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 * *
토벌전을 일주일 앞둔 날.
리브르 공작저.
난 악시온과 카드 뒤집기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삼촌 먼저 하세요.”
“그래.”
악시온은 한가롭게 턱을 괴고 빠른 속도로 같은 모양의 카드 한 쌍씩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우, 우쒸… 빠르다….’
그러다, 멈칫.
한 장을 더 뒤집으려던 그의 손이 일부러 틀린 카드를 골랐다.
“아, 틀렸네.”
“이이익! 봐주지 마세요!”
어쩜 이렇게 봐줄 때 티가 팍팍 나는 것까지 체시어를 닮았지?
둘이 정말 피 안 섞인 게 맞나….
어쨌든 난 겨우 돌아온 내 차례에 열심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리스.”
“넹. 말 시켜서 절 헷갈리게 하시려는 거면, 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실력이라고 말씀드릴게요.”
체시어랑 카드 뒤집기 한 짬이 몇 년인데.
“너 요즘 우리 집에 왜 이렇게 자주 오냐? 마탑 쉬는 날마다 오네.”
“…네?”
난 멈칫, 굳었다.
슬쩍 눈만 들어보니 악시온이 히죽 웃고 있었다.
뭐야, 표정 왜 저래.
“왜, 왜요? 오면 안 돼요? 제가 삼촌이랑 친한 거 모르는 사람도 없고…. 으음, 혹시 체시어 때문인가?”
난 애써 태연한 척 카드를 계속 뒤집으며 덧붙였다.
“그것도 굳이 걱정하실 필요가…? 체시어는 집에 잘 안 오잖아요. 또, 체시어랑 저랑 남매처럼 지내는 거 황제 폐하도 알구요? 밖에서는 거의 안 만나니까 굳이, 그, 사업 걱정은 안 하셔도….”
“사업 걱정하는 거 아닌데?”
“그럼요?”
“체시어 녀석도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너 쉬는 날마다 집에 들른단 말이지?”
“…….”
“우연인가….”
“오늘 체시어 집에 오나 봐요?”
“응.”
“오, 그렇구나! 이런 우연이?”
난 모른 척 카드를 뒤집었다.
힐끔, 또 눈을 드니 악시온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와, 이거….’
난 침을 꼴깍 삼켰다.
‘사귀는 거 동네방네 다 들키는 거 아냐…?’
* * *
리브르 공작저는 남들 눈을 피해 체시어와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왔어?”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체시어가 들어왔다. 나는 호다닥 달려갔다.
“응.”
슬쩍 웃은 체시어가 나를 끌어안았다. 난 긴장하며 그의 뒤로 굳게 닫힌 문을 힐끔거렸다.
“삼촌은?”
“아버지? 아버지, 뭐… 인사하고 왔지.”
“큰일 났어. 아무래도 삼촌이 우리 사이 의심하는 것 같아.”
“아버지가?”
“응. 벌써 몇 주째 이렇게 만나고 있으니까 슬슬 의심할 만도 해. 우리, 출정 전날에 또 보기로 했던 거 취소하자.”
체시어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알면 뭐 어때.”
“안 돼. 우리 왜 비밀연애 하기로 했는지 잊었어? 다들 열심히 사업 준비하는데 이 와중에 연애하는 거 눈치 보인단 말이야.”
“…….”
체시어는 못마땅한 듯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대신 오늘 저녁까지 먹고 갈게!”
“그래.”
우린 소파에 가서 앉았다. 꽤나 피곤한지, 고개를 뒤로 젖히는 체시어의 눈 밑이 그늘져 있었다.
“요즘 힘들지? 잠도 못 자고.”
“괜찮아.”
“저녁 먹기 전에 잠깐 눈 좀 붙여.”
난 무릎을 팡팡 두드렸다.
머뭇거리던 체시어가 조심히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눈이 마주쳤다.
“잠은 안 잘 거야.”
“글쎄? 잠이 솔솔 올걸?”
난 체시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줬다. 그는 피식 웃으며 내 다른 쪽 손을 잡았다.
“맞다, 리리스. 공작님은 어떻게 됐어?”
“아!”
체시어의 질문에, 나는 씩 웃으며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성공! 스승님한테 부탁했지.”
바득바득 외박을 말리는 아빠가 너무 완강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오스카에게 S.O.S를 쳤다.
그가 조만간 마탑에서 날 재운다 했더니, 아빠는 언제 말렸냐는 듯 바로 내 외박을 승낙해 주더라.
“휴. 하마터면 전쟁터 못 갈 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왜인지 체시어의 표정이 묘했다.
“미안해, 리리스.”
“응? 뭐가?”
“너까지 위험하게 만들어서.”
“아? 아니야. 난 괜찮아.”
달래도 체시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에휴.’
사실, 아주 당연하게도, 체시어는 처음에 내가 전쟁터에 가겠다고 하자 반대했다.
“신이 운명을 안배해 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공작님 사업 때문에, 죄 없는 많은 사람이 죽을 운명이 되어버린 것도 알겠고.”
“그런데, 쌍둥이 형들은 아니야. 형들의 죽음은 사업과 아무런 관련 없으니까. 전에 테오 형이 죽을 뻔했던 건, 운명이 아니라 우연이야.”
레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직접 가야 한다고 하니, 길길이 날뛰었었지.
