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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13화 (214/261)

213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냉정한 체시어의 대답에, 멍하니 허공을 배회하던 레온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너….”

체시어는 무감정한 눈으로 레온을 쳐다보다 이내 떠나갔다.

쾅.

맥없이 닫힌 문.

“하, 진짜….”

남겨진 레온이 허탈하게 웃었다.

* * *

난 오스카의 집무실 창문에 뺨을 바짝 붙이고 밖을 쳐다봤다.

‘아빠 대체 언제 오냐구….’

데리러 오겠다던 아빠는 여전히 감감무소식.

난 소심히 뒤를 돌아봤다.

오스카는 30분째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무섭다.

‘그래, 저 눈치 빠른 천재한테 뭔가 숨길 생각을 한 내가 바보지.’

아기를 살린 일을 알면 노발대발할까 봐 조용히 숨기고 넘어가려 했는데.

웬걸, 엄마가 임신 중인 사실을 오스카가 알고 있었을 줄은.

“스승님, 화 많이 났어요?”

“어.”

“에고…. 그게, 그게 있죠.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요.”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했다.

“아빠가 엄, 아니, 후작 부인을 안고 의무실로 달려가는 걸 뒤에서 보고 있는데… 어째 느낌이 싸하더라구요….”

“…….”

“아빠랑 막 다투고 있었는데 마침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일이 엄청 커지겠구나, 싶어서…. 그래서 팔찌를 딱 보니까….”

프리메라인 나의 심장 속 코어와 감응하는 마도구 팔찌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아기의 상태를 궁금해한 순간, 수명이 뜬다는 건― 내가 손을 쓰지 않으면 아기가 잘못된다는 뜻이었다.

“아기야 배 속에 있으니까, 조용히 능력 쓰면 아무도 모를 일이고… 음, 또… 그렇게 생명력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아서….”

“…….”

오스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말 없는 게 더 무서워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 고민은 했어요. 고민은 진짜 많이 했는데….”

사실은, 괜히 시간 끌다가 아기 상태가 더 악화하면 써야 할 수명만 늘어날 테니 오래 고민 안 했다.

하지만 난 오스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왜 네가 죄송해? 지금 쫄아 있는 네 모습이 더 짜증 나니까 사과하지 마.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

“지 아들 전쟁터 가는 걸 뭐 어쩌라고? 네 아빠한테 찾아가서 행패 부린 것도 어이없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내 피 같은……!”

오스카는 벌떡 일어나서 나를 향해 삿대질하다가 다시 털썩, 자리에 앉았다.

“흥분하지 마세요, 스승님.”

“그래. 흥분해 봤자 나만 손해지. 빨리 출산하셨으면 좋겠네. 그러면 다음에 만났을 때 머리채 잡고 흔들어 줘야지~~”

난 흠칫했다.

“그, 그건 너무 폭력적인데….”

오스카가 날 노려봤다.

“오해는 하지 마시구요! 스승님 이미지가 걱정되는 거예요! 그런 짓 했다간 스승님 이미지에 타격이…!”

“응, 어차피 더 깎일 이미지도 없어~~”

“아으, 정말!”

“참, 생각해 보니까 너한테 화난 것도 있다.”

“…네?”

“대체 왜 숨겨? 나한테?”

“아! 그건, 스승님이 알면 당연히 속상하실 테니까요.”

“아니, 그거 말고.”

“그럼요?”

“너 연애하는 거.”

“…….”

와, 이거.

산 넘어 산이네.

난 모른 척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빠는 무슨… 마차를 직접 만들어서 타고 오나…?”

“그래라, 그래.”

오스카가 한숨 쉬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소파로 자리를 옮겨 길게 드러눕더니 웬 노인네처럼 중얼거렸다.

“떼잉, 다 컸다고 이제 숨기는 것도 많고….”

“아닛!”

서운해하는 오스카의 목소리에 나는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아니에요, 스승님.”

결국 난 쪼르르 다가갔다.

팔을 베고 누운 채 불만스럽게 날 올려다보는 오스카.

“안 죽이실 거죠?”

“어.”

주어는 없지만, 오스카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고맙게도 체시어의 생존을 약속해 주었다.

