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헉. 그게 진짜야?”
에녹의 눈이 커졌다.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하고?”
“나한테도 말 안 하려고 했어요. 내가 집요하게 떠보다가 결국 애가 걸려들어서 실토한 거지. 당신은 애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해요.”
“아니, 아….”
당황하던 에녹이, 잠시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체시어?”
“뭐야. 알고 있었네?”
“와!”
에녹이 머리를 붙잡았다.
“알고 있었던 건 아냐. 다른 녀석들은 내가 철통 방어 중이거든. 가능성이 있다면 체시어뿐이겠지.”
“한 달 됐대요.”
“정말?!”
놀람의 연속이었다.
“공주가 요즘 들어 묘하게 바람 든 것처럼 보여서 설마 했는데.”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다. ‘혹시… 체시어?’ 까지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체시어 만났을 때 이것저것 떠보고 표정도 살펴봤거든. 그런데 낌새가 전혀! 전혀 없어서 결국 의심 접었었어.”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에녹은 새삼스레 체시어가 상당히 무서워졌다. 눈치 빠른 편이라 자부하는 제 의심까지 피하다니.
“내가 말했죠. 비위 좋게 지 친부한테 방긋방긋 웃으면서 친한 척할 때부터 그 자식 무서운 놈이라고 했잖아.”
“이야….”
“그러니까 황제 놈도 손쉽게 속여 넘겼죠. 그 의심 많은 황제가 고작 몇 년 만에 그 자식 물고 빨고 하는 거 보면 답 안 나오나? 응?”
“…….”
에녹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잘 들어요.”
오스카가 비장하게 말했다.
“애는 마탑에 여덟 시 출근, 여섯 시 반 퇴근. 일주일에 딱 하루만 휴일. 나는 그 외의 시간에 애를 잡아 두지 않습니다.”
“…….”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시간을 칼같이 지킬 거고, 마탑이나 내 집에서 애를 재운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 없어요. 만약 그래야 할 일이 생기면 무조건 당신에게 내가 직접, 연락하겠습니다.”
오스카가 에녹의 앞에 제 얼굴을 바짝 붙이며 덧붙였다.
“혹시라도 애가 내 핑계 대고 외박하는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 거짓말이라, 이거예요.”
“외박?”
순간, 에녹은 사색이 되었다가 애써 웃었다.
“에이, 설마. 체시어는… 체시어는 그런 애 아냐.”
“이봐요. 연애 안 해 봤어요?”
“……?”
에녹이 머리를 긁적였다.
“응, 안 해 봤어. 어째 애는 있는데 연애는 안 해 봤네.”
“으휴.”
“뭘 또 한심하다는 눈빛이야? 바쁘게 살다 보니 그런 건데. 그러는 마탑주는 해 봤어?”
어쩐지 민망해진 에녹이 항변했다.
“아뇨. 나도 안 해 봤어요.”
“거봐!”
“하지만 연애하는 남자가 얼마나 음흉해질 수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체시어 그 녀석을,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생각하세요.”
비장한 오스카의 표정에 에녹은 걱정했지만, 이내 떨쳐냈다.
‘설마.’
에녹은 체시어를 아주 오래 봐 왔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물론 첫 연애를 시작한 딸이 걱정되는 마음은 있었지만….
상대가 체시어라면!
오히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믿을 만했다.
‘우리 공주가 아직 얼마나 어린데 벌써 외박이라니. 말도 안 돼. 체시어도 그런 점은 다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은 안 해도….’
* * *
“아빠, 나 조만간 외박해.”
아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쩐지 외박 사유도 듣기 전에 놀란 표정이라, 나는 조금 의아했다.
“왜, 왜? 갑자기 외박이라니?”
난 곧 있을 토벌전에 따라간다.
최소 일주일 이상이 예정된 전투였고, 레온에게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24시간 대기는 필수.
‘레온을 살리러 가야 한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아빠가 이해는 해 주겠지만….’
내 출정 사실을, 아빠는 모른다.
혹시 아빠가 따라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일부러 말 안 했다.
원작에서 아빠가 없었던 전투.
그렇다면 아빠의 존재 자체만으로 변수가 되니까.
‘미안해. 난 아빠를 못 믿겠어.’
언젠가 웬 할아버지 분장까지 하고 내 뒤를 밟았던 전적이 있는 제임스 브라운 씨를,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뭔데? 왜? 언제? 어디서? 누구랑?”
“으음, 글쎄? 정확한 날짜는 아직 안 정해졌구….”
출정 날짜를 그대로 알려 주면 눈치 빠른 아빠를 속일 수 없겠지.
난 두루뭉술하게 둘러대면서 덧붙였다.
“요즘 마탑 친구들이랑 연구하는 마법식이 있어서. 그날 밤새워서 일할 거야. 마탑에는 스승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나를 믿고 맡기는 오스카를 들먹이면 문제없지!
“하하하하. 어쩜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고….”
하지만, 어째선지 아빠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응? 뭐라구? 뭔 예상?”
