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너….”
“…….”
“…혹시 바보야?”
여기서 오스카가 왜 나와…?
“바보 아니야.”
바로 받아치는 체시어는 어째선지 억울해 보였다.
“난, 마탑주님이 나한테….”
“스승님이 뭐?”
“…아니다. 됐어.”
무어라 말하려던 그는 입술을 물며 고개를 저었다.
‘오스카가 뭘 어쨌길래?’
다시 한번 물으려는데, 체시어가 일어나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엄마야! 가, 가깝다?’
좁은 마차 안에서 반쯤 허리 숙인 자세가 불편해 보였지만, 날 계속 마주 보려는 모양이었다.
“리리스.”
진지하게 빛나는 눈빛.
조여든 분위기.
“나, 네가 안아 달라고 해서 안아준 거 아니야.”
“으응?”
“사실 너 훈련할 때 하나도 안 힘든 거 알아. 넌 나랑 달리 마나로 능력 쓰는 거 아니잖아.”
뭐야! 안 힘든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알면서도, 힘들지 않냐고 계속… 일부러 물어봤던 거야. 너 안고 싶어서 그랬어. 불순한 의도였으니까 사과할게. 미안해.”
“…? 괘, 괜찮아…. 나도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햇살, 새 소리, 시냇물. 나랑 아내를 반반씩 꼭 닮은 아들이 빠빠, 빠빠 하는 그거.”
“……?”
“실은 그때, 너랑 가족이 되는 상상 했어.”
난 체시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나 어리둥절했다가 곧 깨달았다.
그 옛날, 체시어랑 우리 집에서 같이 살 때.
원작에 로맨스가 없었던 터라 덜컥 겁이 났었지.
주인공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수 없었던 난, 열심히 체시어의 연애 세포를 깨우기 위해 노력했었다.
“자, 눈을 감아! 상상해 보라구!”
“눈부신 햇살. 지저귀는 새 소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 네 품에 안긴 아들이 막 빠빠, 빠빠 하구…. 아내는 기분이 좋은지 꽃 냄새를 맡다가 너를 돌아봐.”
물론 그때는 모르고 말했다!
꽃 냄새 맡는 아내 역할이 내가 될 수도 있을 줄은!
“그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젠가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
“난 분명, 나중에, 언제가 됐든 널…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쿵쿵쿵쿵쿵.
나는 뛰쳐나올 듯 뛰는 심장을 가만 부여잡고 꼴깍, 침을 삼켰다.
“그래서야. 그래서, 공작님이 날 가문에 입적시켜 주겠다고 하셨을 때 거절한 거야. 너랑 남매가 될 수는 없으니까.”
“야아. 대체 너는….”
눈앞이 팽팽 돌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은 말을 들은 내 머리는 과부하가 와 버렸다.
“지, 진작 말하지. 왜 이런 걸 모아 놨다 한 번에 터뜨리는 거야…?”
평소에는 티도 안 내더니, 한번 터진 체시어는 꼭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 같았다…….
“미안해. 늦었지만 지금 말할게.”
체시어는 나를 가두듯, 조심스레 마차 등받이에 손을 붙이고 거리를 좁혀왔다.
“히익.”
순간, 더 가까워진 거리.
체시어의 눈에는 한껏 열이 올라 있었다.
“좋아해.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의미로.”
쿵쿵쿵쿵쿵.
‘미, 미쳤어!’
내 심장은 이제 자진모리장단으로 뛰기 시작했다.
“너도 말해 줘.”
“…….”
“…네가 좋아하는 게, 나야?”
난 미칠 듯이 뛰는 가슴을 꼬옥 부여잡았다.
“나, 나는….”
조금 전까지 잘만 말했으면서….
체시어가 갑자기 분위기 잡으니까 부끄러웠다.
“대답… 해 주라.”
숨이 섞일 만큼 좁혀진 거리.
꿰뚫을 듯 나를 쳐다보는 붉은 눈에, 형형하게 어린 열기.
“나나나는, 그, 그러니까….”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 *
“푸하하하학!!!”
오스카가 일어나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웃음 포인트?
당연히 체시어의 착각이겠지…….
“진짜 걔는 똑똑한데 이상한 데서 바보처럼 군다니까요?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하지?”
체시어가 바보처럼 내가 오스카를 좋아한다고 오해한 건, 아직도 이해 안 됐다.