두 사람이 누워도 널찍한 소파.

내가 올라가자 오스카는 팔을 내줬다. 나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서 큼, 목을 가다듬었다.

“헤헤, 그러니까 사귄 지는 한 달 됐는데요.”

“씨…….”

“…….”

오스카의 입은 다행히 육두문자를 완성하기 전 멈췄다.

“…계속 말해 보세요, 공주.”

화는 나도 내 연애사가 꼭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난 한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레온의 상태를 살피러 황실 연무장에 찾아갔다가, 라이드 경이라는 기사님에게 연애편지를 받은 날이었다.

* * *

체시어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라이드 경의 편지를 열었다.

무려 다섯 장이나 됐다.

‘에휴. 쓰느라 팔 빠졌겠다.’

레이디들의 연서를 읽지도 않고 벽난로에 던져 버리는 쌍둥이 오빠들이나 쌓아뒀다 쓰레기통으로 직행시키는 체시어와 달리….

난, 누군가 날 생각하면서 소중히 써 준 편지를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답은 못 해도, 적어도 읽어 주는 것이 예의 아닐까?

해서, 산더미처럼 쌓인 연애편지를 꾸역꾸역 읽느라 밤까지 새운 걸 들킨 뒤로는, 아빠가 손을 써 줬다. 아예 내 손에 들어오지 않도록.

‘그날부턴 좀 편했지.’

그 이후 오랜만에 읽는 편지였다.

[……연못에 비친 한 조각 달처럼, 하얗게 빛나는 한 떨기 물망초처럼. 언제나 반짝이고 계신, 루빈슈타인 공녀님께.

타오르는 열정과 애끓는 마음을 담아, 라이드 펠튼.]

난 당황해서 슬쩍 옆을 봤다.

무심히 팔짱을 낀 체시어의 눈이 편지에 닿아 있었다.

“그, 글을 엄청… 잘 쓰시네. 시인을 했어도 대성하셨겠다.”

난 황급히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다음에 언제 훈련하러 가? 너 많이 바쁘지?”

<절대 실패하지 않는 레온 오빠 구출 계획>을 위해 이번에 전쟁터에 직접 가는 나.

그 사실을 아는 건 셋뿐이었다.

오스카, 젬, 그리고 체시어.

이번 전투의 사령관인 체시어는 나를 위해 안전한 판을 짜 줬는데,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지 훈련까지 제안했다.

제국 전역에 있는 마수 출몰지에 빠삭한 그는 이동 마법(천재 마탑주 저著)으로 나를 몰래 데리고 다니며 마수의 생김새나 대처 방법에 대해 일일이 가르쳐 줬다.

그야말로 전장의 일타강사……!

“답장, 할 거야?”

“응?”

뜬금없는 질문이 돌아와서 잠시 멍했던 난, 곧 체시어가 라이드 경의 편지를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나, 이 기사님 얼굴 오늘 처음 봤는걸?”

“…그래.”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고백을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어?”

“…….”

무심한 질문에, 나는 체시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얘는….’

아주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 맘을 모르나?’

체시어에게는 연애 세포가 아예 없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을 리가.

“좋아하는 사람… 없어?”

“있어. 있으니까 지금까지 다른 남자 편지에 한 번도 답장 안 했겠지? 좀 오래 좋아했는데?”

난 곧바로 말했다. 체시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응.”

자, 누군지 물어봐.

아니, 솔직히 물어볼 필요도 없지.

나는 지금까지 티를 많이 냈다.

바보가 아니라면 체시어는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아야 했다.

훈련할 때마다 “아아, 힘들어. 나 좀 안아서 옮겨 줄래?” 하고 힘든 척 안기는 내 행동이 수작이라는 걸 정말 모를까?

내 손에 난 개미 눈곱만 한 상처에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안아 달라면? 안아 주고! 업어 달라면? 업어 주고!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체시어도, 내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자의식 과잉은 아닐 거라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너 좋아한다고 대답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데, 체시어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야, 이게 다야?’

난 당황하며 물었다.

“누군지 안 물어봐?”

“아니까.”

…그럼 그렇지. 모를 리가 없지.

