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 * *
전장에 모인 수많은 능력자들.
나는, 그 사이에서 복면과 로브 차림으로 철저하게 얼굴을 감추고 젬의 용병단 틈에 섞여 있었다.
‘어디 한번 와 보시지! 우리 레온 오빠를 죽일 운명아!’
전쟁터 한복판이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장장 몇 달을 준비했는데?
닥쳐올 64가지의 예상되는 상황과 혹시라도 생길 128가지의 변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1024번이나 돌려 본 나다.
‘어디 한번 볼까?’
이곳은 핵심 토벌 구역인 대평야!
…가 아니라, 그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협곡 지역.
체시어와 레온이 있을 평야 쪽은 사지(死地)고, 여긴 매우 한가롭다.
“와, 체시어 이 자식. 너 있다고 이쪽에 쓸데없이 병력 충원한 거 봐라?”
젬이 주둔한 능력자들의 머릿수를 세어 보며 혀를 찼다.
“야, 리리….”
“스읍!”
“…가 아니라, 로잘린 양. 솔직히 여기서 죽을 일은, 아니, 다칠 일도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응, 알겠어.”
오늘 나의 위장 신분은, 용병단 <리리스의 들개들> 소속의 ‘로잘린 베르사체’ 양.
이름과 신분 외에 세세한 설정도 더 짜 두었으나, 그걸 써먹을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주목해 주십시오!”
그때 지휘관이 소리쳤다.
“저는 이곳 제5 격전지 지휘관, 셉티마 성권사단장 알프레도 버빈입니다. 숙지해 주실 사항 몇 가지를 알리겠습니다.”
뭐? 누구?
‘저 사람이 바로 젬의 썸남?’
난 ‘알프레도 버빈’이라는 이름에 한 번 놀랐고.
‘여자였어?’
그의 생김새에 한 번 더 놀랐다.
청초하게 한쪽 어깨로 묶어 내린 상앗빛 장발. 새하얀 피부와 쌍꺼풀진 큰 눈.
예뻤다. 너무너무.
젬이 어리둥절한 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남자야.”
“진짜?”
난 평생 성별을 오해당하며 살아왔을 듯한 둘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의외로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랄까….
“이곳에서는 앞쪽에서 후퇴하는 마수의 잔당을 제거하고, 선봉 격전지에서 토벌 완료 신호를 보내오면 그 즉시 새끼를 토벌…….”
알프레도 경의 당부를 열심히 듣고 있는데, 젬이 날 끌어와 앉혔다.
“됐어, 로잘린. 들을 필요 없어. 여긴 마수 못 와.”
“엥. 못 온다니?”
“우리는 앞쪽에서 놓친 마수들이 여기로 오면 마무리하는 역할이거든. 그런데 거기서 도망치는 마수가 있을 리 없어.”
“왜 없어?”
젬은 큭큭 웃고 내게 속삭였다.
“앞쪽에 네 남친 있잖아. 아마 한 마리도 살려서 안 보낼걸. 여기 너 있는 거 아니까 더.”
“…….”
“그냥 우리 알프레도 경 미모나 구경하셔.”
난 갑자기 불안해졌다.
젬의 말도 그렇고, 하품이나 하는 주변 능력자들도 그렇고.
여기에서는 도저히 위험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위험해질 여지조차 없으면 안 되는데?’
미안하지만, 레온은 어떻게든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되어야 했다.
그때 딱, 타이밍 맞춰 내가 개입해서 레온을 구해야만 ‘죽을 운명’을 깰 수 있으니까.
한데, 레온을 살려야 하는 내가, 그와 동떨어진 이곳에 있는 이유?
‘카일 때문이지.’
난 소년병들이 모인 쪽을 보았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카일은 저기 있을 것이다.
‘설마, 내 예상이 틀린 걸까?’
나는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다고 예상되는 상황 A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예상 상황 A란,
‘카일이 위험해지면 레온이 걔를 구하다가 죽게 되는 가장 정석적인 루트지.’
그래서 죽게 될 레온의 곁이 아닌 카일의 근처에 있기로 과감하게 결정한 것이었는데….
