굳은 채로 숨을 삼켰다.
“당신이 왜 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지, 내가 맞혀 볼까요.”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 체시어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이 날카로웠다.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거겠지. 그날, 당신은 아들을 위해서 딸을 팔았으니까.”
“나, 난….”
“죄책감을 덜려고 자기 자신을 계속 세뇌해 왔겠죠. 내가 판 건 남편뿐이었다고. 딸은 아니었다고.”
체시어는 확신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프리메라인 딸을 제 손으로 황제에게 가져다 바친 여자.
프리메라는 황제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제물이었다. 탈영병의 거취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값진.
그렇기에 여자는, 이전의 생에서, 지금처럼 황제의 변덕에 아들의 생사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딸을 버렸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애 얼굴을 볼 때마다 자기가 했던 역겨운 선택이 떠올라서 괴로울 테니까.”
“…….”
“그래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셀레나는 충격으로 굳었다.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
애써 외면하고 합리화하려 했던 모든 진실이, 잔인하게도 이 남자의 입에서 전부 흘러나왔다.
“물론 당신이 무슨 선택을 했든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체시어는 피식 웃고 일어났다.
“나는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와서, 비열한 거래로 지금까지 특혜를 누린 능력자의 출정이 반가운 입장입니다.”
셀레나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일말의 연민도, 동정도 없는….
잔인하리만치 차가운, 붉은 눈동자.
황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군요.”
이내, 체시어가 절망에 빠진 셀레나를 두고 나서려던 순간.
“야, 체시어. 안에 있지? 너….”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연 누군가가 다급히 들어왔다.
레온이었다.
“…뭐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체시어의 앞에 무릎 꿇은 채 울고 있는 여자.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광경에, 레온은 묘한 눈을 했다.
* * *
제라드의 명령 불복종.
그로 인해 위험에 빠진 체시어를 구하며 대신 죽었던 레온.
하지만, 제라드가 명령에 불복할 확률을 제거한 지금 레온은 어떻게 죽을 위기에 처할까?
‘오늘 일이 있기 전까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지.’
변수가 하나도 안 보였다.
그 시점에 죽어서 없었던 테오는 귀신같이 이번 출정에서 빠졌다.
모든 것이 원작 그대로.
레온이 죽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상황.
‘그런데… 변수를 발견했어.’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엄마로부터 얻게 된 힌트였다.
카일 루덴도르프의 출정.
아마 이 변수가, 어떻게든 닥쳐올 운명의 그림자가 되겠지.
‘애를 이용하는 것 같아서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체시어에게 부탁하면 그의 출정은 막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카일이라는 변수가 사라지면 또 다른 변수가 생겨 레온을 죽음으로 내몰 테니까.
그렇다면 어렴풋이나마 레온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차라리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 카일을 남겨두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이제 문제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본다.
내 짐작대로 카일이 변수라면.
대체 레온이 어떤 식으로 그와 엮여 죽게 될지….
* * *
“빼 줘.”
힘없이 돌아간 셀레나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레온이 말했다.
“왜?”
“왜라니?”
레온이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보통의 토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위험한 전투에, 출정 경험도 없는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투입되다니.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야, 이게 이유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냐?”
7년 전, 칼도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비전투계급인 옥타바들까지 전부 동원되었던 성수 사태.
당시 사령관이었던 레온은, 후방에 있을 리리스가 걱정되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날의 기억은 레온에게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애가 병역 특례였다고? 그런데 이제 칼 잡아야 해? 그래, 다 좋아. 까라는데 까야지. 그런데, 이번 전투에 내보내는 건 진짜 아니야.”
“황명이야.”
“황명이면 뭐 어쩌라고! 너는 할 수 있잖아!”
레온이 소리쳤다.
“황제가 네 말은 다 들어주잖아! 지금 걔 빼 줄 수 있는 거 너밖에 없어. 그건 개나 소나, 굴러가는 돌멩이도 다 알아. 그래서 애 엄마도 너 찾아온 거고.”
“미안한데 그럴 생각 없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체시어가 몸을 일으켰다. 레온이 따라가 그의 앞을 막고 섰다.
“너 왜 이래?”
“형, 고지가 눈앞이야. 나는 여기 내 인생 전부를 걸었어.”
황제의 목숨을 거둘 날이 머지않았다. 체시어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반란에 사활을 걸었다.
“그간 황제의 신임을 얻으려고 개같이 굴렀지. 그런데,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이의 생사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서 도움 될 게 있나.”
“이번에 네가 손 한번 써 준다고 실패할 일이냐? 그렇게 허술하게 준비하지 않았잖아?”
“난, 아주 조금의 변수도 만들고 싶지 않아.”
카일이 셀레나의 아들이라서?
그녀가 출정한 아들을 기다리며 애끓길 바라서?
아니, 한낱 사감 때문에 일부러 어린아이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체시어는 카일이 아니라 그 누구였어도, 모른 척 황명을 따를 생각이었다.
그런 잔인함과 냉정함이야말로, 지금 황제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제 모습이었기에.
“대체 그게 뭐라고 너를 이렇게 만든 거냐?”
레온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제의 최측근으로 스며들기 위해 체시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다.
가끔은 왜 체시어가 이토록 절실한지 의아할 때도 있었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네가 지금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하지만 이번에는, 인간성마저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두고 보기가 괴로웠다.
“만약 그 애가 이번에 죽기라도 하면? 넌, 죄책감 안 느낄 수 있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냐?”
레온이 체시어의 멱살을 붙잡고 호소하듯 물었다.
‘죄책감?’
체시어는 카일의 얼굴을, 그리고 리리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말로, 고지가 눈앞이었다.
악마의 목을 잘라, 내 천사에게 바칠 날이.
그녀의 발에 달린 족쇄를 끊어 줄 수 있는 날이.
“응.”
체시어는 무심한 눈으로 레온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충격받은 레온의 앞에 바짝 다가서며 냉정하게 속삭였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