“그런데, 고백 같은 거 하지 마.”

“응?”

“절대 받아줄 리 없으니까. 괜히 상처받을 일 없게, 고백하지 마.”

“…….”

와.

고백하기도 전에 차였다?

이런 걸 0고백 1차임이라고 하나?

난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반대편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왜, 왜…? 내가 뭐, 뭐가 마음에 안 들까…?”

뇌의 통제를 벗어난 입이 구질구질하게 질문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

네 살 차이가 뭐가 어때서?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고 했는데!

“그, 그만큼 차이 나는 연인들 많아….”

“공작님이 안 좋아하실 거야.”

아빠?

그래, 아빠와 체시어는 열심히 사업 중이다.

중요한 시기에 팔자 좋게 연애나 하자고 하면, 당연히 싫겠지.

“그런 이유라면… 음, 사업이 다 끝나고 나서는 사귀어도 될까…?”

“그게 사업이랑 무슨 상관이야. 나이 차이 너무 많이 난다고.”

“야!”

거절하고 싶으면 그냥 거절하지, 자꾸 나이를 들먹이는 체시어가 얄미워서 나는 돌아보며 소리쳤다.

“나, 전에 살았던 기억 다 갖고 있어서 생각보다 나이 많거든? 지금 스승님 나이보다 더 많았거든?”

내 항변에, 체시어는 대놓고 팍 인상을 썼다.

물론, 내가 전생에 몇 년을 살았든지 정신연령은 동기화되지 않기 때문에 의미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체시어는 모르니까!’

말하면서도 참, 구질구질하다….

“그렇게 좋아?”

포기 못 하는 내 모습에 질렸는지 체시어는 약간 화가 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 그래…. 좋아해….”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내 모습이 처량해서, 울컥 눈물이 났다.

난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하.”

피곤한 듯한 한숨 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더 서러워졌다.

‘안 돼, 리리스! 울지 마! 바보야! 왜 울어!’

하지만, 저항 없이 눈물이 뚝뚝.

솔직히 거절당할 줄 몰랐기에 충격이 컸다.

난 우리가 썸탄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훈련하느라 자주 붙어 다니면서는 더더욱.

‘이럴 거면 잘해 주지나 말지!’

드럽게 코는 왜 나와.

크응, 코를 훌쩍이는데 체시어가 쐐기를 박았다.

“진짜… 안 돼, 리리스. 좋아한다고도 말하지 마. 어차피 너 여자로 안 보니까.”

와.

얘는 날 상처 주기로 작정을 했나?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울지 말고.”

달래는 목소리가 다정해서 오히려 잔인했다. 눈물은 더 났다.

“지금부터라도 마음 정리해.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르, 아라따고오…….”

“가능성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전혀 없어. 너만 상처받아.”

“아, 읍, 알았으니까 그만! 그만 말, 하르… 으허엉.”

나쁜 놈.

“너… 이제 나, 나한테 잘해 주지 마라…. 안아 달란다고 안아 주고 그러지 말고… 막, 손잡고 그러지도 말고….”

난 치맛자락을 꾹 쥐고 서운한 맘을 계속 토했다.

진짜, 사람 헷갈리게나 하지 말지.

“괜히 오해하게 마, 흑, 만들지 마라…. 이 나쁜 놈아….”

“…? 리리스.”

체시어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날 부르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잠깐 나 좀 봐.”

“시, 시르…. 이거 놔.”

난 팔을 흔들어서 체시어를 떨쳐냈다. 그러자 체시어가 급히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덜커덩, 마차가 흔들렸다.

“제발. 나 좀 잠깐 봐 줘.”

“…….”

난 크으응, 코를 삼키고 입을 꾹 다문 채 흘깃 체시어를 내려다봤다.

그는 어째선지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미안…. 미안해.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손수 내 눈물을 닦아 준 체시어가 물었다.

“그런데 너 지금… 내 얘기 하고 있는 거 맞아?”

“…그럼 내가 누구 얘길 해?”

“아니, 아.”

체시어는 마차 의자에 양손을 짚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말했다.

“…난 지금까지 마탑주님 얘기를 하고 있었어.”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너….”

“…….”

“…혹시 바보야?”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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