“안 돼.”
“응?”
“안 돼!”
아빠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나는 당황했다.
“왜 안 되는데…?”
“안 돼! 아무튼, 안 돼!”
“아니, 안 되는 이유를 말해 줘!”
아빠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끝내 이유를 말해 주지 않고 나를 휙 낚아채 안았다.
“으앙악!”
“절대 안 돼!!!”
* * *
대규모 마수 토벌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황실, 성법사단 연무장.
2주 전 성법사단 소속 소년병이 된 열두 살의 카일 루덴도르프는, 짧은 휴식 시간에 연무장 구석에 앉아 숨을 돌렸다.
“하아, 하아….”
멀리서 자신을 못마땅한 듯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쟤 양심은 있을까? 저렇게 강하면서 지금까지….”
“겁쟁이니까.”
입단하자마자 동료 소년병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만, 카일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어린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명예롭게 싸우고 있던 친구들은, 당연히 자신이 고까울 테니까.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해. 원래 해야 했던 거니까.’
카일의 아버지, 루덴도르프 후작은 콰르토 계급의 능력자였으나 군인은 아니었다.
루덴도르프는 직계의 마지막 후계자까지 전사함으로써 황실로부터 유공 훈장을 하사받은 가문.
아버지는 선조들이 흘린 고귀한 피로 병역을 면제받아, 가문의 대를 이은 방계의 핏줄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유공자 가문이라는 것은 대단히 명예롭다 들었다.
옛날에는 군인이셨던 어머니도 그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됐고, 카일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그래.
그런 줄 알았다.
지금까지는.
부모님도, 집안 사용인들도, 양성소의 선생님과 친구들도.
아무도 카일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너, 누나 만나 본 적 있어?”
“…누나?”
“뭐야? 얘 진짜 몰랐나 봐.”
“야, 단장님이 괜히 쓸데없는 말 하지 말랬잖아! 빨리 가자!”
“자, 잠깐만!”
난데없이 소년병의 신분이 되어 매일같이 훈련하러 오게 된 황실.
카일은 이곳에서, 비로소 몰랐던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모두가 자신을 힐끔거리며 숙덕거렸다.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지만, 그간 주워들은 말들은 있었다.
‘누나는 어떤 사람일까?’
눈 위로 흐른 땀을 훔쳐낸 카일은 제 누이의 얼굴을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저를 따돌리며 말을 피하는 분위기 탓에, 정확한 진실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누나가 나를 만나 줄까?’
짐작하기로, 자신이 지금까지 능력자로서 의무를 지지 않았던 이유가 누이 덕분이라는 것 같았다.
‘아마 날 엄청 미워하고 있겠지?’
카일은 누이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고, 꼭 사과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대체 왜….’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그래서일까?
그래서 아들 대신, 딸을 전쟁터에 보내 버린 걸까?
“알려 주세요, 어머니. 누나가 혹시, 저 대신 싸우고 있었어요?”
카일이 소년병이 된 뒤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는 어머니는, 진실을 알려 달라 해도 울기만 할 뿐이었다.
카일은 우는 어머니를 달래 드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솔직히, 너무 미웠으니까.
“왜요? 저 강한 거 아시잖아요!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왜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어쩌면 대답을 피하는 어머니의 반응은 곧, 짐작하는 사실들이 전부 진실이라는 뜻이겠지.
충격이었다.
어머니 때문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누이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을 것이다.
얼굴도 잘 모르는 누이가 여태껏 자길 대신해 생사의 경계에서 싸워오고 있었다면….
‘괜찮아. 괜찮아.’
카일은 미안함에 또 울컥,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열심히 해서, 지금이라도 자신이 무척 강하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 주자.
이번에 출정해서 큰 공을 세우는 거야.
그러고 나서….
아버지든 단장님이든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야지.
‘이제부터 누나 대신 내가 하면 돼. 내가 할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누나를 전쟁터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부탁해 보자.’
그러면, 지금까지 얼굴도 모르는 동생을 대신해서 고생하고 있었을 누나가….
분명 자신을 원망하면서 전쟁터에 나갔을 누나가….
어쩌면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까?
‘기대는… 하지 마. 누나가 날 계속 미워해도 어쩔 수 없어.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야.’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누이에게 빚을 졌다. 어렸지만, 몰랐다는 변명이 비겁하다는 것쯤은 카일도 알았다.
그렇기에, 누이가 자신을 반겨 주고 사랑해 주길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누이가 지고 있었던 짐을 도로 가져오는 것뿐.
그리고, 딱 한 번만.
얼굴을 보고 사과하고 싶었다.
“야! 너 뭐 해?! 언제까지 농땡이 피울 셈이야?”
동료 소년병 하나가 눈을 흘겼다.
10분도 채 못 쉬었지만, 카일은 눈물을 닦고 허둥거리며 일어났다.
아무것도 몰랐던 바보, 멍청이.
“응, 미안해! 지금 가!”
그런 저에게는, 숨을 돌리는 시간조차 사치였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