“아까비~~”
아까비?
왜인지 얄밉게 히죽 웃는 오스카.
“난, 마탑주님이 나한테….”
순간 난, 그날 체시어가 하려다 만 말이 떠올랐다.
“저, 스승님. 혹시….”
“맞아. 몇 년 전부터 그놈 눈이 아주 음험하길래, 내가 만날 때마다 오해하게 일부러 한마디씩 던져 줬지. 지금까지 혼자 낑낑대면서 속이 다 썩었을 거다~~”
“와! 대체 왜 그런 짓을?”
오스카가 내 뺨을 쭉 잡아당겼다.
“으앙악!”
“야, 내가 그렇게 방어라도 안 했으면? 니네 진작 눈 맞아서 연애했을 거 아냐?”
“그에 므슨 억찌애어!(그게 무슨 억지예요!)”
“한가하게 그때부터 연애나 하고 자빠졌으면 사업이고 뭐고 다 말아먹지 않았을까?”
난 오스카가 놔준 뺨을 쓱쓱 쓸며 그를 노려봤다.
“완전 억지야! 스승님 미워!”
“어쭈?”
오스카가 착,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노려봤다.
“근데, 스승님.”
“뭐.”
“아빠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왜?”
“원래 스승님한테도 들킬 생각 전혀 없었다구요….”
“아니, 그러니까 왜!”
“좀 그렇잖아요. 스승님이 체시어 방어한 이유도 그렇고, 다들 열심히 사업 준비 중인데 한가하게 연애나 하고 있으면… 미안하니까. 눈치도 보이고….”
“…….”
“스승님? 네? 제발요.”
오스카는 한숨을 쉬더니 푹, 내 머리를 눌렀다.
“알았다.”
“와! 진짜죠? 약속? 약속?”
“그래, 약속.”
역시 스승님이 최고야!
“그래서, 그놈이 박력 있게 마차 등받이에 손을 턱, 얹고 널 가둔 다음에는 뭘 했는데? 계속 말해 봐.”
“…….”
다시 돌아온 본론.
난 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빠르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무심결에 내다본 창밖.
“오!”
드디어 아빠가 도착했는지 마차가 보였다.
나이스 타이밍, 제임스 브라운!
“아빠 왔다!”
난 벌떡 일어났다.
“…? 너 뭐야. 계속 말하라고! 이거 수상한데? 왜 말을 피하냐?”
“하, 한 번에 다 말하면 재미없으니까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해 드릴게요!”
난 나를 잡으려는 오스카의 팔을 쏙 피하고 달려 나갔다.
“야이씨! 너 일로 안 와!!!”
* * *
일이 끝나자마자 걱정하며 달려온 에녹은 당황했다.
“아빠! 오늘도 수고했어~!”
“으응, 공주야….”
만나자마자 제 허리에 안겨 뺨을 비비는 리리스.
딸의 기분은 예상과 달리 좋아 보였다. 셀레나와 자신의 대화를 듣고 충격받아 마탑에 쌩하니 돌아가 버린 걸 떠올려 보면….
당연히 기분이 엉망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스승님 오랜만에 보지? 인사하고 와! 나 먼저 가 있을게!”
“아, 응.”
뒤에 서 있던 오스카에게 인사한 리리스가 먼저 마차로 달려갔다.
아마도… 오스카가 아이를 달래 줬겠지. 에녹이 미안한 웃음과 함께 다가갔다.
“마탑주, 오랜만.”
“오랜만은 개뿔이. 양심도 없지. 여기가 무슨 보육원이에요? 애 맡겨 놓고 어디서 농땡이 피우다 와요? 해도 다 졌는데 한가롭게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꼴 좀 보라지?”
“와, 하나도 안 변했네. 이 독설 그리웠다고.”
에녹은 하루 새 해쓱해진 얼굴로 오스카의 어깨를 툭 쳤다.
“늦은 건 미안. 오늘 일 뒤처리하느라 하루 꼬박 보냈어.”
“웬 뒤처리? 그것도 변명이라고 해요? 아니, 지 혼자 나대다가 쓰러진 거 의원한테 보였으면 할 일 다 했지, 뒤지든 말든 신경 끄고 딸한테 먼저 달려왔어야죠?”
“어이쿠, 안 변한 게 아니라 공격성이 더 늘었구나? 그게, 생각보다 큰 일이라서. 그쪽 가주가 직접 와서 내가 상황 설명도 하고 뭐, 그래야 했어.”