‘아, 이거 불안한데.’
뽀각.
“아!”
그때, 품 안에서 뭔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황급히 로브를 뒤적여 체시어와 나눠 가진 조개 모양 마도구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하얀색, 하나는 파란색.
파란색이 부서져 있었다.
이는, 레온의 전선 이탈을 알리는 신호.
‘나이스!’
나는 환호했다.
예상대로 되어가는 상황.
분명히, 레온은 여기로 오고 있을 것이다.
* * *
그 시각.
사령관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전선을 이탈한 레온은, 쉴 새 없이 말을 몰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제5 격전지.
카일 루덴도르프가 있는 곳.
소년병들이 배치된 구역이었다.
사령관인 체시어가 소년병들을 가장 안전한 곳에 두었다는 사실을 안다.
알면서도…….
왜일까.
레온은 도무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분명히 과한 걱정이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컸다.
그렇다면, 딱히 이유 없이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전장을 이탈한 제 행동은 큰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레온은 그런 후폭풍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 * *
‘아니, 근데 레온이 오면 뭐 해? 대체 여기서 어떻게 위험해지지? 마수 머리털 하나 안 보이는데?’
난 바닥에 주저앉아 하품이나 하며 대기 중인 능력자들을 보고 초조해졌다.
지루해하는 건 젬도 마찬가지.
우린 벌써 30분째 실없는 수다만 떠는 중이었다.
“너 근데 진짜 대단하다. 아무리 남친이 걱정된다지만, 전쟁터에 다 따라오고.”
젬은, 체시어가 걱정된 내가 바득바득 따라가겠다고 해서 여기 온 줄 알고 있었다.
“그럼! 이번 토벌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며. 내가 괴물을 대신 잡아 줄 순 없지만, 혹시 체시어나 네가 다치면 치유 마법은 써 줄 수 있어!”
“큭큭. 여기서 다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말은 고맙…… 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젬이 소리 질렀다.
“깜짝아! 왜 그래? 괜찮아?”
젬이 태평하게 뒤로 짚고 있던 손을 번쩍 들었다. 도마뱀 한 마리가 젬의 검지를 물고 있었다.
“아오, 씨!”
몸부림치는 도마뱀을 떼어낸 젬이 말했다.
“감히 날 물어? 너 이 자식, 좀만 기다려라! 네 엄마, 아빠 다 죽으면 다음은 너니까!”
씩씩거리며 도마뱀에게 말하는 젬을 보고 나는 의아했다.
“무슨 소리야?”
“어? 뭐가? 아아, 이거 글렙터 새끼!”
젬이 도마뱀을 흔들며 하는 말에.
잠시, 뇌 정지…….
“뭐어어어?!”
나는 경악하며, 그간 날 가르쳤던 전장의 일타강사, 체시어 리브르 쌤의 말을 떠올렸다.
“글렙터는 무조건, 성체부터 잡는 거야. 성체를 다 토벌하기 전에는 절대 새끼를 잡으면 안 돼.”
글렙터.
이번 토벌전에서 제일 골치 아픈 마수라고 했다.
이곳저곳 널려 있는 개체가 아니라서 직접 보고 경험하진 못했지만, 체시어가 그려준 그림에 따르면 꼭.
‘티라노사우루스처럼 생겼었지.’
생김새가 육식 공룡과 같더라.
한데….
“이, 이건 그냥 도마뱀이잖아! 정말 이게 새끼 마수 맞아?”
“응, 맞아. 글렙터 새끼.”
젬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렙터는 새끼에 대한 집착이랑 희생정신이 커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제일 안전한 곳에 새끼를 따로 두고 기르는 마수야.”
“혹시라도 새끼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자기 몸이 뜯겨나가는 와중에도 새끼에게 달려가기 시작해. 공동 육아를 하니까, 한 마리만 잘못되어도 무리가 전부 이동하지.”
“젬, 이거… 혹시라도 지금 죽여 버리면 큰일 나지?”