“그러니까 레온 형도 원래대로 죽을 거라는 네 예상은 기우야. 거긴 너무 위험해. 절대 안 돼.”
완강한 체시어의 태도에 나는 별수 없이 진실을 알려야 했다.
쌍둥이가 죽을 운명으로 정해진 이유는, 반란을 수월하게 이끌려는 안배가 아닌….
‘주인공이 기꺼이 반란에 목숨 바칠 수 있게 하기 위한 동기 부여제였지.’
…체시어, 너를 각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네가 너무 걱정돼.”
내 손을 잡은 체시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이, 걱정하지 마. 우리 열심히 훈련도 하고, 준비도 많이 했잖아.”
진실을 들은 체시어는 충격받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자신 때문에 죽는 레온.
그런데, 내가 직접 전쟁터에 가지 않으면 레온을 살릴 수 없는 상황.
“미안해.”
“…….”
결국, 내가 따라가는 걸 허락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지.
또, 허락한 지금도 얼마나 걱정에 시달리고 있을지.
“난 정말 괜찮아, 체시어. 우리는 무사히 해낼 수 있을 거야.”
괴로워하는 그의 마음이 다 이해되어서 마음이 아팠다.
“나랑 한 약속, 잊지 않았지.”
체시어는 잡고 있던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만약 레온 형을 살리지 못하게 되더라도….”
날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
“…네가 위험해지는 순간이 오면, 도망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체시어의 눈빛은 나를 향한 걱정, 그리고 레온을 향한 자책에 젖어 있었다.
“응, 그럴게.”
안심시켜 주려고 웃는 나를 보고 씁쓸히 마주 웃은 체시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너는 꼭, 살아남아 줘.”
* * *
대규모 마수 토벌전, 그 당일.
남부, 아르탈 대평야의 핵심 토벌 구역인 제1 격전지.
난전이 예상되는 사지인 만큼, 이곳 제1 격전지에는 사령관인 체시어를 포함해 출중한 능력자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글렙터(*짧은 팔, 강한 뒷다리를 가진 육식형 마수)의 서식지에 불을 지르고 대기하며, 체시어는 멀리 보이는 레온을 힐끗 살폈다.
‘형은… 어떻게 위험해지게 될까.’
체시어는 레온과 한 달 동안이나 냉전 상태였다.
카일 루덴도르프의 출정을 두고 의견이 달라 다툰 날 이후.
마음이 상했는지 레온이 제게 말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 레온 경?”
그때.
다시 불타는 숲을 감시하고 있던 체시어의 귀에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급히 돌아보니, 레온이 말에 올라 있었다. 잠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형!!!”
말릴 새도 없었다. 고삐를 쥐고 말 머리를 뒤로 돌린 레온이 박차를 가했다.
“사령관님! 레, 레온 경이 갑자기 왜….”
갑작스러운 레온의 전선 이탈에 우왕좌왕하는 동료 능력자들.
“아.”
금세 작아진 레온의 뒷모습을 보며, 체시어의 숨은 거칠어졌다.
운명…….
“너는 우선 오빠를 지키면서 싸워 줘. 그런데, 오빠가 혹시라도….”
리리스가 말했던 그 운명은 실로, 무서우리만치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전선을 이탈하려고 하면, 절대 말리지 마. 그냥 보내.”
“사령관님! 레온 경이 제5 격전지 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제5 격전지.
퇴로에서 마수의 잔당을 처리하는 구역으로, 소년병들과―
“내 예상이 맞으면, 레온 오빠는 분명히 내가 있는 곳으로 올 거야.”
―리리스가 있는 곳이었다.
“사령관님! 어, 어떻게 해야….”
“가게 둬.”
침착해야 한다. 체시어는 고개를 크게 흔들어 희뿌예진 시야를 털어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조개껍데기 모양의 장식품 두 개를 꺼냈다.
오스카가 만든 마도구.
일전에 테오를 살리기 위해 리리스를 부를 때도 써 본 적이 있었다.
“만약 레온 오빠가 네 옆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면, 전에 테오 오빠 살렸을 때처럼 사람들 눈 피해서 나를 불러 줘. 하얀색 깨면 돼.”
“그런데 만약 오빠가 전선을 이탈하면, 그때는 파란색을 깨서 나한테 알려 주라.”
리리스의 당부를 떠올린 체시어가 파란색 마도구를 부쉈다.
동시에, 지척에서 굉음이 들렸다.
쿵, 쿵, 쿵, 쿵.
육중한 발소리.
불타는 서식지에서, 크고 흉포한 생김새의 마수들이 달려 나오고 있었다.
‘리리스….’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운명.
그 운명의 꼬리를 매달고, 지금 리리스가 있는 곳으로 간 레온.
제5 격전지는 안전한 곳이다.
하지만, 레온이 그곳으로 간 순간 어떻게든 위험해지고 말겠지.
어떻게?
어떤 식으로?
리리스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 공포가, 체시어의 머릿속을 좀먹고 평정심을 뒤흔들었다.
‘정신 차려.’
체시어는 검을 뽑았다.
쉬이이익―
가까워지는 마수 무리를 향해 한 줄기의 새카만 검기가 날아갔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절대!!!”
리리스가 위험해질 만한, 아주 작은 변수도 만들지 않는 것.
“단 한 놈도, 뒤쪽으로 살려서 보내지 마라!!!”
설사 제 숨이 다하여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