오스카가 멈칫했다.
그쪽 가주라면….
그러니까, 셀레나의 남편인 루덴도르프 후작?
“어우, 씨.”
전 남편과 현 남편의 만남이라니.
이리 끔찍할 데가 있나.
상상한 오스카가 소름 돋은 팔을 쓸며 물었다.
“잡았어요?”
“응? 뭘?”
“가주가 돼서 집안사람 관리 못 하고 전방위로 민폐 끼친 벌은 받아야지. 이렇게 딱, 머리채 잡아서.”
오스카가 허공에 꽉, 주먹 쥐는 시늉을 했다.
“신나게 흔들어 준 다음에.”
흔들흔들,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오스카의 주먹.
“마무리로 바닥에 패대기까지.”
패대기치는 시늉까지 지켜보고 있던 에녹이 입을 떡 벌렸다.
“쳐 줬냐고요.”
“…사람이 진짜 과격해졌네. 혹시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아뇨. 난 원래 이렇게 화끈한 남자였는데? 하여튼, 그렇게 해 줬냐고요? 힘 뒀다 뭐에 써? 그런 데 써야지?”
“아니…. 안 그랬는데….”
오스카가 대번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들어 봐.”
흠칫한 에녹이 재빨리 말했다.
“찾아와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사과하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 하기도 민망했어.”
“이야, 성인 납셨네. 사람 죽여도 그렇게 사과하면 봐주나?”
“사람 죽인 건 아니잖아. 아무튼, 사정이 딱하긴 딱….”
오만상을 찌푸린 오스카를 보며 에녹이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을 정정했다.
“그래, 미안. 머리채 안 잡은 내 잘못인 것 같네.”
“그러니까 결론은 남의 일터에 와서 민폐 끼친 여자 뒤처리하느라 하루 내내 쓰고, 그 여자 남편이 찾아와서 사과하니까 곱게 보내 줬다 이 말이죠?”
“틀린 말은 아닌데 왠지 이렇게 들으니까 내가 되게 바보 같은걸?”
“바보 맞는데?”
“그렇다고 치자. 마음 약해진 건 맞으니까. 다 큰 사람이 애처럼 울더라고. 아들 대신에 자기가 출정할 방법은 없냐면서. 칼 한번 안 잡아 본 건 자기도 똑같으면서 말이야.”
“얼씨구, 지랄? 그런데 칼을 안 잡아보다니? 루덴도르프 후작이? 혹시… 병역 비리가 가문 특징?”
“응? 아니야. 비리가 아니고, 그… 에휴, 모르는 사람 없는 얘긴데. 역시 마탑주는 우리 공주 빼고 남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구나.”
한숨 쉰 에녹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후작은….”
“됐어요, 됐어.”
오스카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인간 이야기를 굳이 들을 필요 없지. 그보다.”
말이 잘린 에녹이 입을 쭉 내밀고 오스카를 흘겨보았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아주….”
에녹이 구시렁거리건 말건.
오스카는 마차 창밖으로 얼굴을 쏙 내민 리리스를 보고 있었다.
‘그 쬐만하던 애가 언제 저렇게 다 커서 연애도 하네.’
언젠가 이렇게 될 걸 짐작이야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날이 오니 오스카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애 사생활에 사사건건 참견해서 숨 막히게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빠도 아닌데 그럴 자격도 없다 생각하지만….
그래도.
연애를 시작한 자식이 어느 날 ‘저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 올게요.’라고 했을 때, 부모라면.
그 친구가 누군지!
정말 순수하게 잠만 자고 오는 것 맞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아이는 아직 성인도 아니었다. 약간의 통제는 필요하다는 게 오스카의 판단이었다.
‘마탑에는 오전 여덟 시 출근, 오후 여섯 시 반 퇴근. 심지어 일주일 중에 하루는 휴일.’
마탑에 머무는 외의 시간에 오스카는, 리리스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마탑주? 뭐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오스카는 에녹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안전한 귀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건, 역시 함께 사는 친아버지뿐.
하지만, 오스카는 리리스와 약속했다.
“아빠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와! 진짜죠? 약속? 약속?”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 줬잖아?
아이는 철석같이 믿고 있겠지.
그래.
약속, 했으니까……
“따님이 남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는 무슨!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