“응. 앞쪽에서 토벌이 안 끝났으니 아직 잡으면 안 되지. 지금 얘 건드렸다간 엄마 글렙터랑 아빠 글렙터랑 이모 글렙터랑 삼촌 글렙터랑 싹 다 여기로 달려와.”
“성체와 새끼 사이에 교감 능력이 있어서, 새끼가 잘못되면 글렙터는 그걸 어디서든 느낄 수 있어.”
“자기가 죽는 한이 있어도 새끼를 죽인 대상을 찾아 죽이려고 하니까, 공격력도 몰라보게 강해져. 인간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때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성체를 토벌하기 전에는 절대, 새끼를 잡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체시어의 말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새끼는 어떻게 생겼어?”
“도마뱀처럼 생겼어.”
저기요, 쌤!
이건 도마뱀처럼 생긴 게 아니라 그냥 도마뱀이잖아요!
“말도 안 돼! 나 배웠어도 실수할 뻔했어! 대체 이게 도마뱀인지 새끼 마수인지 어떻게 구분해?”
경악하는 나를 보며 젬이 킬킬거렸다.
“보통 사람들은 못 알아보지. 거의 똑같이 생겼으니까.”
“도마뱀인 줄 알고 죽이면?”
“풉.”
젬이 내 어깨를 쿡 찌르며 주변 능력자들을 턱짓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전장에서 굴러먹을 만큼 굴러먹은 사람들이야. 도마뱀이랑 글렙터 새끼랑 구분 못 할 바보들은 없으니까 안심….”
콰아아앙―!
그때, 엄청난 폭음이 일었다.
“악!”
주변 땅이 크게 울릴 만큼 강력한 공격 마법.
소년병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와. 뭐야, 대체? 후방에 이렇게 강한 능력자가 있어?’
난 놀람과 동시에 당황했다.
“무슨 일입니까!”
지휘관, 알프레도 경이 급히 그쪽으로 가는 게 보였다. 젬도 가기에 나도 허둥지둥 뒤따랐다.
“죄, 죄송합니다…. 노, 놀라서 그만….”
소년병 한 명이 알프레도 경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놀라? 뭐 때문에?’
아. 소년병의 오른손에는 뭔가에 물린 듯한 상처가 있었다. 꽤 깊어 보이는 상처에서 피가 줄줄 났다.
‘잠깐. 그런데 저 애….’
남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어딘가 낯설지 않은 얼굴을 가만 살피던 나는 깨달았다.
‘얘, 카일이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카일이 다섯 살 꼬맹이였던 시절.
‘어쩐지. 도스 정도나 되어야 쓸 수준의 마법이었는데.’
지금 열두 살이 되었을 카일은 많이 변해 있었지만, 어렴풋이 그때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대체 누가 협곡 지형에서 이런 공격 마법을 함부로 사용한단 말입니까!”
알프레도 경이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냈다.
“산사태 같은 2차 피해 때문에 이런 지형에서는 C급 이하의 마법만 사용해야 합니다! 소속 부대에서 안 배웠어요?”
“아….”
카일이 당황한 얼굴로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소심한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안 배웠냐고? 안 배운 게 아니라 못 배웠겠지! 배울 시간이 있었겠느냐고요!’
난 한숨을 쉬었다.
정신 나간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경험도 없는 애를 이 사지에 내몰았는지 모르겠다.
“저, 알프레도 경. 콜록, 콜록. 너무 화내지 마시고요. 산사태까지는 안 날 것 같으니까….”
공격의 여파로 주변을 뿌옇게 채운 모래 먼지.
젬은 기침하며 내 앞의 먼지를 대신 팔로 휙휙 흩뜨려 주다, 카일에게 물었다.
“그런데, 친구야? 대체 뭐에 놀랐길래 갑자기 이런….”
젬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모래 먼지가 대충 가라앉자, 가려졌던 시야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았다.
절벽 아랫자락에 처박혀, 처참히 뭉개진 도마뱀―
아니,
글렙터 새끼의 사체를.
“아, X발….”
젬이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X됐다….”
아빠가 힘을 숨김